도서명: 고구려를 위하여 3 저자명: 김병호 출판사명: 하서 차례 사막의 꽃 무메 북국에 뜨는 별 다시 떠오르는 고구려 중국의 심장부를 공격하라 악의 씨앗들 고구려를 위하여 후기 역사학적 고증 이정기의 왕국을 찾아서 이정기 장군세계 이정기 가 연보 현장 답사 기행 사막의 꽃 무메 연합군과의 다 이긴 싸움에서 카를루크족의 예기치 않은 모반으로 고선지군은 대참패를 기록했다. 7만 병사중 살아서 돌아온 자는 겨우 6천여 명 대부분은 죽었거나 포로로 붙들려 갔다. 그간 고선지가 2차에 걸쳐 정복한 텐산 산맥, 힌두쿠시 산맥 일대의 점령지는 하루아침에 사라센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더욱 통탄스러운 일은 고구려가 패망하고 80년이 지나 고구려를 재건해 보겠다는 몸부림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란 항상 그 역도 존재했다. 사라센으로 끌려간 포로들 가운데는 종이, 인쇄술, 나침판, 화약의 제조 기술자들이 섞여 있었다. 사라센은 이들을 시켜 처음 보는 물건들을 만들게 했다. 그때까지 서양 문명은 동양에 비하면 원시 상태나 다름없었다. 서양은 비로소 고선지의 탈라스 강 패전으로 인해 얻어간 4가지의 중요한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 후세에 서양의 과학이 동양을 앞질러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과연 역사란 굴러가는 수레바퀴처럼 멈추지 않고 영원을 향해 돌고 도는 것일까. 고선지를 위시한 패잔병들이 우여곡절 끝에 허텐에 도착해 보니 벌써 패전 소식이 좌악 퍼져 온 시가지가 폭풍 전야처럼 불안에 쉽싸여 있었다. 고선지는 우선 당군 진영을 찾아 들었으나 허텐을 지키기 위해 으레 있어야 할 진영이 텅텅 비어 있었다. 이슬람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겁을 집어먹은 수비병들이 서둘러 철수해 버린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허텐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의 위구르족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다. 만약 이들이 쳐들어온 이슬람 연합군에 동조해 폭동이라도 일으키는 날이면, 당군은 속수무책으로 전멸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사실 위구르족이 좋아서 당나라에 복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이민족인 중국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고선지의 입장은 또 달랐다. 탈라스 패전으로 자기 힘으로 개척한 땅을 잃는 것까지는 참을 수가 있어도, 그 이전부터 당나라의 영토였던 땅까지 빼앗긴다면 도호로서 더할 나위 없이 수치스런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사적으로 항전할 각오로 텅 빈 진영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위구르족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이슬람 연합군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으로 그의 운명은 끝이었다. 한편 을지마사는 고선지와는 또 다른 감회가 있었다. 그에게 있어 허텐은 어디를 가나 자신의 반쪽처럼 잊혀지지 않은 추억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운 무메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지만 그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슬람 연합군에게 쫓기는 처지인 자신이 이제 와서 지나가 버린 과거를 들추어 어쩌자는 것인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런데도 을지마사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숙 대인의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눈에 익은 토담이 나타나고, 무메가 자기에게 반지를 주었던 늙은 뽕나무가 보이자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을지마사는 문을 성큼 열고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을 따라 어정거렸다. 늙은 살구나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수상한 자가 담장 밖에서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 집 안에서 하인들이 나왔다. 그들은 몇 번 눈을 깜박거리더니 이내 을지마사를 알아보았다. "너는. .. 너는 고구려 사람 을지마사가 아니냐?" 을지마사가 선뜻 대답을 못하고 주춤거리자 다시 말을 걸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을지마사는 하인들을 상대로 긴 이야기를 마냥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자숙 대인 안녕하시냐?" "지금 집에 계신다." 을지마사는 하인들과 맞닥뜨린 이상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자숙 대인의 집도 옛날 같지는 않았다. 어딘가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무메는 어떻게 되었을까?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온갖 상념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윽고 응접실 문을 열고 자숙 대인이 나타났다. 그의 늠름한 풍채는 여전했지만 그 동안 잔주름이 부쩍 늘어 있었다. 을지마사를 본 자숙 대인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을지마사?" 을지마사도 얼결에 일어났다. "자숙 대인 ." 을지마사가 무릎을 꿇고 자숙 대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헤어진 지 실로 5년 만의 해후였다. "을지마사. 네가 정녕 살아서 돌아왔구나." 자숙 대인은 감회에 젖은 듯했다. 그는 을지마사가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응접실 문이 또다시 열렸다. 그리고 중년 여인이 들어섰다. 무메의 어머니 자숙 부인이었다. 자숙 부인은 다가와 을지마사의 어깨를 와락 껴안았다. "네가, 네가 정녕 살아 있었구나." 자숙 부인은 말을 잇지 못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오히려 놀란 쪽은 을지마사였다. 마치 잃었던 친자식을 찾은 것처럼 반가워하는 자숙 부부를 보자 가슴이 찡해 왔다. 이윽고 마음을 가라앉힌 자숙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결혼은 했느냐?" "예, 아니올시다." "정녕 결혼을 아니했느냐?" "예" 자숙 부인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그녀는 을지마사의 말에 내심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복받치는 슬픔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자숙 대인과 부인의 입에서는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을지마사는 무메에 대해서 물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숙 부부의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미루어 필시 좋지 않은 일이 있으리라고 지레짐작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잠시 후 자숙 대인이 을지마사가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했다. 을지마사는 자기가 허텐을 떠난 후 겪었던 일을 대충 얘기하고는, 지금 자신이 탈라스에서 쫓겨 이곳까지 왔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을지마사의 말을 들은 자숙 대인과 부인은 서로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약속이나 한 듯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안방에서 자숙 대인의 말소리가 침통하게 들려 왔다. "부인, 아무래도 을지마사는 붙잡지 못할 사람 같소." 그러나 자숙 부인의 태도는 강경했다. "그럼 우리 무메는 처녀로 늙어 죽으란 말인가요?" 자숙 대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딸자식을 가진 부모인지라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중대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날 밤, 자숙 대인의 저택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다 자숙 대인의 사업에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는 허텐의 거상들이었다. 대부분이 2,3백 명씩의 종자를 거느리고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를 따라 무역업을 해오면서 후덕한 자숙 대인의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자숙 대인이 좌중을 돌아보며 무겁게 입을열었다. "지금 우리 허텐이 어려운 처지에 있소. 아시다시피 연합군이 쳐들어오는데 고선지 장군이 고립무원한 처지에 있소. 이번에 고선지 장군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떤지요?" 사안이 중대한지라 쉽게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자숙 대인의 말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실인즉 싸울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중대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겉보기에 대상인 그들은 동서양의 먼 길을 가는 도중에 강도떼를 만나면 금방 훌륭한 병사로 탈바꿈했다. 그때 거상 한 명이 일어섰다. "자숙 대인, 우린 어쨌든 이슬람이오. 어떻게 같은 형제인 연합군과 맞서 싸운다는 말씀인지?" 자숙 대인도 난감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옳은 말이오. 그러나 고선지 장군은 도호가 된 후 전임자 부몽영찰과는 달리 선정을 베풀었소. 이제 우리가 그 빚을 갚을 차례요." 좌중이 침묵을 지킨 가운데 자숙 대인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듣기로는 서역에서도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슬람 형제들끼리도 싸운다고 했소. 그것이 바로 알라신의 뜻이 아니겠소?" 자숙 대인은 허텐 사람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인데다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허텐의 성 위에는 형형색색의 기치가 무수히 휘날렸다. 그리고 고선지의 패잔병 5천여 명과, 병사로 둔갑한 허텐 대상 7천여 명. 도합 1만 3천여 명의 병사들이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지아드 이븐 살리가 이끄는 이슬람 연합군 10만 명이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허텐에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였다. 허텐 성에 당도한 지아드 이븐 살리는 속으로 놀랐다. 전멸을 면하고 겨우 기천 명이 도망친 고선지의 원정군을 뒤쫓기만 하면, 중국의 서북부 일대를 점령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허텐에 당도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성 위에 꽃힌 무수한 깃발과 당당하게 무장한 새로운 병사들, 허텐성은 의외로 견고해 보였다. 지아드 이븐 살리가 어떻게 성을 공격할까 궁리를 하고 있는데, 그때 성루 위에 풍채 좋은 노인 한 명이 나타나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허텐 대상 자숙이다. 너희들의 사령관이 누군가?" 지아드 이븐 살리도 질세라 앞으로 나갔다. "내가 지아드 이븐 살리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우리는 이슬람 형제다. 물러가라." "물러가라고? 물러갈 사람이면 애초에 이곳까지 먼 길을 오지 않았다." "같은 이슬람 형제라고 해도 당신과 나는 나라가 다른 사람. 우리는 3일 동안은 너희 공격을 막아낼 수가 있다. 그러나,,,,,,." 자숙 대인에게는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3일이 지나면 너희들은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 "흥! 겁을 주는 거냐?" "아니다. 이곳에는 사방 200리 안팎에 물이 없다. 오직 이 허텐성에만 오아시스가 있을 뿐이다." 그제서야 지아드 이븐 살리도 더럭 겁이 났다. 10만에 이르는병사가 물을 마시지 않고 싸울 수는 없었다. 만약 공성을 하다가 이기지 못하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아드이븐 살리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 "만약 고선지 일당을 내어 주면, 이 땅에다 당신네들 나라를 세워 주겠소." 그러나 자숙 대인은 꾐에 넘어갈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 보니 당신은 사령관 자격도 없는 위인이다. 당신과 같은 비열한 인간을 상대하면 내 혀만 더러워질 것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자숙 대인이 말을 마치고는 턱짓을 했다. 동시에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들려 왔다. 꽝 꽝 꽝. 허텐성에는 화포가 장치되어 있었다. 폭탄이 떨어지는 곳마다 연합군들이 쓰러졌다 뒤이어 성 위에서 화살이 무수히 날아왔다. 연합군은 불시에 당한 공격에 놀라 화포와 화살의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섰다. 그날은 더 이상의 전투가 없었다. 어둠이 깔릴 때까지 양군은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이 대치하고만 있었다. 다음날 새벽, 성루에 있던 허텐 병사들은 자기들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그자들이 어디로 갔을까?" 자숙 대인의 말에 겁을 먹은 지아드 이븐 살리는 혹시 추격군이 따라붙을까 봐 밤을 이용해 철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4년에 걸친 고선지의 서역 정벌은 단 한번의 탈라스 패전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슬람 연합군이 물러가자 이제는 고선지가 움직일 차례였다. 그는 안서도호부가 자리잡고 있는 쿠차로 가야 했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고선지를 따라 나설 수가 없었다. 을지마사에게는 허텐에 남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다음날 고선지는 패잔병들을 이끌고 쿠차를 향해 떠나고, 을지마사는 자숙 대인의 집으로 갔다. 그날 밤, 삼경이 지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숙 대인의 집을 빠져 나왔다. 을지마사와 안내인들이었다. 자숙 대인이 미리 손을 써놓았는지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을지마사 일행을 통과시켜 주었다. 성문을 나서자 곧 사막이 시작되었다. 푸르게 쏟아지는 달빛이 사람과 낙타떼의 그림자를 모래 위에 길게 드리웠다. 오직 낙타들이 모래를 밟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그렇게 한식경을 가자 옛 고성 같은 건물이 어슴푸레하게 나타났다. 일행은 자숙 대인의 여름 별장에 도착하자 건물 밑으로 다가가서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를 냈다. 한참을 기다리자 이윽고 안에서 불빛이 나타났다. 이층 베란다에 나온 하녀들이 방문객을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다시 불빛이 사라졌다. 또 얼마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불빛이 여러 개 나타났다. 이쪽에서도 상대방이 알아볼 수 있도록 각자의 얼굴에 불빛을 비추었다. 서로간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다음 순간 격정에 찬 부르짖음이 을지마사의 온몸을 타고 터져 나왔다. "무메 -" 을지마사의 애절한 목소리가 다시 밤공기 속으로 퍼졌다. "무메-" "흑" 대답 대신 여자의 흐느낌이 들려 왔다. 동시에 베란다에서 아래로 몸을 던져 내리는 여인이 있었다. 무메였다. 을지마사가 밑에서 무메의 몸을 받아 안았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를 꼬옥 부등켜안고 있었다. 앞으로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5년 동안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흐르던 시간은 갑자기 그 흐름을 멈추고 영원을 향해 언제까지나 정지해 있을 듯싶었다. 다음날 밤, 자숙 대인의 별장에서는 기묘한 결혼식이 있었다. 50이 넘은 사제가 별장으로 찾아 들었다. 사제는 검은 사제복을 입고, 가슴에는 큼직한 청동 십자가를 부치고 있었다. 자숙 부인이 고집을 부려 결혼식이 경교 방식으로 치러진 것이다. 1200여년 전에 을지마사와 무메의 결혼식이 카톨릭의 혼배성사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을지마사와 무메 앞에 선 경교의 사제가 먼저 을지마사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내를 내 몸같이 사랑하고 죽음 이외에는 갈라서지 않겠는가?" 사제는 이어서 무메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무메도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사제는 드디어 을지마사와 무메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온갖 역경을 이기고 하나가 된 그들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자숙 대인은 을지마사에게 간청을 하다시피 했다. "너희들이 여기에서 살면 내 가업을 물려주마." 자숙 대인에 이어 부인의 목소리는 차라리 애원에 가까웠다. "차라리 내가 새라면 너희들과 함께 갈 수 있으련만." 을지마사도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저희 조국 고구려가 망한 지도 벌써 80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부모 형제들이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망해 버린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을지마사는 자칫하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두 분을 꼭 모시러 오겠습니다." 예정된 작별의 시간이 왔다. 자숙 부인은 쿠차를 향해 길을 떠나는 하나밖에 없는 혈육 무메를 한나절 길이나 뒤따라왔다. 마침내 헤어져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무메야!" 자숙 부인은 딸 무메를 부르며 모습이 시야에서 가물가물 사라질 때까지 넋을 놓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메야-." 자숙 부인은 드디어 딸의 모습이 모래 언덕 너머로 사라지자 무너지듯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자숙 부부와 헤어진 뒤, 보름 만에 쿠차에 도착한 을지마사는 도호부로 찾아갔다. 고선지가 먼저 와서 자리잡고 있었다. 그도 패전한 장수라 기색이 편치 않았다. "고선지 장군님 , 앞으로 어떡하시겠습니까?" 고선지의 목소리는 지쳐 있는 모습만큼이나 무거웠다. "지금 생각중이다." 이미 고선지의 패전 보고가 당나라 조정에 올라가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고선지의 말 속에는 당나라 조정의 처분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적인 태도가 엿보였다. "형님?" 을지마사가 고선지를 다정스럽게 불렀다. "주강 남쪽 마을로 갑시다. 그곳을 뒤지면 아마도 살아 있는 우리 동포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들과 함께 신천지를 개척합시다." 고선지는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형님, 그곳에 가면 나라 할머니도, 나데님도 있을 것입니다. 당나라도 사라센도 없다구요, 우리만의 나라를 세우고 삽시다." 을지마사는 고선지를 붙들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고선지는 선뜻 결심을 못 했다. "천천히 생각해 보마." 을지마사도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고선지의 결심이 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을지마사와 무메의 신혼살림이 시작되었다. 을지마사는 뜨내기나 다름없는 자기를 5년씩이나 기다려준 무메가 마음속으로 고맙기만 했다. 무메는 부잣집에서 자란 외동딸이었지만, 부지런하고 마음씨가 고운 여자였다. 탈라스 강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군사들 가운데는 부상병들이 많아서 도호부에서는 이들을 따로 수용해서 치료하고 있었다. 무메는 이들에게 약도 발라 주고, 음식도 해주며 그들을 돌보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을지마사가 걱정이 되어서 말리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좋아서 돕는 거예요." 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무메는 고구려 말을 배우느라고 애를 썼다. 을지마사가 성가시기도 해서 그 까닭을 물었다. "나는 더 이상 위구르 사람이 아니라구요. 이제 고구려 여인이에요, 고구려 말을 몰라서 되겠어요?" 을지마사는 그런 무메가 대견스러웠다. 어느덧 4개월이 눈깜짝할 새에 지나가고, 당나라 조정에서 어명이 도착했다. 예상한 대로 고선지 장군을 안서도호에서 해임하고 후임에 왕정견(이자는 부임한 지 얼마 후 죽어서 봉상청이 도호가 되었음)이라는 자가 임명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고선지 장군은 비록 패전은 했지만 서역 정벌의 큰 공을 인정해서 밀운군공으로 봉한다는 것이었다. 고선지로서는 여생을 영화롭게 살 수 있는 대접이었다. 당나라 조정에서 고선지를 그와 같이 후하게 대접한 것은, 물론 고선지가 세운 과거의 공로도 참작했겠지만, 혹시나 변방에 있는 고선지가 불만을 품고 반역이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에 사전에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자는 의도도 다분히 깔려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사자였다. 고선지가 당나라 조정의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데 있었다. 세상일이 반드시 예측한 대로되어지는 게 아니듯이 그의 마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조정에서 사자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도호부로 찾아간 을지마사를 보자 고선지는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을지마사, 나는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구나." 즉 당나라 조정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말이었다. 을지마사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선지 형! 우리가 여기서 주저앉는다면,,,,,, 앞으로 고구려 동포들을 어떡하시렵니까?" 고선지가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하다. 시운이 따르지 않는 것을 난들 도리가 있느냐?" 뒤이어 고선지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이제부터 당나라 사람으로 살겠다. 너도 좋다면 나와 함께 장안으로 가자. 내가 돌봐 주마." 을지마사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렇다고 요지부동인 그의 결심이 흔들릴 리는 없었다. 그의 입에서 옹골찬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싫습니다. 선지 형이나 가서 잘 사시오." "너도 그만큼 고생을 했으면서 왜 싫다는 거냐? 남들처럼 호강하며 잘 살고 싶지 않느냐?" 을지마사는 언젠가 장안성 객사에서 왕사례로부터 그와 같은 말을 들었고, 이번에는 고선지의 입을 통해서 두번째로 같은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 자신도 왜 그래야 한다는 것을 조리있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민족적 자각이란 일일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고선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동안 친동생같이 사랑한 을지마사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섭섭한 모양이었다. "다시 묻겠다. 나와 함께 장안으로 가지 않겠느냐?" "네 , 안 가겠습니다." 을지마사의 대답은 의외로 분명했다. "왜? 왜?" "고구려를 위해서 입니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젠 죽은 고구려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선지 형, 설혹 고구려를 영원히 되살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저는 고구려를 위해서 살다가 죽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중국사람이 될 수도 또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애초에고구려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며칠 뒤 고선지와 을지마사 일행은 장안을 향해 떠났다. 농우를 거쳐 장안과 운남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부등켜안았다. 그리고 기약할 수 없는 작별을 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갔다. 을지마사는 장안의 반대쪽인 사천으로 길을 잡았다. 실로 6년만의 귀향, 당군에게 전멸당했다는 주강 남쪽 마을, 비록 폐허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그 마을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 땅 위에다 입술이라도 뜨겁게 맞대고 싶었다. 을지마사가 무메와 함께 삼거리 주막에서 묵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마침 운남으로 가는 대상들을 만났다. 그들은 장안에서 종이, 벼루, 붓, 비단을 싣고 운남을 향해 가고 있었다. 대신 운남에서는 차, 대리석, 상아 등을 싣고 와서 판다고 했다. 을지마사는 대상 우두머리를 찾아가 인사를 했다. 지난번의 텁석부리 영감이 아니었다. 나이 50이 넘어 백발이 성성한 외눈박이 중늙은이였다. 그러나 그는 대상의 우두머리답게 체격이 건장하고, 그의 외눈에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정기가 스며 있었다. "사형은 어디서 사는 뉘시오?" 을지마사는 숨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설혹 불이익이 온다 할지라도 고구려 사람으로 떳떳하게 행세하고 싶었다. "나는 서역의 쿠차에서 온 고구려인입니다." "그래요? 그럼 고선지 장군의?" "그렇습니다. 고 장군 밑에서 싸웠습니다." "용케도 살아났구먼. 그런데 무슨 용건으로 운남에 가시오?" "운남까지 가는 것이 아니고, 주강 남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외눈박이 영감은 대뜸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강 남쪽이라고 하면 그때까지도 세상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오지였다. "그곳은 왜?" 을지마사는 어쨌든 그들과 동행하려면 자기의 여행 목적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상대편이 안심하고 자기를 대상의 일원으로 끼워줄 터였다. "저는 그곳 고구려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쳇, 그곳은 벌써 요절이 났소. 가봐야 헛걸음일 거요."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가만있자,,,,,,." 외눈박이 영감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당신, 혹시 대리라는 곳을 아시오?" "대리? 모릅니다." "고구려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으면 그쪽으로 가시오. 대리라는 곳에 고구려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을지마사의 귀가 번쩍 뜨였다. "대리가 어딨습니까?" "우리는 운남 곤명 까지 가오. 곤명에서 서쪽으로 천여리를 더 가면 큰 호수가 나오고, 그곳이 바로 대리라고 그럽디다." 을지마사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대리에서 살고 있다는 고구려 사람들은 또 누군가? 아마도 주강보다 더 멀리서 살고 있다면 그들에게는 필시 곡절이 있을 터였다. 혹시나 주강 남쪽에서 살던 고구려 사람들이 아닐까? 을지마사는 그 사람들을 먼저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도 운남으로 가겠습니다." 대상 우두머리 외눈박이 영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상들은 산남동도(사천성 동부) 길로 접어들었다. 운남으로 가는 길은 산세가 험했다. 서역과 같은 사막은 없었지만, 높은 산이 첩첩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진종일 산을 넘으면 강이 나오고, 강을 건너면 또 산길이었다. 이렇게 자그마치 만리 길을 가야 하는 지루한 행군이었다. 대상들은 말을 이용해서 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달려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말 잔등에 짐을 가득 실었기 때문에 터벅터벅 걸어서 가는 것이었다. 을지마사와 무메는 그래도 나은 처지였다. 하루종일 말잔등에 올라타고 가다가 석양 무렵이 되면 주막에 들를 수밖에 없었다. 을지마사는 무메가 걱정되었다. 만리 길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장거리 여행이었다. 그러나 무메는 의외로 강단이 있었다. 그녀의 몸 속에는 불모의 사막 속에서 수십대를 죽지 않고 살아온 위구르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을지마사가 말리는데도 을지마사의 의복만큼은 깨끗하게 빨아 주고 밥도 따로 지어 주었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당신에게 이렇게 해주는 꿈을 꾸면서 기다렸어요." 이런 무메를 볼 때마다 을지마사는 코끝이 찡해 왔다. 더욱이나 무메는 어느 틈에 고구려 말을 더듬더듬 할 줄 알았다. 고구려 말과 위구르족 말이 비슷한 데가 있긴 해도 남의 나라 말을 배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끔 을지마사가 못 알아듣거나, 배꼽을 거머쥐고 웃을 수밖에 없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그런데도 무메는 고구려 말을 익히느라고 노심초사했다. 대상 일행이 운남을 향해 일주일쯤 갔을 때 한떼의 기마병들을 만났다. 기마병들은 모두 큰 대바구니를 양쪽에 끼고 숨가쁘게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 모양이 하도 우스꽝스러워 을지마사가 외눈박이 영감에게 물었다. "저 군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오?" "아, 저것 말이오? 린찌를 장안으로 운반하는 특급 기마병들이요." 을지마사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도대체 린찌라는 것이 무엇이오? "사천서만 생산되는 과일이지요. 그런데 린찌라는 과일은 10일만 지나면 썩어서 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기마병들이 밤낮을 달려 장안으로 운반한답니다." "그 귀한 과일은 황제가 먹는 것이오?" 외눈박이 영감은 을지마사가 시국 돌아가는 것을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황제가 아니라 황제를 사로잡은 양귀비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지요. 바로 저 과일을 나르기 위해 저렇듯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당나라 국력이 휘청거린답니다." 도대체 입맛을 맞추기 위해 국력을 소모할 만큼 미인이라는 양귀비는 또 누굴까? 그러나 을지마사는 외눈박이 영감에게 다시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외눈박이 영감은 먼 길을 가는데 마침 좋은 화제를 만났다는 듯이 양귀비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꺼냈다. "동서 고금을 통해 그 짝이 없을 만큼 천하절색이지요. 당나라 현종 황제의 눈을 멀게 한 장본인이랍니다." 현종은 양귀비의 요염한 자태에 넋을 잃고 수왕의 비, 곧 자기며느리를 빼앗은 것이다. 현종의 아비 당고종도 당태종의 첩, 그러니까 자기의 어머니뻘이 되는 무씨(측천무후)를 버젓이 아내로 삼았는데 부전자전이랄까 현종은 자기 자식의 아내를 빼앗는 짐승 같은 짓을 했다. 아무튼 당현종은 모든 정치는 간신 이임보와 고력사에게 맡기고, 밤낮으로 장안 동쪽 교외에 있는 화청지라는 연못의 이궁에서 애첩 양귀비를 끼고 살았다. 그 무렵 안녹산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란의 소구드인, 어머니는 돌궐 여자였는데 생김새가 괴상했다. 몸집이 크고 살이 쪄서 늘어진 뱃살이 무릎을 덮을 정도였으며, 스스로도 몸무게가 300근(약 180킬로그램)이 나간다고 했다. 그러나 안녹산은 생김새와는 달리 꾀가 많고 음흥해서 간신 이임보에게 아부를 잘했다 그는 일약 평로, 범양, 하남의 3개 도를 관장하는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현종은 그를 대할 때마다 그의 생김새가 하도 우스꽝스러워 하루는 농담을 했다. "그대의 몸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길래 그렇게 큰가?" 안녹산은 달변으로 아첨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다른 것은 없고, 단지 황제를 위하는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이 들어 있을 뿐입니다." 현종은 안녹산의 충성어린 말을 듣고서 대단히 기뻐했다. 안녹산은 현종의 총애를 받자 궁중을 무시로 드나들며 딸 같은 나이의 양귀비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밀통을 했다. 안녹산의 성교기술이 기가 막혔는지,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있었다면 양귀비는 안녹산이 없으면 못살 지경이 되었다. 오죽하면 오종종하고 가녀린 체구의 양귀비가 코끼리만한 덩치의 안녹산을 발가벗기고는 3일 동안 동침하면서 목욕을 시키고, 강보로 싸서 가마에 태워 궁녀들로 하여금 떠메고 다니게 한일까지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늙은 현종은 바보가 되었는지 화를 내기는커녕, 안녹산에게 물을 떠 먹이라고 금으로 만든 잔까지 주었으니 진짜로 눈이 멀지 않고는 일어날 수가 없는 해괴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대개 끝이 나쁜 법. 당나라의 조정은 겉으로는 한없이 평온한 듯했지만, 폭풍을 예고하는 음모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그때까지 안녹산을 감싸고 돌던 재상 이임보가 죽자, 안녹산의 방자한 행동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던 사람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안녹산을 가장 미워한 사람은 뜻밖에도 양귀비의 오라비인 재상 양국충과 왕사례의 의형 가서한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안녹산을 제거하도록 진언을 해도 양귀비에 한번 눈이 멀어 버린 당현종은 번번이 묵살해 버렸다. 운남 대상 외눈박이 영감은 살아온 연륜만큼이나 세상의 앞일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머지않아 그 계집년 밑구멍으로 천하가 다 들어갈 것이오." 을지마사는 모두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 흥미진진했다. 뿐만 아니라 속으로 '차라리 세상이나 확 뒤집혀 보라지' 하는 은근한 기대감조차 생겼다. 대상 일행은 남쪽을 향해 두 달을 더 갔다. 사천성 지경을 지나 귀주성에 이르자 산세가 더욱 험준해졌다. 외눈박이 영감의 말로는 이곳에서 주강이 흘러내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을지마사는 불현듯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주강 남쪽의 나라님과 고구려 유민들은 어찌 되었을까?' 을지마사는 주강 남쪽에서 살아 남은 나라 할머니의 고구려 유민들이 귀주성에서 당군과 또 한번 싸우고, 운남성으로 퇴각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시 한 달이 지나서야 대상 일행은 드디어 운남 고원으로 올랐다. 때는 가을로 접어들었다 낮으로는 고원의 햇살이 따가웠다. 이산 저산의 활엽수들이 색색으로 물들어 천지가 마치 불타는 듯했다. 단조로운 사막 속에서 태어나 자라온 무메도 처음 보는 아름다운 광경이라 넋을 놓고 바라보며 좋아했다. 곤명에 이르러 을지마사는 외눈박이 영감의 대상들과는 헤어졌다. 을지마사와 무메는 단둘이서 대리를 향해 서쪽으로 천 여리를 더 가야만 했다. 무메는 길을 가다 도중에 마을에 들르는 것이 즐거웠다. 운남성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땐가 섬서성 일대에서 살던 사람들이라 그 북쪽에서 살고 있는 위구르족과 비슷한 풍속이 많았다. 음식맛도 비슷해서 무메는 왠지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을지마사와 무메는 열이틀을 더 가서 대리에 당도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푸른 호수가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는 곳에 대리가 있었다. 을지마사는 대리에 도착하자마자 고구려 유민들을 찾았다. 이사람 저사람에게 수소문을 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리 근처에서 사는 백족과 이족은 저희들끼리 고구려 유민들을 라후족(호랑이를 기르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고구려 유민들이 그때까지도 호랑이를 산신으로 섬기고 제사를 지내는 풍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당 안에 호랑이를 그려 모셔놓은 걸 보고 운남성 토박이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호랑이를 기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을지마사는 그들의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라후족이 곧 고구려사람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드디어 을지마사와 무메는 고구려 마을로 안내되었다. 주강 남쪽 마을을 떠난 지 곡 G년 만에야 을지마사는 고구려 유민들과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을지마사를 부등켜안고 미친 듯이 뛰기도 하고, 주저앉아 목놓아 울기도 했다. 마을을 떠난 후 소식이 끊겨 죽었다고 단념했던 사람이 돌아왔으니 모두들 감격에 겨워, 그 동안의 시련의 세월이 새삼 복받쳐 올랐던 것이다. 을지마사가 마침내 나데에게 남편 아소미네의 죽음을 알렸을 때 나데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나데에게는 6년 동안의 기다림의 끝이 죽음이라는 비보였던 것이다. 밤이 이슥하도록 마을에서는 지나간 세월을 더듬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을지마사의 이야기를 듣는 고구려 유민들은 흥분을 해서 땅을 치기도 하고, 슬퍼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을지마사의 이야기는 한편의 대하 드라마였다. 다음 나라 할머니와 나데가 이끈 고구려 유민들의 지나간 이야기를 들으면서 을지마사의 입에서도 탄식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가운데서도 을지마사의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게 한 것은 나라 할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는 나라 할머니의 장렬한 죽음 앞에 목이 메었다. 을지마사가 대리로 돌아온 후 며칠이 지났다. 을지마사는 고구려 유민들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당군이 귀주성에서 참패를 하고, 또다시 고구려 유민을 몰살시키기 위해 운남 고원까지 진격했다면 불원간 대리를 침략할 것은 불을 보듯뻔한 일이었다. 그사이 나데가 젊은이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있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중국은 옛날부터 사람으로 싸웠다 전쟁에 한번 동원되었다 하면 적어야 2만, 많으면100만 명씩인데 겨우 2천여 명의 풋내기 병사를 가지고는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무기도 보잘것없고, 전술 같은 건 알지도 못했다. 하루는 을지마사가 나데를 찾아갔다. "나데님 , 이족과 백족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일 수 없을까요? 우리들 2천 명으로는 유사시에 당군과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날을 잡아 고구려, 이족, 백족의 지도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사실 이족과 백족은 대리에서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수백 년을 평화롭게 살아왔기 때문에 바깥 세상의 전쟁이란 것을 몰랐다.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자기네들을 공연한 일에 끌어들이지 말라는 듯 코방귀를 뀌었다. "당신네들은 2년 전의 일을 잊었소?" 나데가 그들의 무지를 일깨웠다. "그, 그게 무슨 말이지요?" "당군이 곤명까지 와서 죄 없는 이족 사람들을 수천 명씩이나 포로로 잡아간 사실을 잊었느냔 말이오?" "장안인가 어딘가 대궐에 가서 잘 살겠지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백족과 이족의 대꾸에 을지마사는 기가 막혔다. 그들은 사악한 중국 사람들에 대해 너무도 모르는 것이 많았다. "끌려간 여자들은 이놈 저놈에게 강간당하고, 남자들은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매를 맞아 가며 일을 해야 하는 노예 생활을 하고 있소." 그제서야 그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 그게 사실이오?" "다음에 당군이 오면 당신과 당신네 자식을 잡아갈 차례요." 나데와 을지마사는 이족과 백족을 겨우 설득해서 부족별로 2천 명씩 4천 명을 끌어모았다. 운남성군은 고구려인 2천 명까지 합쳐 6천 명, 제법 군사티가 났지만 그래도 당군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는 숫자였다. 다음날 을지마사는 부대 편성을 했다. 자신이 총대장을 맡고, 고구려군 부대장 가한서한, 백족군 부대장 마방돌기 , 이족군 부대장은 살바로 했다. 그리고 부대장 밑에 다시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을 두었다. 그러고 나서 고된 훈련에 들어갔다. 을지마사는 지난 4년 동안 서역을 돌아다니며 전쟁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을지마사가 힘들여 가르친 것은 무술도 있었지만, 부대 전술훈련이었다. 대리와 같은 산악지대에서 적을 쳐부수자면 부대끼리 연락이 긴밀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무메도 한몫을 했다. 나데의 지휘를 받으며 군복을 만들고, 밥과 반찬을 만드는 데 앞장을 섰다. 행방이 묘연한 남자를 5년씩이나 기다릴 수 있는 여인, 무메는 행동거지에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무메가 첫딸을 낳았다. 을지마사는 딸의 이름을 여옥이라고 지었다. 낙양성 청루에서 도망치다가 황하 건너 유씨촌에서 죽은 여옥을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주변에 딸을 낳은 집이 있으면 연화, 모화, 나나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많은 인생을 살았을 낙양성 청루의 고구려 아가씨들 이름이었다. 새롭게 태어난 어린아이들이 그녀들의 한을 풀어 주고, 대신 행복한 인생을 살라는 뜻에서였다. 아니나다를까 운남성 고원 일대에 예상했던 먹구름장이 모여들고 있었다. 정권을 휘두르고 있던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이 시어사 이밀에게 다시 군사 6만을 주어 운남의 고구려 유민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이밀은 두 번씩이나 출정하여 군사의 태반을 잃은 앙갚음을 하기 위해 운남 고원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때는 당나라 천보 13년(754). 이밀의 당군은 그해7월 운남 고원의 중심부 곤명에 도착했다. 그리고 쉴 사이도 없이 대리로 향했다. 당시 대리에는 남소 왕국이 있었지만, 고구려 유민, 백족, 이족 등의 부족 연맹체와 같은 것이었고, 주도권은 문화가 월등한 고구려 유민들이 쥐고 있었다. 당군이 대리와 곤명의 중간에 위치한 초웅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대리의 고구려, 백족, 이족 연합군은 당군의 침략 사실을 알았다. 난생 처음으로 외침을 받은 대리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정신을 못 차린다면 싸움이 될 까닭이 없었다. 민심은 곧 군심 , 을지마사는 즉시 부족장들을 소집했다. "내일 이곳은 전쟁터가 될 것이오." ",,,,,,." 나잇살이나 먹은 부족장들도 반쯤 얼이 빠져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 부족을 이끌고 즉시 떠나시오. 가재도구는 그대로 두고 10일 분 식량만 가지고 가도록." "가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이족은 북쪽으로 해서 여강, 백족은 서쪽으로 영평에 가서 편히들 쉬었다 오시오." "그럼 , 라후족은요?" "이곳 대리에 그대로 남을 것이오." 이족과 백족들은 그날로 떠나 버렸다. 그날 밤 주민들 대부분이 빠져 나간 대리에는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골목마다 유령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것 같은 으스스한 밤이었다. 밤이 지나고 이윽고 동녁이 뿌옇게 밝아 왔다. 운남성 연합군은 을지마사의 작전지시에 따라 각대가 자기 위치로 떠났다. 그 가운데서도 고구려군 2천 명은 최전방인 이해동쪽 언덕에 배치되었다. 연개수근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당군의 척후대를 발견한 것은 그날 오후였다. 그러나 그들은 본대를 기다리는 듯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날 밤, 흡사 폭풍 전야와 같은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서쪽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을지마사의 지휘 본부 부근에서 난데없이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냐!"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숨을 죽였다. "누구냔 말이야. 썩 나오지 못할까?" 그때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예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무메예요." 을지마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무메의 모습이 드러났다. "당신이 어떻게 이곳까지?" "저도 싸우러 왔어요." 무메는 살포시 웃었다. "당신이 전쟁터에 있는데 나만 집 안에 있을 수 있나요?" "아니, 당신이 전쟁을 하다니?" "왜 여자라고 전쟁을 해서는 안 되나요? 당신이 싸우는데 내가 구경만 하고 있으면 나는 당신의 아내로서 자격이 없어요." 을지마사의 가슴속에서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무메를 와락 끌어안았다.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무메의 결심에 을지마사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그는 무메를 꽉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어둠이 두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 주고있었다. 다음날 아침 드디어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먼저 고구려군의 욕설로부터 시작되었다. "당군 되놈들아, 죽지 않고 왜 또 왔느냐?" "송사리는 비키고 너희 두목 현종인가 하는 개 같은 놈을 데리고 와서 항복해라." 이밀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지엄한 황제를 개 같은 놈이라고 욕설을 퍼붓자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 얼굴이 새빨개졌다. "돌격!" 당장 이밀의 명령에 "등 등 등" 고각이 울렸다. 곧이어 당군과 고구려군이 맞붙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수적으로 당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연개수근이 소리를 질렀다. "후퇴 ! 후퇴하라 " 고구려군이 이해를 끼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사기가 충천한 당군이 급히 뒤쫓아왔다. 이윽고 당군이 고구려군을 거의 붙잡을 수 있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앗! 큰일났어요." 이해 서산 중턱의 연합군 지휘소에서 지르는 무메의 목소리였다. 무메는 지휘소에서 전쟁터를 내려다보며 안타까워 안절부절못했다. "와! 살았다 ." 무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개수근의 고구려군이 당군에게 붙잡히기 직전 어디선가 함성을 지르며 한떼의 고구려군이 나타났던 것이다. 언덕 너머에서 숨어 있던 명림오묘가 이끄는 일지군이었다. 그러나 명림오묘군도 당나라 대군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또 이해를 끼고 도망을 쳤다. "아-아-." 서산 중턱에서 무메는 발을 동동 굴렀다. 어느덧 무메의 양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그녀의 시야에 장수 한 명이 고꾸라지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뒤쫓던 당군이 벌떼처럼 고구려군 장수를 에워쌌다. 난군중에 화살을 맞고 넘어진 고구려 장수는 바로 연개수근이었다. 이밀은 작전이 계획대로 되지 않자 초조한 나머지 조정에 체면이라도 세울 양으로 고구려군 대장을 잡거든 반드시 산 채로 붙들어 오라고 명령했다. 당나라 군사들은 부상당한 연개수근을 들것 위에 누이고 이밀이 기다리는 본진으로 가고 있었다. 연개수근은 죽은 척하면서 슬쩍 곁눈질로 살폈다. 말을 탄 당군 한 놈이 거들먹거리며 곁에 따라오고 있었다. 연개수근은 속으로 바로 이때다 싶어 아랫배에 힘을 주고 벌떡 일어나 말 탄 당군에게 덤벼들었다. "에잇 !" 순식간에 말을 빼앗아 탄 연개수근은 고구려군 진지를 향해 내달렸다. 산중턱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본 무메도 덩달아 소리를 내질렀다. "살았다. 연 장군 만세!" 무메는 을지마사가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자 발을 동동굴렀다. "여보, 어떻게 좀 해봐요, 저러다간 전멸당하겠어요."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을지마사는 빙그레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에도 고구려군은 점점 몰리는 형세였다. 당군은 헐떡거리면서 다 잡은 고기를 놓칠까 봐 그 뒤를 바짝 쫓았다. 그때 또 "와!" 하는 함성 소리가 들려 왔다. 아불화도마가 이끄는 고구려군이었다. 그러나 아불화도마군도 몇 차례 싸우다가 꽁무니를 뺐다. 당장 이밀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급히 소리를 질렀다. "추격 중지 !" 뒤이어 신호를 알리는 고각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졌다. 등등 뚜뚜, 등등 뚜뚜. 당군은 고구려군이 이해 서쪽으로 죽어라고 내빼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당군의 젊은 장수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다 이긴 싸움을 망쳐 놓다니!" "이럴 바에야 싸우지 말고 돌아가는 게 좋겠어." 차마 대장 이밀에게 대놓고 비난할 수는 없었지만, 젊은 장수들의 불평 속에는 이밀이 겁쟁이라는 뜻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 이밀도 괴로웠다. 혹시 고구려군이 복병을 숨겨 두고 유인계를 쓰지 않는가 해서 서둘러 중지 명령을 내렸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고 보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밀은 능력 있는 장수였다. 그는 부하 장수들을 집합시켰다. "오늘은 시험삼아 전초전을 해본 것에 불과하다. 내일 결전을 하겠다." 이밀은 겁쟁이 꼴이 되어 버린 수치스러움을 만회할 양으로 손을 들어 이해 서쪽을 가리키며 호기롭게 말했다. "내일은 돼지몰이 작전을 해서 고구려 놈들 씨를 말릴 것이다." "돼지몰이 작전?" "그렇다.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남쪽으로, 나머지 절반은 북쪽으로 이해를 끼고 추격을 한다. 그러면 돼지처럼 쫓긴 고구려 놈들은 저기 서쪽에서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우리에게 협공을 당해 전멸할 것이다." 방금 전만 해도 불만에 차서 부루퉁하던 장수들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역시, 이밀 대장은 하늘이 내린 전략가야." "암 그렇고말고, 이 장군이나 되니까 이런 험지에서 악착같은 고구려 놈들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거지." 이윽고 결전의 날이 밝았다. 맨 먼저 목도사가 이끄는 고구려군 부대가 당군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대들었다. 기다리고 있던 당군이 나는 듯이 목도사의 부대를 쫓아 내달렸다. 목도사의 부대는 당군을 대적하기에 힘에 부쳤든지 이내 이해 북안을 돌며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남쪽 언덕에서 당군과 맞섰던 귀실우오의 부대도 목도사의 부대와 마찬가지로 뒤를 보이고 달아났다. 당군에게 쫓기는 고구려군은 마치 릴레이를 하는 것 같았다. 뒤를 급히 쫓는당군에게 하마터면 잡힐 듯한 지점에 이르자 남안에서는 아소수미의 부대가, 북안에서는 가한서한의 부대가 불쑥 나타나 당군과 맞붙어 싸우다가 이내 당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또다시 줄행랑을 놓는다. 당군은 사기가 충천했다. 그래서 고구려군의 뒤를 죽을힘을 다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뒤쫓았다. 이밀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이해 양안을 따라 쫓기던 고구려군은 이해 서쪽 강안으로 모여들었다. 당군 6만에 고구려군 2천, 누가 보아도 맹수와 토끼의 대결이었다. 싸움은 이제 종반으로 치달아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시작될 찰나에 있었다. 꽝! 그때 한발의 포성이 산을 울렸다. 동시에 난데없는 군사들이 이해 서산에서 노도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이해 서쪽 산에 잠복해 있던 이족과 백족군이었다. 이밀은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기어코 당했구나.' 이밀은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어느새 백족군이 강안 남쪽을, 이족군이 강안 북쪽을 막아 버려 당군이 역포위를 당한 꼴이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양쪽에서 몰리던 고구려군 마저도 등을 돌리고 정면으로 대적하고 나왔다. 한쪽은 바다 같은 호수, 그리고 반대쪽은 3,4천 미터나 되는 가파른 산. 퇴로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밀은 참으로 난감했다. 어쨌거나 이밀이 어느 쪽이든 집중 공격을 하며 혈로를 뚫고 나왔더라면 군사의 반은 건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밀에게도 천시가 있었던지 절대절명의 순간에 다시 한 번 잘못을 저질러 버렸다. 이밀이 헤아려 보아도 고구려군이 불과 5.6천 명인데 반해 당군은 그 열 배가 넘는 6만 명이었다. 결국 인해전술로 밀어붙인 것이다. 양군의 싸움은 치열했다. 병사들이 한데 뒤엉켜 창과 칼이 맞부딪칠 때마다 비명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그사이에도 서산 중턱에서는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목에서 피가 나도록 외치는 한 여인의 목소리가 있었다. 무메가 혼자 남아 부르짖는 소리였다. "고구려군 이겨라!" "무찔러라, 당군 " 예상을 뒤엎고 전세는 갈수록 고구려군 쪽으로 기울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리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 고지대 적응이 안 된 당군은 고구려군을 뒤쫓으며 30리가 넘는 강안을 돌았을 때 벌써 기진맥진해 있었다. 거기다가 백족과 이족군을 상대로 무거운 창과 칼을 계속 휘두르자 점차 호홉이 어지러워지고 탈진 상태에 빠져 수족이 날렵하게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그러나 태어나서 평생을 고지대에서 살아온 운남성군은 싸움이 종반에 접어들자 동분서주하면서 비틀대는 당군의 목을 치기에 바빴다. 당군이 짚단처럼 쓰러지는 광경을 보자 다급해진 이밀은 말에서 내려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때 뒤이어 뛰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을지마사였다. 을지마사는 헤엄을 치며 도망가는 이밀을 끝까지 뒤쫓아가서 대뜸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밀은 결코 살려둘 수가 없는 자였다. 저 귀주성에서 고구려 백성들을 도살하고, 나라 할머니를 죽게 한 이밀만큼은 자신이 직접 처단하고 싶었다. 을지마사에게 목을 졸린 이밀은 숨이 막히는지 "꺽꺽" 소리를 내질렀다. 을지마사는 구태여 칼에다 피를 묻힐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밀의 목을 더욱 힘껏 졸랐다. 바로 그때였다. 불시에 을지마사의 뒤에서 목을 움켜쥐는 또 다른 손이 있었다. 우악스런 힘이었다. 일시에 을지마사의 숨이 '꺽' 막혀 왔다. 을지마사가 발버둥거렸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을지마사의 눈앞이 아득해 왔다. 뒤에서 을지마사의 목을 움켜쥔 자는 이밀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호위군장. 을지마사는 마지막으로 용을 써서 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두 사람이 수면 밑으로 동시에 사라졌다. 30초, 1분, 호위군장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지 손을 거머쥔 손을 풀고 수면 위로 떠올랐다. 호위군장에 이어서 수면 위로 떠오른 을지마사는 두어 번 숨을 고른 다음 다시 한 번 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고는 물귀신처럼 호위군장 놈의 발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은 다시 물 속 깊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주강에서 멱을 감고 놀았던 을지마사와 화북의 넓은 들녘에서 살았던 호위군장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호위군장은 점차 기진맥진해 갔다. 을지마사가 이렇게 하기를 대여섯 번이나 했을까. 드디어 호위군장 놈이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고 하늘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더니 이윽고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사지가 축 늘어졌다. 을지마사는 호위군장 놈을 물 속에 처넣었다. 호위군장을 처치한 을지마사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뿔싸! 이밀이 간 곳이 없다. 다시 눈을 떠서 찬찬히 바라다보니 이해 중간쯤 해서 가물거리는 물체가 보였다. 이밀은 그사이 죽어라고 헤엄을 쳐서 달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을지마사는 결코 이밀을 놓아 보낼 수 없었다. 이밀도 을지마사가 뒤쫓는 것을 눈치 채고는 발버둥을 치며 내빼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밀의 체력에도 한계가 왔다. 이윽고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이밀 , 그대는 고구려를 아는가?" "제발 나를 살려 주시오." 그러나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목숨을 버린 수많은 고구려 유민을 생각하면 절대 그를 살려줄 수 없었다. 그는 간신 이임보를 꼬여 두 번씩이나 죄 없는 고구려 백성들을 죽이고 괴롭힌 자였다. 을지마사는 서서히 이밀에게로 다가갔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밀이 놀라 그자리에서 사지를 내저으며 버등댔다. 을지마사는 이밀을 와락 붙잡아 물 속에 처박아 버렸다. 조금 후에 이밀의 몸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이번에는 발로 힘껏 차서 물 속으로 다시 처넣어 버렸다. 이밀은 호수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는지 다시는 추한 모습을 수면 위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윽고 잔물결이 가라앉자, 호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햇빛에 반짝이며 평화스럽기만 했다. 그 위로 물새 두어 마리가 파득거리며 날았다. 후세에 중국 역사가들은 자기네들의 역사를 미화하기 위해서 당장 이밀이 당군이 전멸하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몸을 이해에 던져 자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운남성군과 당군의 서이하 전투는 일찍이 역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진기록을 남겼다. 6만 명이나 되는 당군 가운데서 단 한 사람도 살아 남은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당나라의 대시인 백낙천이 시로 읖으며 통곡했을 만큼 서이하 전투는 참혹했다. @[북국에 뜨는 별]@ 당 조정은 예기치 않았던 당군의 전멸 소식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이에 대해 언급을 하려 드는 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그사이 고구려 유민을 토벌한다고 출정해서 10만 명이라는 대군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망하게 한 천벌이 내렸던지 당나라의 비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755년) 또다시 일대 사건이 벌어져 온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드디어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양귀비의 세력을 등에 업고 세 곳의 병마절도사를 겸하고 있던 안녹산은 어느덧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쥐고 있었다. 안녹산은 범양에서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순식간에 하북 일대를 점령한 뒤 동도 낙양을 공격해서 탈취했다. 그러고 나서 스스로 대연황제의 위에 오른 뒤 당나라의 수도 장안마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당나라 황제 현종은 황급히 사천성으로 도망을 쳤지만,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은 겨우 싸움에 지친 병사 500여 명뿐이었다. 그들마저도 현종에게 대놓고 불만을 토로했다. "나라가 이꼴이 된 것은 천하의 요녀 양귀비 때문인즉, 목을 베어 죽이기 전에는 당신을 더 이상 호위하지 않겠소." 당현종은 경황중에도 억장이 무너졌다. 목숨처럼 사랑하는 양귀비가 죽는 꼴을 자기 눈으로 보아야만 하다니 ! 그러나 인간이란 죽음 앞에서는 너나없이 비정했다. 당현종도 마침내 양귀비와 그의 오라비 양국충을 군사들에게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양귀비는 비명에 갔다. 양귀비를 죽인 병사들의 기세는 더욱 살기등등해졌다. 겁에 질린 당현종은 자기의 왕위마저 아들 숙종에게 건네주고 목숨을 빌었다. 안녹산의 난을 격으면서 당나라에서 출세를 하고 있던 두 명의 고구려인의 운명도 기로에 서게 되었다. 출세를 한 쪽은 왕사례였다. 그는 이름까지도 중국식으로 바꾸고 중국을 위해 몸을 바쳐 출세를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안녹산의 난을 격으면서 두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 한 번은 그의 군대가 구곡으로 진군을 할 때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당시의 군법으로는 군대가 정해진 기일 내에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하면 책임을 물어 반드시 장수를 죽였다. 그러나 왕사례의 운은 질겼던지 마악 사형을 당하려는 순간 그의 중국인 형 명마부원수 가서한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다음은 그가 동관을 지키지 못했다 하여 또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용케 생명을 건져, 안녹산의 난이 평정되었을 때는 재상의 직위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왕사례가 얼마나 출세를 했는가를 알아 보자. 당시 당나라의 관행으로는 재상의 지위에 오른 자는 삼공이 되지 못한 법인데, 오직 왕사례만이 그때까지의 관례를 깨뜨리고 이 두 가지의 벼슬을 다 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왕사례는 죽어서도 무열의 지위에 봉해진다. 그는 조국 고구려를 버리고 중국인으로서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영화를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사례는 무장이면서도 싸움은 신통치 못했다. 장안성을 탈환할 때 약간의 공이 있었을 뿐, 여러 번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배를 당했다. 반대로 안녹산의 난 중에 처절하게 몰락한 고구려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고선지 장군은 밀운군공이라는 작위를 받고 당나라의 서울 장안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고 안녹산이 동도 낙양을 점령해서 사태가 위급해지자 황제 현종도 어쩔 수 없었던지 고선지를 불렀다. "이 난국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밖에 없소." "신이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그대에게 동토부원수(원수는 현종의 아우)를 명하니 어서 군사를 모집해서 대적토록 하시오." 고선지는 10만 명의 군사를 모집했다. 서역 정벌 때 고선지 밑에서 참전했던 애꾸눈 봉상청이 안녹산군에 고전을 하며 매우 위험한 처지에 있어서 그를 도우러 출정하게 되었다. 황제 현종은 근정루에까지 나와 고선지를 전송하며 다시 한 번 애원했다. "고 장군! 그대만을 믿소. 당나라의 사직이 오직 그대의 두 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시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고선지에게도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당나라가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호기를 타서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고선지는 그렇게 하지 않고 봉상청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섬주로 진군했다. 섬주는 평야 지대라 급조한 오합지졸을 가지고 막강한 안녹산군을 저지하기에는 턱없이 불리했다. 그래서 봉상청과 협의해서 섬서성 동쪽 끝에 있는 천험의 요새 동관까지 후퇴를 해서 안녹산군을 막기로 했던 것이다. 전쟁의 달인인 고선지의 작전은 백 번이고 옳았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섬주에는 태원창이라는 큰 창고가 있어서 그 안에는 비단, 돈, 곡식, 각종 보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긴박한 상황에서 이와 같은 물자를 수송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렇다고 두고 가자니 모조리 안녹산 반군의 차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고선지는 태원창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꺼내어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고선지와는 악연이었다고나 할까 이때도 감군은 서역 정벌 때와 같은 변영성이었다. 변영성은 그 많은 재화를 보자 그만 욕심이 생겨 눈이 뒤집혔다. "고 원수, 나는 이미 늙었소. 여생이나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황금과 돈을 좀더 주시오." 그러나 고선지의 성격은 예나 그때나 대쪽같은 데가 있었다. "변 감군, 당신의 몫은 이미 충분히 드렸소. 그러나 그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마시오." 변영성은 고선지가 황금을 달라는 대로 주지 않자 고선지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래서 고선지가 동관까지 후퇴를 하고, 태원창의 양곡을 독식했다고 모함했던 것이다. 당시의 현종은 늙었고,또 날로 위급해지는 전황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변영성이 보낸 편지를 읽어 가던 현종의 왕방울 같은 눈이 더욱 커졌다. 금세 얼굴색이 변하면서 벌컥 역정을 냈다. "뭐 고선지가 싸울 생각은 않고 태원창의 군량을 모조리 독식했다구?" 은쟁반에 편지를 받쳐들고 온 환관 오참은 고구려 포로 출신이어서 마음속으로 고선지를 동정하고 있었다. "주상 전하, 고정하시고 전후 사정을 알아보심이 어떠하실는 지요." 그러나 현종은 끝내 노기를 거두지 않았다. 당나라 조정에서 권력을 주무르는 자들은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구려 출신 고선지가 자기네들을 제치고 토벌군 대장으로 임명된 것에 시샘하고 있던 터라 고선지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당연히 벌떼처럼 들고나서 고선지를 죽일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전쟁을 잘하는 고구려인 들을 사지로 보내 실컷 부려먹고는 공을 세워 출세를 하면 생트집을 잡아 매장시켜 버리는 것이 중국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간교한 수법이었다. "고선지를 마땅히 죽여 군법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고선지를 탄핵하는 소리가 꼬리를 이었다. "천만 번 지당한 줄로 아뢰오." 중신들의 부아를 돋우는 말에 분기가 더욱 치밀어 오른 현종은 사실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고선지와 봉상청을 죽이도록 명령을 내렸다. 현종의 명을 받은 한떼의 군마가 동관에 도착했다. 군사들은 먼저 봉상청을 포박했다. 뒤이어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는 고선지를 붙들어 묶었다. 불시에 일을 당한 봉상청과 고선지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뒤이어 변영성이 현종의 칙서를 읽어 내려가자 눈앞이 아뜩해졌다. 고선지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다시 수습하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마침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군사들이 눈앞에 보였다. 고선지는 군사들을 향해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내가 그대들을 모집해서 싸운 것은 반군을 물리쳐 난을 평정하기 위함이었노라. 하지만 반군의 기세가 사나워 마땅히 반군을 물리칠 수 있는 동관까지 후퇴해 온 것이다." 군사들은 동정어린 눈길로 고선지의 처연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선지의 마지막 말이 이어졌다. "또 그대들은 내가 사사로이 태원창의 양곡을 챙기는 것을 보았는가? 이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억울합니다." 10만의 병사들이 고선지의 억울함을 원통해 하며 노호했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군사들의 외침소리가 자지러들 즈음, 고선지는 이미 목이 떨어져 나간 봉상청의 시신에 눈길을 주었다. 가슴 한구석을 도려내는 듯한 통한에 그는 몸을 떨었다. "봉상청 공은 내가 발탁했었고, 나 대신 절도사로 있었는데 오늘 공과 함께 죽는 것이 어찌 운명이 아니리오." 이것이 고선지가 마지막으로 뱉어낸 탄식의 소리였다. 이어서 장안에서 온 금위군장이 칼을 내려치고 피가 튀었다. 때는 755년 12월. 서역으로부터 겨울 바람이 몰아치고, 눈발이 고선지 장군의 주검 위에 쌓였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그의 무공에 비하면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고선지 그는 과연 누구였던가? 서역을 정벌한 불세출의 명장? 아니면 중국 사람들에 의해 개죽음을 당한 가련한 고구려인 장수? 만약 그가 최후에 반란이라도 일으켰고 싸웠더라면, 당시의 어지러운 중국 천하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죽어 버린 고구려가 중국 땅덩이를 차지하고 새롭게 되살아났을 것이다 설혹 실패해서 죽었다 하더라도 그는 민족의 큰 영웅으로 겨레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 남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서역을 정벌한 무장의 명예는 간데 없고 비천한 개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선혈이 낭자한 땅 위에 새하얀 눈이 끝없이 내렸다. 그러나 당나라 황제의 명에 의해 고선지의 시체는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당군이 동판을 향해 총퇴각을 하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초라한 행색의 사나이 한 명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접근해 왔다. 사내는 준비해 가지고 온 거적에 고선지의 시신을 둘둘 말았다. 그러고는 거기서 한참 떨어진 산비탈로 짊어지고 갔다. 사내는 언 땅을 파고 고선지의 시신을 묻은 후 그 자리에 꿇어앉아 오열을 했다 '고선지 형님, 우리는 고구려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이라도 조국으로 돌아가 편하게 쉬십시오.' 을지마사의 비통한 심정은 아랑곳없이 무심한 눈발은 하염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을지마사가 고선지의 죽음의 현장을 지키게 되었을까. 천하 대란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대리에도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을지마사의 눈빛이 무섭게 타올랐다. 을지마사는 뜨거운 피가 용솟음쳐 도저히 그대로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그 길로 나데를 찾아갔다. "나데님 , 이제야 기다리던 그때가 이르렀습니다." 나데도 을지마사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중국에서 큰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저는 고구려로 가겠습니다." "고구려로?" "예, 이곳은 고구려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고구려를 되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땅으로 가야만 합니다." "고구려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나 하는가?" 나데도 주강 남쪽 마을에서 태어나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말로만 듣던 고구려가 정작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예,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1만여 리,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다 평로절도부, 그리고 그 아랫쪽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다스리고 있다고 합니다. 평로절도부만 무너뜨리면 옛 고구려를 고스란히 되찾을 수가 있습니다." 을지마사는 언젠가 장안성 객사에서 만났던 이정기라는 젊은이를 떠올렸던 것이다. 바로 그가 평로절도부 비장으로 있다고 했다. 이정기는 비록 왕사례나 고선지보다 나이는 예닐곱 살이 어렸지만 그의 피 속에는 왕사례나 고선지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조국애와 정열이 끓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그날 이정기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은지라 그 후 어디를 가나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잠자코 을지마사의 말을 듣고 있던 나데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곳 대리의 고구려 사람들은 어떡하나?" 염려스러워 하는 소리였다. 그때쯤 나데는 믿음직한 을지마사와 대소사를 의논해서 결정하고 있었다. 나데의 마음속에는 이미 을지마사를 후계자로 점찍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당나라 전체가 풍전등화여서 이곳을 다시 침략하지는 못합니다. 그 점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렇더라도 혹시나,,,,,,." "만약에 무슨 변고가 있으면 가한서한, 연개수근, 귀실우오 등을 믿을 만하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무엇보다 조국 고구려를 다시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서 살 수가 있습니다." 나데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아내 무메를 설득시킬 차례였다. 무메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위구르 여인으로서는 드물게 현명한 여자였다. "내일이라도 떠나세요. 집 걱정일랑 일체 하지 마세요. 당신이 평범한 지아비였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래도 마을이 걱정이 돼." "그 점도 염려 놓으세요. 제가 나데님 그리고 여러 장수들을 도우며 일을 잘 추려 나갈게요 " 을지마사와 결론을 할 때 고구려 여인이 되기로 결심을 한 무메는 그때쯤 고구려 말을 제법 능숙하게 할 줄 알았다. 을지마사는 무메가 더없이 고마웠다. 그래서 두 팔에 힘을 주어 무메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어 휴! 큰일나요." 무메가 펄쩍 뛰었다. "왜?" 무메가 방긋이 웃으며 볼록 나온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다음날 이른 새벽 을지마사는 대리를 출발했다. 그리고 밤낮으로 말을 달려 요동의 영주에 있다는 평로절도부를 찾아나섰다. 한 달이 지나 장안성에 도착한 을지마사는 그래도 함께 고생하던 옛 정이 생각나서 고선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고선지는 병사들을 모집해서 섬주로 떠난 뒤였다. 을지마사는 섬주를 향해 또다시 말을 달렸다. 을지마사가 고선지의 병영에 도착했을 때쯤, 고선지는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세상에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을지마사와 고선지의 첫 만남이 기구했던 만큼 을지마사와 고선지의 마지막 만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고선지의 시신을 묻어준 다음, 을지마사는 영주를 향해 떠났다. 섬주의 동관에서 요동의 영주는 1만 리가 다 되는 먼 길이었다. 가도 가도 끝간 데 없이 뻗어 있는 것은 황하 일대의 황톳길. 을지마사는 매서운 북풍을 맞받으며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을지마사가 이렇게 보름쯤 갔을 때 시야에 강이 나타났다. 낙양성부근의 황하였다. 을지마사의 머리 속에 불현듯 보고 싶은 얼굴이 떠올랐다. 낙양성을 탈출하다가 비명에 간 여옥. 을지마사는 유가촌으로 찾아들었다. 당시의 촌장이 그때까지도 살아 있어서 을지마사를 기억해 내고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을지마사의 두 손을 꼬옥 잡으며 반가워했다. "할아버지,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이게 뉘시오? 전날에 왔던 고구려 젊은이가 아니오?" 뒤이어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치 오랜만에 가족을 상봉하듯이 반가워했다. 수인사가 끝난 후 을지마사는 북쪽 언덕에다가 장사지낸 여옥의 무덤을 찾았다. 그간 동네 사람들이 돌본 흔적은 있었지만 그래도 주인 없는 무덤이어서 잡풀이 많이 자라 있었다. 을지마사는 눈을 쓸고 벌초를 했다. 그리고 무덤 앞에 꿇어앉았다. 뉘엿뉘엿 지는 햇살이 붉게 노을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대가 유명을 달리한 지도 5년의 세월이 지났구려. 그대는 먼저 갔지만, 또 하나의 여옥이는 지금 저 남쪽 대리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소.' '쏴' 하고 산바람이 골짜기를 타고 내려왔다. 을지마사의 울먹이는 소리가 끊어졌다가 다시 들려 왔다. '나는 지금 조국 고구려를 되찾으려고 가고 있소. 조국을 찾기 전에는 맹세코 눈을 감지 않겠소. 아!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영광의 날 당신의 혼백도 데리고 가리다. 그때까지 혼자서 외롭더라도 철 따라 돋아나는 들풀과 산새들의 지저귐 소리를 벗삼으며 훗날을 기다려 주시오.' 을지마사는 술 한잔을 따라 무덤 주위에 부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 엎드렸다. 한식경이 지나도록 을지마사는 다시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사이 밤이 내리고 있었다. 걱정이 되어 올라온 마을 사람들이 재촉을 해서야 을지마사가 몸을 일으켰다. '여옥이, 다시 찾아오겠소. 정녕 그대의 혼백이 있거든 나를 도와 주시오.' 다음날 을지마사는 유가촌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을지마사가 요동땅 영주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정월도 다 지날 무렵이었다. 드넓은 요동땅에도 추위가 한풀 꺾이고, 대지의 숨결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얼음장 밑으로 졸졸 흐르는 시냇가 언덕을 따라 늘어진 버드나무에 어느덧 연둣빛 기운이 오르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요동벌 사방을 둘러보며 몇 번이고 가슴을 한껏 부풀려 심호흡을 했다. '아! 이곳이 나의 조국 고구려의 옛 땅이라니.' 낯선 산하 주강 남쪽에서 태어나서 자란 을지마사였다. 나라 할머니가 들려주던 고구려 땅은 초행인데도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한 개까지도 정감이 갔다.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의 모습도, 그리고 들려 오는 말소리도 자기가 자란 주강 남쪽 마을과 어쩌면 그리도 똑같을까. 을지마사는 신기할 지경이었다. 여기가 바로 나의 조국이구나! 비로소 을지마사는 조국의 냄새가, 느낌이 가슴에 벅차도록 와 닿았다. '그나저나 이정기가 나를 몰라보면 어떡하지 ,,,,,,.' 영주 시내에 들어선 을지마사는 은근히 걱정을 하면서 길을 물어 평로병마절도부로 향했다. 평로병마절도부는 요동과 요서 일대를 다스리는 곳이라 그 규모가 무척 커서 첫눈에 을지마사를 위압하는 듯했다. 병영과 훈련장이 10리에 걸쳐 줄줄이 뻗어있었다. '그나저나 이정기가 일개 비장이라는데 쉽게 찾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을지마사는 다시 한 번 조바심이 났다. 을지마사는 병영 안으로 들어가 초병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정기라는 비장이 이곳에 근무하고 있습니까?"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초병은 먼길을 오느라 행색이 말이 아닌 을지마사의 위아래를 ㅎ었다. "그렇소만, 당신은 어디서 온 뉘시오?" "아, 나는 농우도에서 온 을지마사라고 합니다." 초병이 대리라고 하면 모를 것 같아서 얼른 농우로 둘러댔다. "그래요? 이정기 부장님은 이곳에서 근무를 하십니다만, 지금은 출전중이십니다." 을지마사는 이정기가 부재중이라는 소리를 듣자 맥이 탁 풀렸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이정기가 그사이 비장에서 부장으로 승진을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정기는 을지마사보다 두어 살이 많으니까 지금쯤 28, 9세. 그 나이에 연줄없이 부장이 되었다면 빠른 승진을 한 셈이었다. 을지마사가 머뭇거리고 있자 초병이 설명을 덧붙였다. "북쪽에서 침략해 온 해군과 싸우러 나갔다구요." "그럼, 언제쯤 돌아옵니까?" 초병이 딱하다는 듯이 을지마사를 바라다보았다. "그런 건 작전상 비밀이라서 누구든지 알 수가 없소." 사실 을지마사는 조급한 마음이 앞서 부질없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막막해진 을지마사가 어정정하니 서 있는데 초병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을지마사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져 왔다. "을지 무어라고 했던가 아무튼 형씨, 방금 농우에서 왔다고 그랬소?" "그렇소만," "그곳 고구려 백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요? 이곳에서 듣기로는 불모지 사막이라서 살기가 어렵다고 하던데 ." 초병은 말을 마치고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병도 고구려인이었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농우절도부의 유격장군으로 고선지 장군과 함께 서역을 정벌했던 자신의 신분을 함부로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농우도의 유민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살고 있소. 그런데,, ,,,,." 내친김에 을지마사도 궁금한 것을 초병에게 물었다. "이곳 영주의 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지냅니까?" "나라가 망하고 나서 모두들 어려운 세상을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더욱이나 영주 땅에 남은 사람들은 태반이 중국의 오지로 끌고 갈 수 없었던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 초병은 을지마사가 같은 고구려 사람이라는 것을 의식했던지 스스럼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 ...모두들 열심히 노력해서 넉넉합니다. 거기다가 이정기 부장님이 백성들 뒤를 돌봐 주는 덕분에 마음 든든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정기라는 사람은 과연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지녔듯이 동포들을 지극히 아껴 주는 그런 사람이었단 말인가. 을지마사의 가슴속에서 새로운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이정기 부장이 동포들을 그처럼 아껴 줍니까?" 을지마사는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초병은 을지마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이정기 부장을 찾아왔다고 하면서도 그에 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투의 시선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왔습니다. 백성들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그분은 몸을 사리지 않고 도와주면서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분에 대한 희망이 없었더라면 영주의 고구려 백성들은 지금쯤 뿔뿔이 흩어져 버렸을 것이오." 고구려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병마절도부 내의 군인들은 물론 중국인들마저도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한다고 했다. 당시의 이정기는 군대의 중급장교인 일개 부장의 신분이었다. 특히 고구려의 옛 영토였던 요동 지방에서는 반란을 일으킬까 봐 고구려인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높은 관직에 올려 주지 않았다. 이정기는 비록 중급장교에 불과했지만 그 뒤의 행적이 뛰어나서 극소수의 인걸들만 오를 수 있는 사서의 열전에 이름이 올라 후세에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이정기는 얼굴 생김이 근엄하고 허우대도 커서 키가 2미터가 넘는 거한이었으며 힘 또한 장사였다. 게다가 그의 평소 행동이 정의롭고 위엄이 있어 타고난 무장이요 통치자의 기개가 있었다. 그의 사람 됨됨이를 짐작케 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훗날 안녹산이 죽고, 사조명이 그의 잔당들을 이끌고 화북 일대를 점거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안녹산에게 시달림을 받았던 전국의 제후들이 이번에는 사조명을 토벌하기 위해 대명에 모였다. 제후 가운데 이회흘이란 자는 중국 천하에서 제일로 쳐주는 장사였는데 자기 힘만 믿은 나머지 안하무인이었다. 비위가 거슬리면 제후들 얼굴에다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해대기가 일쑤여서 모두들 회흘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벌벌 떨었다. 하루는 매사에 과묵한 이정기도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던지 회흘 앞으로 걸어가 마주 보고 섰다. "회흘 장군, 나하고 한번 겨루어 보겠소?" 붉은 맷돼지같이 생긴 회흘의 얼굴이 금방 분기가 올라 벌개졌다. 회흘은 주먹을 불끈 쥐고 씩씩거리며 감히 자기에게 대드는 이정기를 금방 쥐어박을 듯이 노려보았다. "고구려 동이놈아, 내가 누군지나 알고 감히 입을 놀리느냐?" 이정기가 회흘의 말을 냉정하게 잘랐다. "잠깐! 시합을 하기 전에 당신과 한 가지 약속을 합시다." 회흘은 성난 멧돼지처럼 이를 부드득 갈았다. "오냐, 오늘을 네 제삿날로 만들어 주마." 이정기는 회흘의 말을 무시하고 제후들을 바라다보았다. 20여명의 제후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이 생각해도 결과는 불을 보듯 확실했다. 신출내기 이정기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천하장사 회흘에게 무모하게 달려든 꼴이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정기의 갈비뼈가 부러져 나가고 온몸이 피범벅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정기는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침착했다. "여러분들, 이제부터 나와 회흘이 한판을 벌이겠소. 지는 사람은 등짝을 맞기로 합시다." "좋소, 좋고말고." 눈치를 살피던 제후들은 어차피 벌어진 판이다 생각했던지 박수를 치고 요란법석을 떨었다. 혹시 이정기가 이긴다면 그간 회흘에게 당한 모욕을 대신 앙갚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두 명의 천하장사가 맨 주먹으로 맞붙었다. 회흘이 씩씩거리며 선제공격을 해왔다. 이정기가 가볍게 피하며 오른발로 회흘의 사타구니를 내질렀다. 회흘도 훌쩍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정기의 역습은 날카롭게 허를 찔렀다. 연이은 동작으로 주먹을 들어 회흘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어 쿠쿠." 회흘이 땅바닥으로 벌렁 나뒹굴며 입에서 피를 토해 냈다. 예상을 뒤엎고 이정기가 이긴 것이다. 회흘은 한식경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이정기는 매사에 엄한 데가 있었다. 약속대로 회흘을 일으켜 세우고 20여 명의 제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주먹으로 그의 등짝을 가격했다. 이정기가 회흘의 등짝을 칠 때 회홀은 어찌나 아픈지 바지에다 오줌을 쌌고, 이를 지켜본 제후들은 통쾌해서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때부터 회흘은 이정기를 슬금슬금 피해 다녔고, 중국인 제후들은 고구려인 이정기를 자기네들의 지도자로 떠받들었다. 을지마사는 이정기가 귀대할 때까지 영주에서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래서 초병이 안내해 준 객사에서 여장을 풀었다. 객사의 주인은 고구려인 여자였다. 70이 다 된 할머니로 13살 난 나나라는 수양딸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나나는 막 피어나는 모란꽃처럼 아름다운 처녀였다. 10여 년 전에 그녀 아버지는 큰 누님이 중국으로 끌려간 후 노예로 팔려서 무진 고생을 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 그래서 누님을 구출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부랴부랴 딸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중국 어디론가 떠났는데 그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 나나는 을지마사가 중국 변방의 고구려 마을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는 부모가 그리운지 이것저것 관심있게 물었다. 나나는 외모도 아름다웠지만, 심성도 곱고 똑똑한 처녀였다. 하루는 을지마사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나나가 넌지시 말을 건네 왔다. "을지마사님, 옛 고구려를 찾아가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을지마사에게는 천만 뜻밖의 소리였다. "고구려를 찾아가 보다니. 어디에 고구려가 남아 있단 말이오?" "예, 이곳에서 가까이 있어요. 을지마사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안내해 드릴 수도 있다구요." 영주는 옛 고구려의 요동성, 을지마사는 벌떡 일어나 나나의 뒤를 따랐다. 영주 교외를 빠져나가자 야트막한 언덕을 의지하고 옛 성터가 나타났다. 요동성은 고구려의 서쪽을 방비하던 가장 큰 성이었던 만큼, 규모도 아주 컸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하고 중국 사람들이 고구려의 것이라고 해서 버리고 새 성을 쌓은 바람에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지나간 80년의 세월이 말을 해주듯 성벽 일부는 허물어지고 이곳 저곳에 청태가 끼어 있었다. 성에 오른 을지마사는 성벽을 어루만지며 감회에 젖었다. '이곳이 바로 중국 사람들을 상대로 피를 흘리며 싸워서 조국을 지킨 장소라니.' 노호하며 중국 군사들을 무찌르는 고구려군의 함성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때 나나의 목소리가 을지마사의 상념을 깼다. "을지마사님 , 이 성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있지요." "그래 ?" 을지마사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나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나라 태종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12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답니다. 당군은 건안성, 개모성을 차례로 점령한 다음 결전장으로 삼은 것이 바로 이 요동성이었지요. 당시 이 성을 지키고 있던 고구려군은 겨우 1만 명. 그 50배도 넘는 당나라의 군사를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어요. 성의 함락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웠습니다." 나나는 지난 옛 일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고구려의 보장왕은 요동성이 위태롭게 되자 신성과 국내성에서 4만의 군사를 지원했어요. 그래도 10배가 넘는 당군을 상대하기는 어림없었지요. 적장은 당나라에서 제일로 치는 이세적 장군. 그러나 사기가 충천한 요동성군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들었어요.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데야 당군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나는 손을 들어 언덕 아래쪽의 들녘을 가리켰다. 을지마사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을 좇았다. 나나의 열기 띤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구려군에게 견디지 못한 당군은 요동성의 포위를 풀고 바로 저곳으로 도망을 쳤지요. 고구려군은 즉시 뒤쫓아가서 몇만 명이나 되는 당군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목을 베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당태종은 군사를 몰고 급히 요동성으로 달려왔습니다. 꼴을 보니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50만 명이나 되는 당군이 조그만 요동성에서 불과 5만의 고구려군에게 참패를 당했으니 말입니다.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겁을 먹은 당군이 더이상 싸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음흥하고 흉계가 많은 당태종은 먼저 난하의 다리를 끊었습니다. 도망갈 수 있는 통로를 없애 당군으로 하여금 비장한 각오로 싸우게 할 작정이었죠. 후퇴는 생각도 말고 죽기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지?" 을지마사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빠져서 나나를 재촉했다. "당태종은 먼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 장군을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죽였습니다. 그런 다음 요동성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지요. 그러나 당태종의 백만 대군이 연일 공격을 퍼부어도 고구려 군사들이 어찌나 잘 싸우는지 요동성은 까딱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태종은 고구려군과 정정당당하게 싸우면 승산이 없을 것 같으니까 꾀를 냈습니다. 많은 병사들을 동원해서 날마다 흙을 져다가 성 옆에 토산을 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싸움에 지친병사들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자 자신이 스스로 말 위에다가 흙을 져 나르기까지 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어느덧 흙더미는 성 높이로 쌓여졌는데 성안에 있는 고구려군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번 성문을 열고 당군과 싸워 보았지만, 당태종까지 합세한 당군의 숫자가 너무나 많아서 몇만 명을 죽여 보았자 표도 나지 않았습니다." "잠깐?" 을지마사가 문득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나의 말을 도중에서 끊었다. "나나는 어떻게 옛 일을 그처럼 소상하게 알고 있지?" 나나가 수줍은 듯 살포시 웃었다. "그것은,,,,,,." "그것은?" "예, 이정기 부장이 기회 있을 때마다 고구려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쳤지요. 먼 훗날 고구려 민족이 다시 망하는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찬란했던 역사도 알아야 하지만, 불행했던 역사는 더더욱 잊지 말아야 한다면서요." 을지마사가 보기에 이정기는 정말로 대단한 젊은이였다. 그래서 자신이 영주까지 이정기를 찾아온 것이 참으로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을지마사의 얼굴에 떠오른 감동을 알아챈 나나는 이정기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주었다. "들리는 말로는 이정기 부장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당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준다고 죄었지만 싫다고 하고, 고구려 망국민들을 보살폈다고 해요."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법이다. 을지마사는 그제서야 분명하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주강 남쪽의 고구려 마을이 자소. 자모,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고구려 사람으로 살고 있듯이, 영주도 이정기와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민족혼을 불어넣어 주었던 까닭에 고구려인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나나 아가씨, 이야기 도중에 미안한데 하던 이야기를 마저 들려줄 수 있을까?" 나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토산이 완성되자 드디어 당태종은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 왔습니다. 이 성 아래가 당군으로 꽉 들어찬 셈이지요. 고구려군도 목숨을 내걸고 주야로 싸웠습니다. 그들은 죽을지언정 싸움에 져서 중국 사람의 노예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도 당군을 향해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퍼붓고 그래도 안 되면 성을 타 넘어오는 당군을 물어뜯고 함께 붙들고 성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당군 백만 명은 밤낮으로 열이틀을 싸웠지만 도저히 요동성을 점령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고립무원한 고구려군에게도 인간으로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당군을 무수히 죽였지만, 고구려군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이윽고 고구려군의 최후가 온 것입니다." 이야기를 하는 나나의 눈에 어느덧 눈물이 고였다. "그래서 요동성은 어찌 되었나?" "최후가 가까워 오자 고구려 사람들은 건국 시조인 주몽의 사당으로 달려갔습니다. 요동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옛날 어느땐가 하느님이 내려 주었다는 창과 갑옷이 있었지요. 고구려 사람들은 여자 한 명을 곱게 꾸며서 앉혀 놓고 그 주몽님께 도와 달라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 동안에도 당군의 포차에서 쏘아진 큰 돌들이 날아와 떨어져 성안 이곳 저곳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뒤이어 당군이 함성을 지르며 성을 타넘어 왔어요. 고구려군은 성이 무너진 곳에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새끼줄을 얽어서 성안으로 들어오려는 당군을 악착같이 막아냈습니다. 피차간에 마지막 백병전이 붙은 거지요, 시체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시체를 딛고 싸우다가 죽으면 그 다음 사람이 방금 전에 죽은 사람을 딛고 싸웠습니다. 고구려군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 전멸을 하거나 당군이 퇴각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는 피할 수가 없는 순간에 도달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난데없이 불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무너진 성벽을 막았던 나무와 새끼줄이 모두 타버렸습니다. 드디어 성벽이 뚫린 사이로 당군이 물밀듯이 들어와 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결국 요동성은 함락되었지만, 요동성의 처절했던 민족혼은 살아 남아서 얼마 후 안시성에서 고구려군이 당군을 전멸시켜 철저하게 복수를 했던 것입니다. 나나의 설명을 듣고 난 을지마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요동성에서 혈전을 했던 조상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을지마사는 일어서서 옷깃을 여몄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요동성에서 끝까지 버티다 전사한 선열들에게 큰절을 했다. 이미 고혼이 된 선열들이 을지마사의 이처럼 숙연한 마음을 알기나 할는지 이끼 낀 성벽 위로 무심한 흰구름만 흘러가고 있었다. 을지마사가 영주에 와서 묵은 지 보름째 되던 어느 날 밤, 마을 개들이 요란하게 짖더니 방문 앞에서 인기척이 났다. 뒤이어 나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을지마사님 기다리던 분이 오셨어요." 나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한 한 사람이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서고 있었다. "을지 형, 반갑소." 첫눈에 보아도 우렁우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정기였다. 을지마사도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을지마사는 그 동안의 조바심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랜만에 지기를 만난 것 같은 정감이 온몸을 쓸고 내려갔다. "정기 형, 오랜만이오, 형을 만나고 싶어서 예까지 찾아왔소." "잘 왔소. 을지 형을 보니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오. 나를 기다리는 손님이 을지 형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고 있었소." 이정기는 장부답게 성격이 호방했다. "어떻게 이 나란 아우인줄 아셨습니까?" "이 천지에서 나를 반겨줄 사람이 을지 형 말고 또 누가 있겠소? 서역 정벌 때 을지 형이 세운 무공을 소상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지요. 그나저나 이 몸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퍽 무료 했겠구려?" "아. 아니올시다. 그간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잘 받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선생님이란 말에 이정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생님이라니오?" 나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을지마사를 향해 눈을 흘겼다. 이정기는 껄껄 소리를 내어 웃으며 농을 걸었다. "을지 형은 아직 미혼이던가요?" 을지마사가 펄쩍 뛰었다. "아니오. 슬하에 자식을 두고 있습니다." 이정기가 멋쩍었는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나는 참 총명한 처녀요. 나중에 큰일을 해낼 것이오. 좋은 총각이 있거든 중매나 잘 서주시오." 나나가 언제 준비를 했는지 주안상을 들여 왔다. 두 호걸은 술상을 마주 대하고 서로 잔을 권하면서 지난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내용은 장안에서 고선지. 왕사례와 만난 이후 두 사람이 걸어왔던 그간의 행적이었다. 을지마사는 그 이후 고선지를 따라 서역을 원정했던 일, 그리고 주강 남쪽의 고구려 유민들이 대리까지 쫓겨가 살다가 치른 서이하 전투 이야기를 했다. 이정기 의 얼굴에도 감동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야기 도중에 이정기는 몇 번씩이나 감탄사를 토해 냈다. 이야기는 이윽고 장래 문제로 넘어 갔다. 두 사람의 말소리가 더욱 신중해졌다. 을지마사가 영주까지 찾아온 뜻을 밝히자 이정기는 대뜸 결정을 내렸다. "을지 형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내일 당장 병마절도부로 갑시다." 을지마사가 미처 이정기의 심중을 알아차리지 못하자 이정기가 보충 설명을 했다. "호랑이를 잡으려고 왔으면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소?" 이정기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너무도 갑작스런 제안이라서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눈치를 챈 이정기가 다시 설명을 했다. "아직 그때가 이르지 못했소. 참고 조금만 기다리면 을지 형이나 내가 오매불망으로 기다리는 대사를 이를 것이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정기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을지 형은 본색을 숨겨야만 하오. 내가 국내성 근처에서 온 친구라고 소개하겠소. 그리고 절도부에는 유협술이라고 하는 고구려인 늙은이 집사가 있소. 이자를 특별히 조심하시오. 많은 고구려 젊은이들이 그자의 밀고로 죽임을 당했소." 이때 밖에서 갑자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문득 숨을 죽였다. 그래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 왔다. "누구냐?" 이정기가 지르는 고함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밖은 캄캄했다. 사락사락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을지마사는 평로절도부의 비장이 되었다. 을지마사가 비장으로 특채될 수 있었던 데는, 시험관 앞에서 뛰어난 무술 솜씨를 보인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정기와는 고종사촌간이 되는 병마절도부 종사관 후희일이 힘을 써준 덕분이기도 했다. 후희일은 이정기 고모의 아들로 중국인이었다. 당시 평로병마절도사는 왕현지. 당나라에서는 고구려의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중국인들을 대량으로 이주시켜 고급관리로 임명했다. 그들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고구려의 백성들과 졸병들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어찌나 혹독하고 잔인하던지 고구려 사람들은 감히 저항할 수도 없었다. 특히 절도사 왕현지라는 자는 몸집이 비대하고 배가 툭 튀어 나와서 자연히 걸음걸이가 뒤뚱거렸지만, 생김새와는 달리 음흥하고 꾀가 많았다. 일신의 영화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유협술 같은 고구려인들을 교묘히 이용해서 고구려인 사회의 정보를 입수하고, 고구려인들이 단합하지 못하도록 이간시키고 있었다. 이정기가 고구려 병사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포부를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는 것은 자칫 일이 성사도 되기 전에 발각되어 대사를 그르칠까 염려해서였다. 을지마사가 비장이 되던 날, 누가 볼세라 몰래 왕현지의 침소에 찾아든 사람이 있었다. 뱀눈에 염소 수염을 한 바짝 마른 늙은이 유협술이었다. 유협술이라는 자는 본명이 오사오치였다. 그자는 이름마저도 유협술이라고 중국식으로 바꾸고 중국인 옷차림으로 대로를 활보했다. 길거리에서 고구려 사람들을 만나면 저 자신도 고구려 사람이면서 으레 욕지거리를 뱉고 지나갔다. "못된 고구려 종자들." 재수가 없다는 듯이 가래침을 탁 뱉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한 가지 특별난 재주는 있어서 돈으로 매수한 병사들 몇 명을 수하에 두고 혹시나 반란을 음모하고 있는 자가 있는가 냄새를 맡는 데는 귀신이었다. 그런 유협술이 밤중에 왕현지를 찾아왔으니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대감,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면 어떡합니까? 내버려두면 주인을 물지요." 평소에 반심을 품고 있는 이정기의 패거리를 왜 끌어들이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왕현지는 큰 멧돼지 같은 몸에 어울리지 않게 끼들끼들 웃었다. "제 놈들이 뛰면 얼마나 뛰겠소. 뒤주 안에 갇힌 쥐새끼 신세-." "쥐도 궁하면 사람을 문다는데,,,,,,." "낄낄, 유 집사는 장계취계라는 옛말도 잊었소?" "그래도 곯아 터지기 전에 아예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시지요." 이정기를 당장에 죽이라는 성화였다. 왕현지와 유협술은 이정기의 거동이 수상하다는 것을 벌써 눈치 채고 있었다. 이정기가 틈만 나면 고구려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것을 의혹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 관리들이 이정기에 대해 경계를 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정작 본인만 모르고 있었지 평로병마절도부 관내의 중국인 사이에는 발설하지 않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음홍한 술책으로는 왕현지가 유협술보다 한 수 위였다. "유 집사, 사실은 안녹산의 장수 하윤객과 이회선의 위험만 없었으면 요절을 내도 벌써 냈을 것이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고 하북 지방이 일시에 안녹산의 수중으로 떨어지자, 하북 위쪽에 위치해 있는 평로절도부는 장안과 통로가 끊겨 한 점 섬처럼 떨어져 나갔다. 반대로 하북의 안녹산군도 평로병마절도부가 위쪽에 있는 한 협공을 당하고 있는 형세라 기회 있을 때마다 쳐 없애려고 기를 쓰고 공격해 왔다. 왕현지는 그나마도 자기가 평로절도사로 지금까지 견디어온 것은 걸출한 무예와 전략을 겸비한 이정기의 덕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안녹산군은 혼자의 힘으로 평로절도부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니까 북쪽에서 웅거하고 있던 해를 꼬드겨 침략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평로병마절도부는 양쪽에서 적을 맞아 고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왕현지는 이정기를 죽여야 한다는 결심을 벌써 굳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살살 구슬리며 부려먹는 차원 높은 계교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뱀눈의 유협술이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그자는 고구려 사람 과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진 듯이 이번에는 을지마사를 물고 늘어졌다. "이번에 비장으로 들어온 을지마사는 아무래도 본색을 숨기는 것 같습니다." 냄새를 맡는 데는 왕현지와 유협술이 막상막하였다. "내 벌써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농우가 아니면 대리에서 왔을 것이다." 이번에는 오히려 유협술이 놀라며 염소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장백 산맥 속에서 화전이나 일구고 살던 놈이라면 무예솜씨가 그처럼 뛰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자도 한꺼번에 조치를 하셔야 합니다." "아무렴 안녹산의 난만 가라앉는다 싶으면 그때 가서 한 줄에 엮어 버릴 것이다. 그때까지만 기다리자."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오래지 않아 떼죽음을 당할 판이었다. 그러나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자신들의 위태로운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름대로 궁리를 했다. 그래서 출전할 때마다 이정기는 을지마사에게 주의를 주듯 한마디를 했다. "을지 형, 지지도 이기지도 마시오." 안녹산군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당나라가 강성해지니까 안 되고, 지면 그나마 자신들의 지반인 평로병마절도부가 아주 망해버릴 염려가 있으니까 또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양군의 싸움은 항상 미묘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초반에 천하맹장인 이정기와 을지마사의 활약으로 대세를 잡아 나가다 어느덧 대세가 이쪽 편으로 기울어졌다 싶으면 뒤로 물러서서 안녹산군이 대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래서 싸움은 언제나 일진일퇴였다. 왕현지도 이 사실을 벌써 눈치 채고 있었지만 그는 내일 일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가뜩이나 어려운 입장이어서 파국은 막아야겠다는 영리한 계산을 하며 모르는 척 눈감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터를 넘나들면 항상 생명의 위험이 따랐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해 가을걷이도 어지간히 끝나갈 무렵 안녹산군의 부추김을 받은 해군이 갑자기 영주 변경을 침입해 왔다. 평로절도부에서는 당연히 이정기와 을지마사의 출전을 명령했다. 절도사 왕현지로 봐서는 어차피 이 두 사람은 소모품이니까 싸움에 이겨도 좋고 죽는다 해도 섭섭할 것이 없었다. 이번에도 왕현지는 자기의 심복 도위 왕길도를 이정기의 감시역으로 딸려 보냈다. 왕길도는 전쟁터에서 싸움을 할 생각은 않고 기병 120명을 거느리고 제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운수 사납게도 해의 병사 다섯 명과 맞부딪쳤다. 해 병사 다섯 명은 활을 쏘아 왕길도에게 상처를 입히고는 왕길도를 보호하려고 에워싼 120명의 평로군 병사들을 모조리 죽였다. 왕길도는 혼비백산해 혼자서 본진으로 도망쳐 왔다. "이정기 장군님 , 해의 병사들은 독수리를 잡는 명사수들임에 분명합니다." 이정기는 왕길도의 꼬락서니를 보자 기가 막혔지만 눌러 참았다. "그래 , 내가 가보겠다." 이정기는 그날 오후 2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마침 그때까지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 이정기는 다섯 명의 해 병사를 급히 뒤쫓으며 기병들에게 외쳤다. "좌우 날개형으로 진을 벌려라." 다섯 명의 해 병사를 포위하면서 화살을 쏘아 4명을 죽이고 한 명을 붙잡았는데 과연 그들은 하늘 높이 나르는 독수리를 활로 쏘아 잡는 노련한 사냥꾼들이었다. 그런데 절박한 상황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이정기군이 생포한 해 병사를 포박하고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바로 가까운 산기슭에 해의 기병 5천 명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지 않는가. 이 광경을 목격한 군사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우왕좌왕 달아나려고 했다. 그때 이정기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들의 본진은 이곳으로부터 수십 리나 떨어져 있다. 겨우 200명의 우리측 군사가 도망을 치면 해 군사들은 즉시 우리를 추격할 것이고 그때는 우리 중에 살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다." 병사들은 여전히 침묵을 하며 겁먹은 눈망울로 이정기를 주시했다. 이정기의 입에서 뜻밖의 명령이 떨어졌다. "전진 !" 이정기는 200명의 자기편 군사들에게 5천 명의 적군을 향해 나아가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병사들은 삶과 죽음이 순식간에 바뀌는 상황인지라 기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오직 말발굽 소리만이 거리를 좁혀 가고 있었다. 해의 대군과의 거리가 500보, 200보-----150보 "서라 !" 이정기의 단호한 명령에 200명의 기병들이 일시에 멈춰 섰다. 그러나 이정기의 다음 명령을 들은 병사들은 금방 사색이 되었다. "말에서 내려서 안장을 풀어라!" 이정기의 명령은 해군이 일시에 짓쳐 들어오면 대항도 하지 못하고 앉은 채로 죽겠다는 각오였다. 옆에 있던 을지마사가 보다 못해 한마디를 했다. "만약 급박한 상황에 처해지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정기의 대답은 태연했다. "적들은 우리가 달아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말안장을 풀고 달아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자기네들을 유인하러 온 병사들이 아닌가 의심하게끔 만들어야 하오." "혹시 잘못되면?" "어차피 선택은 이 길밖에 없소. 만약 실패하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오." 아니나다를까 조금 있자니 백마를 탄 장수 하나가 기병 몇 명을 데리고 나타나 주위를 유심히 살피며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이정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달려나가 미처 대항할 틈도 주지 않고 백마를 탄 적의 장수를 장검으로 내리찍었다. 단숨에 적장을 죽인 이정기는 다시 돌아와 안장을 풀고, 이제는 아예 말에 게 풀을 뜯기며 병사들더러 누워서 한가롭게 잡담을 하게 했다. 한식경이 지나자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해 군사들은 시종일관 괴이쩍게 생각하며 덤벼들지 못하다가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이정기의 대군이 가까운 곳에 잠복해 있다가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고는 철수해 버렸다. 다음날 새벽을지마사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본진으로 돌아오는 이정기의 말소리가 평상시와는 달리 떨리고 있었다. "나도 사실은 겁이 났었소." 이정기는 발그레하게 동터 오는 먼 곳을 응시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대사를 목전에 두고 개죽음을 당한다면 저 세상에 가서 조상님들의 얼굴을 어떻게 대한단 말이오." 말을 마친 이정기는 힘차게 말 엉덩이를 박차고 앞으로 달려갔다. 을지마사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달려도 달려도 지평선만이 가물거리는 요동벌에 때아닌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이제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이 두 사람의 뒤를 쫓으며 환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두 번이나 바뀌어 758년 봄이 되었다. 북국의 요동벌에도 봄이 찾아와 이곳 저곳 언덕마다 노란색 개나리꽃이 흐무지게 피었다. 그 사이 을지마사는 대리로 사람을 보내 가족과 귀실우오, 연개수근, 목도사 이렇게 세 명의 장수들을 불러들였다. 아내 무메는 을지마사가 집을 비운 사이 아들을 낳아 안고 왔다. 대리의 고구려 유민들은 을지마사가 예측한 대로 평온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을지마사는 그때까지 개똥이라고 부르던 아들 이름을 을지문무라고 지었다. 고조 할아버지가 되는 을지문덕 장군처럼 큰 인물이 되라는 뜻에서 이름을 이와 같이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해 평로병마절도부 내에 보이지 않게 팽팽하게 죄어 오던 긴장이 일시에 폭발해 버린 대사건이 발생했다. 발단은 50이 넘은 병마절도사 왕현지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버린데 있었다. 이정기가 기다려 왔던 그때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왕현지는 쓸개가 곯아 터졌는지 밤낮으로 고통을 이기지 못해 훌훌 뛰며 식은땀이 나도록 소리를 질러 댔다. 병마절도부 관내가 어수선했다. 용한 의원들이 진맥을 하고, 별의별 약을 처방했지만 조금도 차도가 없었다. 그해 여름철이 이르기도 전에 왕현지에게는 죽음의 사자가 다가와 있었다. 그 무렵 병마절도부 관내의 크고 작은 일은 주제넘게도 왕현지의 아들 왕골대가 관장했다. 왕골대는 허우대는 멀쩡했지만 그 아비를 닮아 음흥하고 탐욕스러운 자였다. 그자는 걸핏하면 만만한 고구려 백성들의 논밭과 처첩을 빼앗았으며,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예외없이 그 잔혹성이 나타났다. 죄 없는 고구려 백성들을 붙들어다가 뼈가 부러지도록 패면서 매에 견디지 못해 비명소리를 지르면 묘한 쾌감을 얻는 이상성격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자가 저잣거리에 나타났다 하면 사람들이 슬슬 피해 일시에 저잣거리가 텅 비어 버렸다. 그러면 왕골대는 자기가 무슨 제왕이나 된 듯이 기분이 좋아서 낄낄거렸다. 그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이후 평로병마절도부가 고립되어 풍전등화의 위험에 처해 있었는데도 아비 덕에 유격장군의 직책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전쟁터에 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권력의 맛은 일찍부터 알아서 아비 이상으로 쥐고 휘둘렀다. 그런 그도 왕현지의 명이 경각에 이르자 당황했다. "아, 이 일을 어쩐다 좋은 방법이 없겠소?" 뱀눈 유협술이 염소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즈음 유협술은 왕현지가 죽은 다음 쥐꼬리만한 권력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일었던 터였다. 유협술이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왕골대님, 이렇게 저렇게 하시면 만사가 형통하지요. 히히-." "과연 그렇게 될까?" 유협술은 죽어 가는 왕현지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돋아나는 새 별 왕골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얼마 후 평로병마절도부에서는 참으로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절도부 관내의 군관급 이상 사이에 연판장이 나돈 것이다. 연판장의 내용인즉, 만고에 짝이 없이 탁월한 병마절도사 왕현지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서두에 초를 친 다음, 아비에 못지않게 영특한 자식 왕골대에게 절도사의 자리를 물려 달라는 탄원서였다. 탄원서의 내용은 멀리 떨어져 있어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당나라 조정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즉 평로병마절도부가 서쪽으로는 안녹산, 북쪽으로는 해, 동쪽으로는 발해의 협공을 당해 존립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 따라서 문무를 겸비하고 지략이 뛰어난 왕골대를 새 병마절도사로 임명해야 한다는 것들이었다. 만약 왕골대를 병마절도사로 임명하지 않을 경우 그를 따르는 군사들과 백성들의 민심이 흥흥해져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우려가 크다는 적당히 위협적인 내용도 집어넣었다. 탄원서는 왕현지가 눈을 감기도 전에 장안으로 올라갔다. 한편 탄원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왕현지도 자식에 대한 보호 본능은 있었던지 아들 왕골대를 불러 품 속에서 밀서 한 장을 꺼내 건넸다. 급히 밀서를 읽어본 왕골대와 유협술은 금방 화색이 돌았다. 왕현지는 똑같은 밀서를 아들 왕골대에게만 준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왕현지의 밀서는 자기의 충복인 종사관 이충과 개주자사 왕길도에게도 건네졌다. 왕현지는 자기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예감했던지 밀서에는 이정기와 을지마사를 죽이는 밀계가 적혀 있었다. 그때쯤 이정기와 을지마사 쪽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루하루가 한여름밤의 무더위만큼이나 진을 뺐다. 을지마사는 참다 못해 이정기에게 넌지시 운을 떠보았다. "이정기 형, 더 미룰 게 없지 않소?" 그러나 이정기는 지나칠 정도로 신중했다. 그는 오히려 초조해 하는 을지마사를 향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아직은 조금 빠르오." "그러다가 일을 아주 그르치면 어쩔 셈이오?" "나도 그것이 걱정되어 밤잠을 설치고 있소. 그러나...." 이정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훅 들이마셨다. "지금 평로병마절도부에는 지난 90년 동안 이식해 놓은 중국인들의 세력이 만만치가 않소. 만약 양쪽에 싸움이 붙어 아수라장이라도 되면, 동쪽 발해는 동족인 우리편을 들겠지만, 안녹산군과 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까딱 잘못하면 평로절도부는 송두리째 망하게 되고, 우리의 계획도 일시에 물거품이 되는 거요." 이정기는 장래 일이 걱정되어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정기와 을지마사에게 왕현지가 죽었다는 부음이 날아든 것은 바로 얼마 뒤였다. 비장급 이상의 군관들은 비무장으로 와서 조문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상식적으로 초상집에 가면서 창을 들고 칼을 차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정기와 을지마사가 마악 집을 나서려는데 나나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두 사람을 뒤쫓아 나와 한마디를 했다. "두 분이 오늘은 따로따로 들어가세요." 을지마사와 이정기가 찜찜한 기분으로 병마절도부를 향해 가는데 난데없이 까마귀가 울면서 앞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길조일까 흉조일까 내심 불안해 하며 마악 병영에 들어서는데 주위가 너무도 조용했다. 도무지 초상집 같은 분위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이정기의 머리 속에 나나가 하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을지 형이 먼저 들어가시오. 내가 뒤따르리다." 두 사람이 병영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절도사 왕현지의 저택으로 들어가려면 중문을 거쳐야 했다. 을지마사가 앞서고 20여 보 뒤에서 이정기가 뒤따랐다. 을지마사가 마악 중문을 빠져나갈 때. 갑자기 뒤따르던 이정기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앗 !" 동시에 중문의 기와지붕으로부터 쇠그물이 을지마사를 향해 덮쳐 내려왔다. 미처 피하지 못한 을지마사의 하반신이 그만 그물에 걸려 버리고, 뒤이어 절도부 병사 20여 명이 을지마사를 생포하려고 달려들었다. 을지마사가 옴짝달싹 못하고 사로잡히게 될 위기의 순간, "이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 !" 뒤따르던 이정기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이정기는 달려드는 병사의 턱을 발로 힘껏 걷어차고, 땅에 떨어진 창을 꼬나잡았다. 절도부 병사 20여 명은 애초에 이정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정기가 이리 막고 저리 찌르고 하는 사이 을지마사는 그물에서 몸을 빼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절도부 병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이정기와 을지마사가 급히 몸을 돌려 중문을 빠져 나오려는데 어디선가 홀연히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어느 사이 나타났는지 천여 명의 절도부 병사들이 두 사람의 앞을 떡 가로막았다. 고구려인은 모조리 빠지고 모두 다 중국병사들이 분명했다. 왕골대, 이충, 왕길도가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때 왕골대 뒤에서 염소수염을 한 유협술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 고구려 오랑캐놈아. 오늘이 너희들의 장삿날인 줄이나 알아라." 이윽고 다시 북소리가 나더니 절도부 병사들은 점차 포위망을 좁혀 왔다. 두사람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두 눈을 뻔히 뜨고 선 채로 죽을 수는 없었다. 이정기는 어차피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했다. "에잇 !" 약속이나 한 듯이 이정기와 을지마사의 입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앞을 보고 돌진하면서 창과 칼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중문 앞뜰이 금방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저기 간다 !" 절도부 병사들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뒤쫓아왔다.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일차 포위망은 뚫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절도부병사들이 따라붙었다. 을지마사는 몸을 훌쩍 날려 담장을 뛰어 넘었다. 담장 너머는 뜻밖에도 인적이 없는 후원이었다. 을지마사는 그제서야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젠 저 후원의 담만 뛰어넘으면 밖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을지마사가 마악 담장 쪽으로 달려가는데 후원의 나무들이 움직였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수십 개의 날카로운 창 끝이 을지마사를 빙 둘러싸 버렸다. 을지마사는 순간 눈앞이 노래졌다. 대결은 커녕 금방이라도 찌를 듯한 창끝이 노리고 있어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창끝이 금방 자신의 몸을 벌집처럼 꿰뚫을 것만 같은 절대 위기였다. 이어서 소름이 끼치도록 흉측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네놈이 이쪽으로 올 줄 알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유협술이었다. 을지마사는 장도를 내던지고 유협술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에서 절망으로 꺼져 가는 탄식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도, 당신도 고구려 사람이 아니던가요?" 그때 유협술이 천천히 을지마사 쪽으로 다가왔다. 유협술은 대답 대신 을지마사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다시 따귀를 갈겼다. "정신 차려. 당나라는 부모의 나라이고 나는 당연히 당나라 사람이 되었다." 을지마사는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부르짖었다. 유협술을 향해서가 아니고, 어쩌면 자신을 향해, 아니 가슴을 죄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공허한 외침이었다. "당신의 몸에서 저 단군 할아버지, 주몽님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의 피를 모두 지워 버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을지마사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두 눈에 불이 번쩍 일었다. 유협술이 또한번 을지마사의 뺨을 후려갈겼던 것이다. "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을지마사는 당장에 꽁꽁 묶여서 왕골대 앞으로 끌려갔다. 왕골대는 낮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별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을지마사가 들어서자 왕골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놈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만도 고마워해야 할 것인즉 오늘은 그만 세상을 하직해야겠다." 주기가 오른 왕골대는 드디어 포악한 성격이 발동했다. 옆에서 있는 병사의 창을 뺏어 들더니 창자루로 을지마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곧이어 을지마사의 옷이 갈가리 찢겨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래도 왕골대는 매질을 그치지 않았다. "바른대로 대라. 너는 평로절도부를 쓰러뜨리기 위해 굴러 들어온 놈이지?" 을지마사의 입에서 대꾸가 없자 다시 한 번 매타작을 했다. 그래도 을지마사의 입에서 신음소리 한 마디 새어 나오지 않자 왕골대도 어지간히 지쳤는지 매질을 놓았다. 포악스럽게 때릴 만큼 때렸으니 이제 칼로 목을 벨 차례였다. 유협술이 왕골대를 향해 눈을 꿈벅 했다. 이제 그만 죽이자는 신호였다. 왕골대가 을 지마사의 머리채를 거머쥐며 턱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피가 흐르는 을지마사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 번 다그쳤다. "너,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냐?" 그때쯤 을지마사도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떳떳하게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우에서 왔다." "농우?" "그렇다. 고선지 장군과 함께 서역 정벌을 했다." 왕골대와 유협술은 을지마사가 토해 내는 말을 듣고는 바짝 구미가 당기는 눈치였다. 그때 유협술이 아는 척을 하고 나섰다. "동관에서 참수를 당한 고선지말인가?" 을지마사는 대답 대신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왕골대와 유협술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증오의 빛이 번뜩였다. "다음은?" 이젠 왕골대가 죄인을 심문하듯이 다그쳤다. "대리로 가서 싸웠다." "누구와?" "이밀과 싸워 당군을 전멸시켰다." 왕골대와 유협술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라고, 네가?" "그렇다. 너희들마저 죽이지 못하고 먼저 죽는 것이 원통하다." 왕골대가 다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런 쳐죽일 놈을 봤나?" 왕골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협술이 달려들어 을지마사의 얼굴을 걷어찼다. 악에 받친 을지마사도 고함을 질렀다. "이놈들!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고구려 사람이 고구려를 위해 싸우는 것도 죄냐? 그럼 중국 사람이 중국을 위해 싸우는 것도 죄가 된단 말이냐?" 왕골대와 유협술은 을지마사가 피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고 의외로 당차게 대들자 말문이 막히는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비밀스럽게 소곤거렸다. "저놈을 감옥에다 처넣고 잘 살펴야 되겠다." "역적질을 한 중죄인을 잡았다고 보고만 하면 새 병마절도사는 따 놓은 당상이고, 큰 상금이 내리겠지요. 히히히 ." 왕골대의 말에 유협술이 간사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을지마사는 그 길로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 이후로는 매질이 없었다. 큰 공로를 세울 수 있는 포획물이 상할까 봐 먹을 것도 많이 넣어 주었다. 왕골대와 유협술은 자기네들이 잡은 대어가 대견스럽다는 듯이 하루에 한 번씩 찾아와서 을지마사의 상태를 살피고 갔다. 하루는 을지마사가 유협술을 불러 세웠다. "이정기는 어찌 되었소?" 유협술은 을지마사의 질문에 멈칫했다. "이정기 그놈은 그날 싸우다가 죽었다." "그게 정말이오?" 유협술은 을지마사를 향해 뱀눈을 흘겼다. "이놈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귀찮게 더 이상 말을 시키지 마라." 을지마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 이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구나.' 을지마사는 땅이 꺼지게 탄식을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또 며칠이 지나갔다. 정녕 을지마사가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던가 하루는 밤이 깊어 삼경쯤 되어서였다. 을지마사는 차라리 자결을 해버릴까 생각을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문득 감옥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어둠을 뚫고 찬찬히 살펴보니 천장의 공기구멍을 통해 새끼줄이 소리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가슴이 마구 뛰었지만 숨을 죽여 가며 지켜보고 있었다. 줄이 거진 바닥에 이르러서도 이쪽의 반응이 없자 줄 끝이 조금 흔들렸다. '옳지 , 붙잡으라는 거구나.' 을지마사가 줄을 붙잡자, 저쪽에서도 줄 끝을 고정시켜 놓았는지 잡아당겨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을지마사는 줄을 붙들고 벽을 타고 올랐다. 천장의 공기구멍까지는 20척 (약 6미터). 을지마사는 공기구멍으로 해서 밖으로 나왔다. 밖은 깜깜해서 한치 앞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때 뭔가 손에 뭉클하게 와 닿았다. 사람이었다. "쉿 ."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여자는 어둠 속에서 을지마사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을지마사는 뒤따라가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다, 당신은?" "아직은 위험해요."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 바로 나나였다. 그때 시커먼 물체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흠칫 놀라 물러서서 숨을 죽이고 자세히 살펴보니 병영의 담벼락이었다. 그때 또 어둠 속에서 담벼락 한 귀퉁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순라병들이었다. 두 사람은 쥐죽은 듯 엎드려 있다가 순라병의 발길이 차츰 멀어지자 담을 뛰어넘었다. 뒤이어 시끌벅적한 소리가 뒷덜미를 낚아챌 듯 들려 왔다. 횃불을 들고 군사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양이었다. 필시 을지마사가 도망친 것이 발각되어 온 절도부 관내에 초비상이 걸린 것 같았다. 담을 뛰어넘은 을지마사와 나나가 엉거주춤 망설이는데 그들 앞에 행길이 나왔다. 두 사람은 주위를 살피다가 행길을 건넜다. 그리고 시내 쪽으로 가지 않고 풀숲을 헤치며 성벽의 외진 곳으로 숨어들었다. 성벽 위에도 초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어둠을 이용해 살금살금 성벽을 기어올랐다. 그리고 졸고 있는 순라병의 뒤로 접근해서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조인 다음 성벽 밑으로 밀어뜨렸다. 다시 나나를 데리러 가려고 생각하는데 나나가 벌써 성 위로 올라와 있었다. 두 사람은 성을 타 넘었다. 드디어 바깥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그제서야 나나가 마음이 놓이는지 속삭여 왔다. "매를 심하게 맞았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몸은 괜찮으세요?" 을지마사는 그것보다 더욱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나를 구출했지?" "오늘밤 파수병 절반이 고구려 사람들이에요. 고구려 병사들을 시켜서 초저녁부터 파수병들에게 술을 취하도록 먹였지요." "그으래 ?" 언젠가 이정기가 말했듯이 나나가 큰일을 해낸 것이다. "지금 우린 어디로 가는 거지?" "요동성으로요." "요동성은 왜?" "지금 이정기 부장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을지마사는 적이 놀랐다. "그럼 , 이정기 부장이 살아 있다는 거야?" "하, 참! 멀정한 사람이 죽기는 왜 죽어요?" 오히려 나나가 이상스럽다는 듯이 반문을 했다. 유협술이 을지마사가 모든 걸 체념하도록 이정기가 죽었다고 거짓 대답을 했던 것이다. 이정기는 그날 어렵사리 포위망을 벗어나 쫓기면서 후원 반대쪽의 병영 울타리를 뛰어넘어 피신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길로 요동성으로 들어가 잠복을 했다. 이 소문이 은밀하게 퍼졌다. 뒤이어 고목, 고명영 , 목도사, 연개수근, 귀실우오가 요동성으로 들어가고, 평소에 그를 따르던 군사들도 1천여 명이나 묘동성 내로 집결했다. 돌보는 사람이 없어 페허가 된 고구려의 요동성이 다시 한 번 제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날이 갈수록 고구려 출신 병사들이 병마절도부에서 탈영을 해 요동성으로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는 왕골대의 폭정에 시달리는 중국인 병사들도 상당수 끼 어 있었다. "이러다가는 대사를 그르치겠는 걸." 이정기가 걱정하는 말을 을지마사가 받았다. "병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오, 많은 수가 성안에 남아 결정적인 순간에 들고 일어나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나가 은밀하게 성안을 돌아다니면서 탈출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했다. 요동성에 집결한 고구려군은 긴장이 감도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평로절도부의 왕골대와 유협술도 이 사실을 벌써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요동성을 토벌할 경황이 없었다. 그해 12월 마침내 절도사 왕현지가 죽었다. 그들은 당나라 장안에서 올 조문사절과 황제의 첩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해 2월, 삭풍이 눈가루를 날릴 무렵 마침내 장안에서 조문사절이 도착했다. 왕골대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예상한 대로 황제가 그를 새 병마절도사로 임명한다는 첩지를 내렸던 것이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영주성 안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축하일색으로 법석을 떨어야 할 성안의 분위기가 오히려 무겁게 가라앉았다. 왕현지의 가렴주구에도 신물이 났는데 , 포악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왕골대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모두들 앞일이 아득했던 것이다. 온 영주성내가 침묵하는 가운데 또 며칠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 소리없이 영주성 북문으로 접근해 오는 군사들이 있었다. 이정기와 을지마사가 이끌고 오는 병사들은 기껏해야 1천여 명 병마절도부의 3만여 명의 군사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적은 규모였다. 군사들이 북문에 이르자 을지마사가 성루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병마절도부의 병사들이 창과 칼을 겨누며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정기가 군사들을 정지시키고는 혼자서 말을 달려 성문 밑으로 바짝 다가갔다. "앗! 위험하다." 병사들의 입에서 염려스러운 외침이 새어 나왔다. 성루에서 절도부 병사들이 활을 쏘거나 창을 던지면 이정기의 목숨은 한순간에 끝장날 판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들려온 이정기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너희들은 왕골대의 노예가 되어 살 테냐, 아니면 나를 따라 새 세상을 이루고 사람같이 살 테냐? 이제 모든 것이 너희들의 결심에 달렸다." 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양 편의 군사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침묵을 깨고 들려 오는 소리가 있었다. 육중한 성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와아-"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성안으로 물밀듯이 들어갔다. 갑자기 성안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사기가 충천한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호를 외치며 병마절도부를 향해 돌진해 가고 있었다. "왕골대 죽여라!" "유협술 죽여라!" 군사들이 병영 앞에 이르렀을 때는 성안 백성들까지 합세해서 어느덧 5만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들은 병마절도부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정기 장군 만세 ." "을지마사 장군 만세 ," 그러나 당연히 병마절도부를 수비해야 할 군사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벌써 이쪽 편에 합세해 있었던 것이다. 이정기군이 중문에 접근하자 비로소 화살이 날아왔다. 반란 소식에 놀란 왕골대가 부랴부랴 중문에 심복 300여 명을 배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센 파도에 던져진 가랑잎이었다. 을지마사가 말을 달려 짓쳐 나갔다. 중문에 다다른 을지마사는 몸을 훌쩍 날려 성루로 뛰어오르더니 칼을 빼어 수비대장 마참추를 단칼에 찔러 버렸다. 마참추가 고꾸라지자 발로 걷어차서 성문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 광경을 목격한 나머지 병사들은 겁을 집어먹고 줄행랑을 쳤다. 중문을 걷어차고 들어서자 병마절도사의 거처가 나왔다. 10칸 대청에 당나라 조정에서 온 열대여섯 명의 조문 사절과 왕골대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당나라 조문사절들은 이정기를 보자 발 밑에 엎드려 구차하게 목숨을 빌었다. "황제께 상주해서 그대를 병마절도사로 임명토록 하겠소." 참으로 낮간지러운 말이었다. "나는 너의 황제란 자가 임금 자리를 준다고 해도 싫다."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미리 약속을 해둔 대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당나라 조문사절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렇게 된 마당에 당나라와는 다시 상종할 필요가 업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왕골대는 허우대 값도 못하고 겁에 질려 쿵 하고 쓰러졌다. "이정기 대장님, 목 목숨만 살려 주면 그 은혜는...." "그래, 오냐 살려 주마. " 이정기는 야멸차게 내뱉고는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왕골대 도련님이 살려 달라고 하신다. 이자의 생사는 너희들 손에 맡기겠다." 왕골대는 군사들이 아니라 백성들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그런데 유협술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자는 소란한 틈을 이용해 잽싸게 몸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뱀눈에 염소수염을 한 깡마른 늙은이가 어디로 갔을까. 이정기는 군사를 풀어 샅샅이 수색했다. 유협술은 급한 김에 변소의 똥통 속에 들어가서 코만 밖으로 내놓고 숨어 있었다. "저 유협술이란 자는 되놈들 똥을 즐겨 먹는 자다. 다른 곳에서 똥을 퍼다가 더 부어 주어라." 결국 유협술은 똥 속에 묻혀 죽었다. 백성들은 끌고 간 왕골대를 새끼줄로 꽁꽁 묶었다. 그 동안 그에게서 모진 학대를 받은 백성들이 차례로 끌고 다녔는데 오후가 되어 길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래도 분이 덜 풀려 죽은 왕골대의 시체를 그날 해질녘까지 끌고 다니면서 한을 풀었다. 이로써 평로병마절도부의 쿠데타가 일단락 지어졌다. 일시에 당나라의 서북 일각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 같은 반란은 그 유례가 없이 충격적인 것으로, 당나라에서는 <<신구당서-(자치통감)>>에 이 쿠데타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 10여 일이 지나자 또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웃 발해의 문왕이 축하의 글을 보내온 것이다. 이정기 장군 오호라. 고구려가 망한 지도 어언 -년이 지나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우리의 국조 대조영께서는 오갈 데 없이 방황하던 유민들을 모아 동쪽으로 와서 고구려의 법통을 이어 발해국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아직도 옛 조상의 나라 고구려처럼 기운을 사해에 떨치지 못해 항상 분하게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요동벌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했으니 그 빛남이 하늘 위의 태양과 같습니다. 비로소 우리 겨레의 억조창생이 새 봄을 맞고, 지하에 계시는 선열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것입니다. 발해 문왕의 글에는 구절구절 같은 민족으로서의 아픔이 담겨 있어 읽어 내려가는 이정기와 을지마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막상 쿠데타는 성공했지만 풀어야 할 난제들이 너무 많았다. 첫째, 평로절도부의 성격 문제였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고구려 백성들은 당장에 이름을 고구려로 하고, 나라를 세우자고 성화를 댔다. 그러나 이정기는 반대했다. 또 백성들은 이정기를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했다. 이정기는 그것도 사양했다. 이정기가 요동벌 전부를 차지한 이상 그 땅에다 고구려를 세우고 시조왕이 되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고구려의 법통을 이은 발해가 있었다. 고구려가 두 조각이 나서 옛날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서로 으르렁거리며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 경우가 생겨서는 결코 안 되었다. 또 쿠데타 직후라 국가의 기틀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왕을 세우는 것은 무리였다. 그때까지도 영주 지역에는 지난 30년 동안 이주해 온 중국인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아서 자칫하면 내란으로 번질 위험성이 있었다. 만약 중국인들이 이정기에게 등을 돌리고 안녹산군에 붙는 날이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야기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 세력을 기를 때까지는 중국인들을 무마시킬 필요가 있었다. "어떡하지?"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궁리를 했다. 그러나 뽀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만 비웠다. 그때 을지마사가 무슨 묘책이 떠올랐는지 무릎을 쳤다. "옳지, 그거면?" "묘안이라도 있소?" "후희일 말입니다. 종사관 후희일을 당분간 대장으로 앉히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드디어 이정기의 얼굴이 펴졌다. 과연 좋은 착상이었다. 후회일은 이정기와는 고종사촌지간이지만 중국인이었다. 후회일의 아버지가 고구려 포로인 이정기의 고모를 강제로 끌고 가서 첩을 삼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를 당분간 대장 자리에 앉히면 겉 모양새로 중국인들을 다스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후희일은 그때 오십줄에 있었는데 평소에 사치가 심하고 낭비벽이 있었다. 그는 힘이 장사였는데도 지도력이 부족해서 병사들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했다. 당나라 조정의 배경으로 얻은 평로절도부 종사관 자리만 차지하고 놀고 먹으나 진배 없는 건달 생활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성안에 방이 나붙었다. 새로운 요동국의 인사 내용을 알리는 포고령인 셈이었다.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요동군국공 요동부군국공 종사관 후희일 이정기 을지마사 마침내 평로절도부의 쿠데타 소식이 당나라 조정에 알려졌다. 당나라 숙종과 대신들의 얼굴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를 어떡한다?" 모두들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을 했지만 그렇다고 뽀족한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안녹산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마당에 요동까지 군사를 보내 반란군을 토벌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옛날부터 써 먹던 파렴치한 수법이 등장했다. 즉 당사자는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고 어거지 벼슬을 내리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에게도 그렇게 했었다. 어찌 됐건 자기네 중국의 속국으로 여기겠다는 속셈이었다. 다음해 4월, 남지나해에서 불어오는 하의바람이 꽃눈을 녹이는 늦봄이었다. 당나라 조정에서 온 사신이 황제의 첩지를 바쳤다. 그 내용인즉 이러했다. 다음과 같이 임명한다. 평로병마절도사 평로부병마절도사 후희일 이정기 대당 황제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당 황제의 뻔뻔스러움에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누가 당나라의 벼슬을 달라고 간청이라도 했단 말인가. 사신은 한술 더 떠서 황제의 각별한 총애의 징표라며 선물도 바쳤다. 이정기는 사신이 보는 앞에서 당나라 황제가 보낸 첩지를 찢어 팽개쳤다. 동시에 을지마사가 하사품인가 뭔가 하는 물건을 발로 걷어차서 내동댕이쳤다. 이정기는 사색이 된 당나라 사신의 얼굴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똑똑히 들으시오. 이제부터 이곳은 당나라가 아니오. 고구려란 말이오." 이정기는 사신마저도 목을 베어 죽이고 싶었지만, 그도 처자식이 딸린 인간이라 불쌍히 여겨 그냥 돌려보냈다. -- 요동벌에는 초록이 눈에 띄게 짙어 갔다. 지난 겨울 세상이 바뀌어 버린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들녁에는 벼들이 쑥쑥 자라고, 성안 백성들도 부지런히 일을 해서 풍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요동국에도 경사가 겹쳤다 그해 봄에 대리에서 온 연개수근과 나나가 정이 나는 눈치더니 드디어 결혼을 했다. 함께 온 귀실우오도 시샘이 났던지 곧이어 예쁜 고구려 처녀를 골라 장가를 들었다. 목도사만이 그때까지도 총각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을지마사는 목도사를 대리로 보내 그간의 경위를 알리게 했다. 장가를 못 가는 것도 서러운데 사신의 짐까지 지워진 것이다. 목도사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부모도 만날 셈으로 군말없이 떠났다. 1해 8월에 돌아온 목도사의 말로는 대리의 유민들은 평화롭게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요동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대리의 백성들은 흥분해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린다고 했다. 대리 소식을 들은 을지마사는 가슴이 뭉클했다. 을지마사는 짬을 보아 자신이 직접 대리에 다녀와야겠다고 벼르면서도 매일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서쪽으로는 안녹산군과 싸워야 하고, 북쪽으로는 해와 대결하고 있었다. 특히 해는 옛 동호 계통인 북방의 유목민족으로 요동군에 쫓기면 북쪽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가 잊어버릴 만하면 다시 나타나 국경을 침범해 왔다. 요동국으로는 성가신 존재였다. 어느 날 을지마사가 땅거미가 지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니 무메는 여느때처럼 밥상을 차려 놓고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메는 남편이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되찾는 것을 보고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요동국의 주역이 되어서 주야로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면 가엾기도 했다. 무메는 벌써 두 아이의 어머니. 이제 또 세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무메에게 다가가 팔을 둘러 껴안았다. "아이 , 애들이 봐요." 무메는 좋으면서도 몸을 비틀어 빼냈다. 큰딸 여옥은 벌써 다섯 살, 큰아들 을지문무는 세 살이 되어 있었다. "무메, 가정을 잘 보살피지 못해 미안해 ." 무메가 얼른 손으로 을지마사의 입을 막았다. "당신이 나가 있는 동안 나는 이 아이들을 당신처럼 자랑스런 고구려 인으로 잘 기르겠어요." "무메 , 친정에도 한번 못 가보고,,.,,,." 영주에서 고비사막 끝에 있는 허텐까지는 2만 리 길이었다. 무메가 무남독녀 외딸이었기 때문에 무메의 부모인 자숙 대인은 오직 무메만을 생각하며 늙어 가고 있을 것이지만 그 사이 8년의 세월이 지나가도록 소식 한번 전하지 못했다. 자숙 부부는 그때쯤 허텐을 떠나간 후 소식이 끊긴 딸 무메가 죽었다고 체념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던 무메의 입에서 한숨소리가 섞여 나왔다. "외할아버지 . 할머니가 애들을 보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무메는 말끝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닦아 냈다. 을지마사가 무메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무메, 내가 허텐으로 사람을 보내겠어 두 분 내외를 모시고 올 수는 없지만 이쪽 소식만은 전할 수 있을 거요." 무메는 마음을 써주는 을지마사가 한없이 고맙기만 했다. 을지마사는 그날 밤 자리에 누워서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어둠 속에서, 그날 아침 조회 때 이정기가 한 말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을지마사, 이젠 중국의 심장부로 쳐들어가는 거요,' 을지마사는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과연 중국으로 쳐들어가서 당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세상이 바뀐 지도 1년이 다 되어 가건만 요동국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옛날과 같은 가렴주구는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백성들 살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요동군국공으로 추대한 후희일의 사치벽 때문이었다. 후희일은 요동군국공의 자리에 오르고 난 다음부터 성격이 더욱 오만 방자해졌다. 거기다가 불교를 지나치게 신봉해서 이곳 저곳에 불사를 일으키는 데 국고를 탕진하다시피 했다. 그해에 지은 절만 해도 60개가 넘었다. 자연히 농번기에 백성들이 동원되는가 하면 세금 또한 갈수록 늘어나 백성들은 이래저래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참다 못한 이정기가 후희일을 찾아갔다. "국공님. 나라는 백성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 가고 있습니다. " 후희일은 대뜸 불쾌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불덕을 이용해 나라의 태평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앞으로 내가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나서지 마라." 이정기는 후희일의 면전에서 대들 수도 없었다. 차라리 후희일을 쫓아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어쨌든 한집안이라는 벽에 부딪쳐 번민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튼 이대로는 안 되겠어 .'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근심에 싸여 매일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다. 하루는 이정기가 결심을 굳혔는지 을지마사를 바라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을지 형, 차라리 중국으로 쳐들어갑시다." 이정기의 뜻밖의 말에 을지마사가 화들짝 놀랐다. "뭐라구요?" "옛 고구려의 영토에는 발해가 있으니까 우리는 중국땅을 차지해서 새로운 고구려 영토를 만드는 것이오." 과연 이정기는 대장부다웠다. 고구려가 아무리 강성했다 하더라도 사직을 통해 난하를 넘어 북경 남쪽 지역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정기는 중국의 심장인 중원으로 쳐들어가자는 것이 아닌가. 을지마사가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정기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자기의 계획을 설명했다. "요동국 50만 병 중에서 힘을 쓸수 있는 고구려인 정병만을 고른다면 2만 명이오. 이 정도면 우리도 중국을 넘볼 수 있지 않겠소," @[다시 떠오르는 고구려]@ 이정기의 발상은 곧 실행에 옮겨졌다. 그해부터 군사들을 실어 나르기 위한 병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육로로는 안녹산 진영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중원에 이르기도 전에 불필요한 싸움으로 병력을 소모할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발해만을 건너 곧바로 산동 반도로 상륙하기로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이 소식을 들은 후희일은 은근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했다. 이정기가 떠나면 자기의 독무대가 되어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정기가 일으킨 쿠데타에 공로도 없으면서 꼭두각시처럼 얹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심이 늘 가슴 한구석을 차지했었다. 더욱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이정기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격으로 중원을 쳐들어간다니 그의 생각으로는 이정기의 비참한 말로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래서 후희일은 이정기가 하는 꼴을 그냥 모르는 척했다. 3월, 요동벌에도 봄이 왔다. 다른 해의 봄과는 달리 온 평로절도부 관내가 새로운 희망으로 들떴다. 병선 300척이 완성되자 따로 길일을 잡아 단군님과 주몽님께 제사를 지낸 후 이정기군의 발해만 함대는 산동 반도를 향해 닻을 올렸다.드디어 한민족이 중국의 심장부로 쳐들어가는 대 서사시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총대장은 고구려인 이정기, 휘하에 을지마사, 고명영, 고목, 귀실우오, 목도사, 연개수근 등의 맹장들이 2만명의 군사를 지휘했다. 병선들은 대오를 지어 발해만의 푸른 물살을 갈랐다. 바다도 이정기의 앞날을 돕는지 연일 파도가 잔잔했다. 오직 황포돛만이 순풍을 찢어질 듯이 받으면서 앞으로 나갔다. 요동 반도와 산동 반도 사이에는 묘도열도의 징검다리가 있었다. 그래서 얼마쯤 가면 쟁반을 뒤엎어 놓은 것 같은 조그만 섬이 나타나고, 또 앞을 향해 반나절쯤 가면 다른 섬이 나타나서 항해는 순조로웠다. 고구려군단이 요동국내 안동도독부를 출발한 지 17일째 되던 날 아침, 새별 안개가 걷히자 아스라이 육지가 보였다. 드디어 중국땅에 이른 것이다. 목표는 하남(산동 반도와 하북성, 안휘성, 절강성 일대)에서 가장 큰 청주성이었다. 어떻게든 이 청주성만 무너뜨리면, 중국인들은 기세가 꺾일 것이었다. 그해 4월 초이튿날, 고구려군단은 마침내 청주 관내의 한적한 바닷가에 상륙했다. 고구려군단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이 금세 사방으로 퍼진 모양이었다. 상륙을 한 지 한식경이나 지났을까, 뜻밖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접근해 오고 있었다. "도대체 웬 사람들일까?" 이정기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을지마사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글쎄요. 당나라 군사는 아닌 것 같고." 사람들이 가까이 이르러서야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모두들 고구려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병선에 꽃혀 있는 고구려 깃발을 확인하고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댔다. "고구려 만세 !" 이 광경을 본 고구려 병사들은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고구려 사람들일까?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고구려 사람들이었다. 단지 많은 이들의 머리 속에서 그들의 존재가 차츰 지워져 가고 있었을 뿐이다.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는 고구려 땅에서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자 붙잡아 갔던 보장왕을 보내 무마하고자 했다. 보장왕마저 독립운동에 가담하자 왕과 백성들을 대량으로 붙들어다가 보장왕은 공주로 귀양 보내고, 백성들은 산동 반도 서쪽 일대의 하남과 서역의 농우로 내쫓아 흩어져 살게 했던 것이다. 고구려 백성들은 하남으로 끌려온 이후 노예처럼 살아야만 했다. 중국인들은 처음부터 고구려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온갖 궂은일은 그들에게 시키고, 천민 취급을 해서 함께 어울려 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구려 백성들은 그때까지도 마을을 만들어 따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난데없이 고구려군이 상륙했다는 소문이 돌자, 인근에서 살던 고구려 백성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먼 곳의 고구려 백성들까지도 꿈인가 생신가 하는 기분으로 찾아 들어서 그날 해질녘 안으로 수천 명이 되었다. 그들은 고구려 군영 앞으로 와서는 대성통곡을 했다. 지난 30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모진 멸시를 받고 살아온 나라 잃은 백성들의 쌓인 한이 비로소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것이다. 이정기 장군도 이 광경을 보고는 마음이 착잡했던지 내내 침묵했다. 그러나 장수된 자가 언제까지 백성들과 함께 한풀이나 하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초전을 치르기도 전에 병영이 난장판이 되었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멀리서 찾아온 고구려 백성들이 붙들고 우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다음날도 해가 질 때까지 만남의 장으로 온 병영 안팎이 어수선했다. '이러다가 불시에 당군의 기습이라도 받으면 전멸하겠어.' 을지마사도 내심 초조했다. 그도 젊어서부터 살벌한 전쟁터를 누벼온지라 왠지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정기와 을지마사의 걱정은 기우였다. 3일이 지나자 고구려 유민들은 차츰 진정을 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한을 풀 만큼 풀자 이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다음날부터 쌀, 돼지, 장작 등을 날라 오기도 하고, 목수 일을 하는 사람은 마차나 공성무기를 만드는 일에 달라붙고, 기술이 없는 사람은 대신 군수물자를 날랐다. 그들은 조국의 군대를 위해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성의라도 보태고 싶어했다. 고구려군단의 상황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전투력이 배로 늘어난 것이다. 원래 이정기가 이끌고 온 고구려군이 2만이라고 해도 실제로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은 1만 명 남짓. 나머지 병사들은 군량 수송, 병기 제작, 취사 등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 뒤치다꺼리를 고구려 유민들이 도맡았으니 전 병력을 전투에만 투입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며칠 뒤 이정기는 그곳에서 오추라고 하는 고구려인 도사 한 분을 만나 결정적인 도움을 받게 된다. 사실 한민족 역사 이래 중국의 심장부로 쳐들어가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전략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고구려 유민 중에 늙은이 몇 명이 이정기를 찾아왔다. "장군님, 현인을 한번 만나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이정기도 앞일이 막연하여 답답하던 차였다. "그분이 어디에 살고 있는 뉘시오?" "여기서 30리쯤 가면 천태산이 있는데, 그 산 속에 은거하고 있는 마메오추라는 분입니다. 그분은 상통천문하고, 하달지리해서 온갖 조화를 부린다고 소문이 나 있습니다만,,,,,,." 이정기는 다음날 아침 을지마사와 고목을 대동하고 천태산으로 찾아갔다. 천태산은 생각과는 달리 아주 야트막한 산이었다. 그러나 막상 계곡 입구에 들어서니 계곡도 의외로 길었고 천험의 장소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좁은 산길을 시오 리쯤 들어갔을까. 문득 앞에 산이 가로막고 길은 거기서 끝나는 듯했다. 그때 길을 안내하던 고구려 늙은이가 손을 들어 가리켰다. "바로 저깁니다요." 늙은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산중턱에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고, 그 사이로 초막 한 채가 보였다. 이정기 일행은 초막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한 번 놀랐다. 초막 앞 마당에는 큰 바위가 한 개 있었는데, 그 바위 위에 흰 수염을 석 자 남짓 기른 혈색 좋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사람 소리가 나는데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첫눈에 도사다운 풍모가 있었다. 이정기는 을지마사와 함께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예를 갖추어 공손히 인사를 했다. "저희들은 고구려군을 이끌고 온 이정기와 을지마사라고 합니다. 마메오추 도사께 가르침을 받고자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오추 도사는 이쪽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앉은 채로 까딱도 하지 않았다. 한식경이나 그러고 서 있었을까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다리가 뻣뻣하고 저려 왔다. 그제서야 오추 도사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눈을 들어 초막 쪽을 가리켰다.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속으로 옳거니 생각을 하고는 초막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초막 문을 열자 눈에 확 들어 오는 것이 있었다. 나란히 걸려 있는 두 장의 초상화, 초상화의 주인공은 단군과 주몽이었다.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숙연한 자세로 초상화 밑에 마련된 제단 앞으로 가서 먼저 향을 사뤘다. 이윽고 향 연기가 초상화를 타고 위로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다시 물러서 절을 한 후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이정기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읖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태초에 겨레를 낳으시고 나라를 세우신 단군 왕검님, 고구려를 열고 겨레의 기운을 사해에 떨치신 주몽님 어찌하여 자손들을 흩어지게 하여 천하를 유랑하게 하셨습니까? 저희들은 비록 재주는 없지만 오직 고구려 백성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한 손에 칼을 또 한 손에 창을 들고 일어서 조상 대대로 원수의 나라 중국에 쳐들어왔습니다. 자손들을 불쌍히 생각하시어 힘을 더하여 주십시오. 민족의 염원인 대업을 이루도록 도와 주십시오." 이정기가 빌기를 마쳤을 때 백발의 오추 도사가 초막 안으로 들어왔다. 오추 도사는 형형한 눈빛으로 이정기 일행을 둘러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는 지난 50년 동안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소." "옛 !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모두들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오추 도사의 표정은 침착했다. "옛 고사비기 -事理記)에 적혀 있기를 고구려 천 년에 중국을 친다고 했소. 이제 주몽님이 나라를세우신 지 꼭 천 년째가 되었소." "그럼 저희들이 바로,,, ." "그렇소. 조상님들은 벌써 그대들을 점지해 놓고 있었소?" 이정기 일행은 다시 옷깃을 여미고 오추 도사 앞에 엎드렸다. "도사님 , 제발 저희가 나아가야 할 바를 가르처 주십시요." 그러자 오추 도사는 갑자기 난감해 하며 명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이 있겠소? 다만 조-서 몇 마디만 하겠소. 청주는 이곳에서 120리 길, 가장 크고 견고한 성이오. 그런데 ,,,," 오추 도사는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청주도독부에는 이장이 있소. 한 명은 중국인으로 장오라고 하고, 다른 한 명은 장팔이라고 하는데 장팔은 중국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실은 태생이 고구려인이오. 장팔이란 자는 오만불손하고, 동족을 못살게 구는 데 앞장을 서는 못된 자요. 그러나 이장은 하남도 내에서는 당해낼 사람이 없을 만큼 만부부당 지용을 가진 자들이어서 지금껏 누구도 청주를 감히 넘보지 못하고 있소." "그러하오면?" "그대들은 두 번을 살려줄 것이오." "누구를요?" "바로 장팔이를 말이오." 오추 도사의 말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정기가 바짝 다가앉으며 오추 도사에게 애원을 하다시피 말했다. "좀더 자세하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오추 도사의 태도는 단호했다. "나도 더 이상은 아는 것이 없소." "그럼 저희들과 함께 가서 힘이 되어 주십시오." 오추 도사는 고개를 저었다. "하남 일대에 고구려 유민들이 어렵게 살다 보니 단군님과 주몽님을 모신 사당이 이곳뿐이오. 나는 소임을 다했으니 이제 저 두 분을 성심껏 모셔야만 하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소. 공을 이루거든 더 많은 사당을 지어 국조를 모시도록 힘을 써주시오." 이정기와 을지마사가 제발 함께 가달라고 졸랐지만 오추 도사는 한번 입을 다문 뒤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진영으로 돌아왔다. 훗날 들리는 이야기로는 오추 도사가 얼마 후에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고 했다. 황해를 건너 고구려 삼신산으로 들어가 산신령이 되었다는 풍문이 들리기도 했다. 한편, 고구려군단의 침략 소식은 청주도독부에도 들어갔다. 당시 도독은 유이춘이라는 자였다. 유이춘은 정탐꾼으로부터 보고를 받자 껄껄거리며 웃었다. "동이 오랑캐놈들이 감히 중원을 침범하다니 ! 내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 청주도독부 관내의 정병은 3만, 당나라에서 그 짝이 없을 만큼 영용하다는 이장이 있어 유이춘이 큰소리를 칠 만도 했다. 이정기가 오추도사를 만난 다음날, 고구려군은 대오를 정비하고 청주성을 향해 소리없이 진군해 갔다. 선봉 부대가 청주성 동문 앞에 이른 것은 상륙한 지 7일째가 되는 4월 12일이었다. 청주성 성루에는 오색 깃발이 현란하게 나부끼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의 칼과 창날이 햇빛에 번쩍였다. 청주병들이 성 위에 도열해 있는 모습은 장엄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성루에서 병사들을 내려다본 유이춘은 가소롭다는 듯이 다시 한 번 껄껄 웃었다. "저 오합지졸들 좀 봐라. 저것도 군대라고,,,,,, 쯧쯧쯧." 고구려 백성 수천 명이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남루한 옷을 입고 군량을 실은 수레를 끌고 나타났으니 유이춘의 눈에도 거지떼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정기는 그들을 5리쯤 뒤로 물렸다. 그들은 비전투원이었던 것이다. 다음 고구려군단은 학익진으로 벌였다. 이정기는 중국 본토로 진격해 첫 전투인 만큼 정면 대결로 승부를 내고 싶었다. 고구려군단의 진용이 완성되자 갑자기 성루에서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고각소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어서 성문이 열리고 붉은 전포에 은색 투구를 쓴 일원 대장을 선두로 일지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들도 진을 짰다. 고구려군단은 청주성 당군의 행동을 주시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청주성 당군이 잔 진은 고기비늘 모양의 어린진으로 그들도 고구려군단과 정면 대결을 할 모양이었다. 양군 사이에 긴장이 점점 고조되어 갔다. 둥- 둥- 둥- 이윽고 청주성 성루에서 개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렸다. 정면전에서는 먼저 양측의 대장이 나와 대결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드디어 청주성의 당군 진영에서 일원대장이 말 위에 앉아 쌍고검을 휘두르며 달려나왔다. 확 째진 고리눈에 얼굴이 검은 8척 거구의 장수였다. 그의 장수기에 장오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면 청주성 이장 중에 하나임이 분명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고구려 진영에서도 북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목도사가 말에 올라탄 후 장창을 꼬나잡고 장오를 향해 돌진했다. 두 마리의 말이 스치는가 싶더니 '쨍' 소리가 나며 불꽃이 번쩍 튀었다. 장오의 쌍고검과 목도사의 장창이 맞부딪친 것이다. 두 장수는 이어서 서로를 노려보며 돌았다. 다시 불꽃이 튀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또다시 달려들어 어우러지면서 베고 찔렀다. 까딱 실수를 하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양편 병사들은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았다. 벌써 30여 합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목도사는 노련한 장오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누가 보아도 승세는 장오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싸움이 40합에 이르자 목도사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지 말머리를 돌렸다. 장오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간발의 차이로 목도사의 뒤를 쫓았다. "이 버러지 만도 못한 고구려놈아, 모가지를 내놓고 가거 라." 번쩍 치켜든 쌍고검이 목도사를 두동강낼 순간이었다. "아 -." 가슴을 죄며 고구려 병사들이 절망하여 부르짖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벽력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며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이 똥되놈아! 네 모가지나 내놔라." 고구려 진영에서 장창을 꼬나질고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장수는 검은 구레나룻을 한 8척 거구의 이정기. 이정기는 장오가 목도사의 등을 찍으려고 쌍고검을 내려치는 순간 장창으로 쌍고검을 막았다. 이어서 그의 옆구리를 향해 장창을 내질렀다. 장오도 역시 드물게 보는 맹장이었다. 그는 순간 몸을 비틀면서 이정기의 장창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이정기의 장창 끝이 다시 장오의 얼굴을 찔렀다. 장오가 쌍고검으로 장창을 후려치며 이어 이정기의 옆구리를 공격해 왔다. 이정기가 순간 몸을 돌려 쌍고검을 막아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용호상박이었다. 양쪽 진영에서 전의를 북돋우는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두 장수는 벌써 60여 합을 싸웠건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정기는 요동벌에서 제일가는 장수로 안녹산과 해군을 맞아 싸우면서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었다. 실전 경험이 적은 장오가 한 수 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오의 쌍고겁 휘두르는 것이 무디어 갔다. 성루에서 처음부터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유이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이춘은 자기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한낱 오랑캐 장수가 저렇게 잘 싸울 수가 있을까. 그때 장오가 쌍고검을 이정기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이정기가 날렵하게 피해. 말의 뱃구리를 박차고 장오에게 바짝 붙으며 장창을 내질렀다. 장오의 허벅지에서 금방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그때 성루에서 난타하는 북소리가 요란했다. 등등 둥둥둥-. 장오를 급히 불러들이는 신호였다. 동시에 장오가 말머리를 돌려 급히 자기 진으로 달아나자 그의 뒤를 이정기가 바짝 뒤쫓았다. "와아 -. " 양편 군사들의 함성이 멎기도 전에 이정기가 힘껏 던진 창이 장오의 등을 향해 날았다. 장오도 맹장인지라 등뒤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나자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획 돌아서서 날아오는 창을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이정기가 던진 창은 장오의 등짝에 깊숙이 박혀 버린 뒤였다. 등에 창을 맞은 장오의 몸이 마상에서 곤두박질치고 말이 거꾸로 매달린 장오를 질질 끌다시피하며 당군 진영에 도달했을 때는 검붉은 선지피를 쏟으며 절명한 다음이었다. 그때 당군 진영에서 분노로 얼굴이 시뻘개진 매부리코의 거인 장수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자는 족히 80근은 되는 장칼을 휘두르며 마상에서 길길이 뛰었다. 적토마의 갈기가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살기가 뻗쳐 나왔다. 고구려군 진영에서도 한 장수가 맞서 나갔다. 글방 도련님처럼 생긴 미남 장수 을지마사. 일찍이 서역에서 당해낼 자가 없다는 가가맹추를 사로잡은 그였다. 을지마사는 생김새와는 달리 장창을 꼬나질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네가 고구려 인 장팔인가?" "나는 중국 사람 장팔이다. 고구려 오랑캐가 아니다." "동족도 몰라 보는 이 철면피야. 오늘 내가 고구려 사람의 참맛을 보여 주마." "무슨 잔말이 많은가. 어서 덤비기나 해라." 장팔이 장도로 을지마사의 머리를 후려치자 을지마사가 살짝 몸을 비켜 피했다. 장팔이 다시 씩씩거리며 을지마사의 가슴팍을 향해 장도를 내질렀다. 을지마사가 몸을 엎드리자 장도는 순간 허공을 갈랐다. 싸움은 점점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보나 장팔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을지마사는 곡예사처럼 장팔 의 칼날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만 했다. 성루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는 유이춘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역시 장팔은 천하에 둘도 없는 장사로구나?" 장팔이 을지마사의 목을 베는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유이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고구려 장수가 도망가고 장팔이 놓칠세라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며 뒤쫓는 것이 아닌가. "이 비겁한 고구려 오랑캐야. 네 목이나 내놓고 가거라." 이제는 고구려 진영에서도 술렁거렸다. 을지마사의 생명이 촌각을 다투고 있었다. 그때 도망가던 을지마사가 품속에 슬그머니 손을 넣어 유성추를 꺼내 장팔을 향해 냅다 던졌다. 장팔이 얼른 말잔등에 몸을 굽혀 피했으나, 유성추는 하필이면 적토마의 콧잔등을 맞춰 버렸다. 장팔의 적토마가 놀라서 갑자기 곧추섰다. 뒤이어 적토마가 길길이 뛰기 시작하자 장팔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용을 썼으나 허사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야압!" 그때 고함소리와 함께 장창을 꼬나잡고 장팔에게 다가가는 장수는, 좀전까지 몸을 피하며 도망만 다니던 을지마사. 땅에 떨어진 장팔은 그도 죽음이 두려운지 몸을 꿈틀거렸다. 을지마사의 눈에 들어온 장팔은 영락없는 고구려인의 얼굴이었다. 을지마사가 창을 치켜들었다. 창끝이 부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힘껏 내지른 창이 땅에 박혔다. 을지마사가 장팔을 살려 두고 본진으로 돌아오자 당군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장팔을 떠메고 갔다. 을지마사는 장팔이 아무리 못된 놈일지라도 차마 자기 손으로 동족을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군 장수들은 은근히 불만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을지마사의 면전에서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날 밤 전쟁터까지 따라온 고구려 백성들은 더덩실 춤을 추면서 밥을 짓고 소를 잡아 고깃국을 끓여 병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고구려 백성들은 참으로 오랜만에 밝은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늙은이 한 명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래도 살고 볼 일이구먼,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네 ." 깊게 주름이 팬 그의 눈가는 어느덧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날 밤 청주성 안에서는 유이춘이 장팔을 불러들였다. "네가 같은 고구려 사람이라고 해서 살려준 게 아니냐?" "잘 모르겠습니다." 유이춘은 미심쩍은 듯이 다시 물었다. "그럼 살려 달라고 빌기라도 했단 말이냐?" "결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은 말 때문에 그리 되었지만 내일은 다시 나가 기필코 그놈의 머리를 베어 오겠습니다." "너는 그자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면 안 된다. 알아듣느냐?" "같은 고구려 사람이라고 살려 주어서는 안 된단 말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는 중국 사람이 된 지 오래입니다." 다음날도 양군은 청주성 동문 앞뜰에서 대결을 벌였다. 장팔이 또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왔다. "어제 그놈 나와라. 내 그놈을 죽여 간을 꺼내 씹어 먹겠다." 을지마사도 곧 말을 달려나갔다. 순간 장팔은 을지마사를 보자 몸을 움찔했다. 어제 일로 조금은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을지마사는 어제처럼 도망만 다니지 않고 정석대로 싸웠다. 장팔이 장도로 내려치면 맞받고, 허를 보아 장팔의 허리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참으로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마치 두 맹장이 땅군 앞에서 시범경기를 보이는 듯했다. 어느덧 80여 합. 그래도 두 장수는 지칠 줄을 몰랐다. 노련미는 서역을 주름잡으며 전쟁터를 누빈 을지마사 쪽이 조금 나았지만 그렇다고 상대방을 제압할 정도는 아니었다. 양쪽 군사들이 손에 땀을 쥐며 관전하는 사이에 싸움은 벌써 120여 합. 그때 이정기가 북채를 잡았다. 둥-둥-둥- 을지마사를 부르는 신호였다. 싸움이 의외로 오래 끌자 혹시 형제 같은 을지마사에게 실수나 있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을지마사가 말머리를 돌려 고구려 진영으로 돌아오는데 장팔이 고함을 지르며 악착같이 뒤쫓아왔다. 아무리 생사를 결판내는 살벌한 전쟁터라고 해도 기본 예절이 있는 법. 그러나 장팔은 을지마사의 뒤를 따라 성난 멧돼지처럼 돌진해 오며 불시에 장도를 휘둘렀다. "악!" 모두들 소리를 질렀다. 을지마사가 마상에 엎드린 것과 장도가 허공을 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을지마사가 획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두 맹장의 싸움은 다시 계속되고, 어느덧 천하장사도 버티기 힘든 150합이 넘어섰다. 두 사람 가운데 누구 하나가 죽을 때까지 끝장을 내자는 싸움이었다. 그때까지도 성루에 있는 유이춘은 욕심에 눈이 뒤집혀 북을 치지 않고 있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끝까지 상대해 주마." 을지마사는 장팔의 장도가 가슴팍을 찔러 오자 옆으로 살짝 비키며 번개처럼 몸을 날려 장팔을 덮쳤다. 이어서 땅바닥에 떨어진 두 사람은 한데 엉켜 바닥을 굴렀다. 드디어 백병전이 시작된 것이다 장팔의 배에 올라탄 을지마사는 주먹으로 장팔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러나 장팔은 맷집도 좋고 힘도 장사였다. 장팔이 한번 용을 써 몸을 뒤틀더니, 어느덧 상황이 뒤바꼈었다. 이제는 을지마사가 육중한 장팔의 몸에 깔린 것이다. 장팔은 을지마사의 배 위에 올라타자 을지마사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을지마사는 꺽꺽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안색이 파랗게 죽어 갔다. 이제는 을지마사의 목숨도 끝장인가. 초조한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젖먹던 힘을 다해 목을 조르는 장팔의 손을 팔꿈치로 쳐냈다. 장팔이 옆으로 나동그라졌다가 다시 일어섰다. 어느사이 품속에서 꺼낸 단도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장팔은 살기어린 눈을 번뜩거리며 을지마사를 향해 돌진해 왔다. 을지마사가 훌쩍 몸을 날려 피하자 장팔이 씩씩거리며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을지마사의 몸놀림이 곧 다음 동작으로 이어졌다. 을지마사의 몸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더니 왼발로 장팔의 손목을 걷어차 단도를 떨어뜨리고 오른발로는 면상을 가격했다. 불의의 양발 공격을 받은 장팔은 벌렁 뒤로 넘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을지마사는 쓰러져 있는 장팔을 뒤돌아보았다. 좀전까지 멧돼지처럼 날뛰던 장팔이 미동도 않고 엎어져 있었다. 을지마사는 장팔이 불쌍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그는 옷에 묻은 흙을 털고는 뚜벅뚜벅 걸어서 자기 진영으로 걸어갔다. 그때 천지가 진동하는 함성이 일었다. "돌격!" 드디어 고구려 병사들이 당군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러나 이미 사기를 잃은 당군은 감히 고구려군을 대적할 생각도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고구려군은 다투어 성안으로 들어가는 당군을 찌르고 목을 벴다. 고구려군이 자기편 군사에 섞여 성안으로 들어올까 봐 불안한 성주 유이춘은 서둘러 성문을 닫아 버렸다. 그 때문에 상당수의 당군이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도살당했다. 이날 싸움에서 죽은 당군은 1만 5천 명 청주성은 그날 병력의 반을 잃어버린 것이다. 다음날부터 자사 유이춘은 성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수성 작전으로 나왔다. 매일같이 고구려군이 성 밑으로 가서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싸움을 돋우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웃 치주와 제주에 요청한 구원병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떡한다?' 이정기도 방책이 서질 않았다. "공성을 하자면 수성 병력에 적어도 3배는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청주성 안에 남아 있는 병력은 1만 5천. 공성을 하다가 우리쪽 병사를 만이 잃을까 봐 앞일이 걱정이오." "그럼 어떡하지요?" 을지마사가 생각을 해보아도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공성은 줄잡아 수천 명의 병사를 잃을 각오가 없는 한 결단을 내릴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양군은 이렇다 할 상황 변화 없이 닷새가 흘렀다. 고구려군은 침묵만 지킬 수 없어서 포차로 큰 돌멩이를 성안으로 날리거나, 운제를 만들어 성안을 정탐하고 화살을 퍼붓는 게 고작이었다. 엿새째가 되던 날 오후, 속수무책으로 날짜를 허비한 고구려군에게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다. 후방에 대규모의 군대가 나타났던 것이다. 어림잡아 3만 명은 되어 보였다. 그들은 청주성이 위급하다는 기별을 받고 달려온 치주와 제주의 군사들. 그러지 않아도 이정기는 마음속으로 큰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내일은 공성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망설임은 종종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장 청주성 안에서 당군이 쏟아져 나오고 치주와 제주의 당군이 협공을 하면 고구려군이 전멸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정기는 난감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유이춘은 그날 공격해 오지 않았다. 아마도 날도 저물어 가고, 먼 길을 달려온 치주와 제주의 군사들이 휴식할 수 있는 짬을 주기 위한 것 같았다. 총공격은 내일 이른 아침으로 예상되었다. 평소에 침착한 이정기도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철수를 해야 할 것 같소." 을지마사도 대답할 말이 없어 침묵했지만, 좌절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것으로 고구려군의 원대한 계획이 초전에서 허망하게 무너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다도 시급한 문제는 만약 내일부터라도 청주, 치주, 제주의 군사들이 합세해서 추격을 해온다면 드넓은 중국 땅에서 어디로 도망을 쳐야 한단 말인가. 까딱 잘못하면 고구려군이 발해만에 수장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결국 철수 시각이 그날 밤 삼경으로 정해졌다. 목표지는 처음 상륙했던 지점. 그곳에서 배를 타고 다시 평로로 돌아가서 재기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이경쯤, 갑자기 벌어진 예기치 못한 사건은 고구려군의 진로를 다시 바꾸기에 이른다. 밤이 이슥해서 철수 준비가 거진 마무리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청주성 쪽에서 무엇인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것이 있었다. 이어서 화살 한 대가 고구려군 막사에 꽃혔다. 그냥 화살이 아니었다. 화살깃에 무엇 인가가 묶여 있었다. 오늘밤 삼경 서문으로 오시오. 쪽지에는 발신자의 이름도 없었다.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말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혹시 당군의 간계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고구려군을 성안으로 유인해서 일시에 도륙을 내려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전군이 몰사를 면치 못한다. 그러나 이정기는 배짱이 두둑했다. 이왕 생사를 하늘에 맡긴 몸, 중국대륙에까지 와서 가뜩이나 궁지에 몰려 있을 때 이판사판의 결단력도 필요했다. 그날 밤 삼경쯤, 고구려군이 어둠을 이용해 소리 없이 이동을 해서 서문으로 집결했다. 때가 그믐이어서 달도 없는 캄캄한 하늘에 별들만 빛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구려군이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성안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뒤이어 "불이야!" 하고 외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소리가 어지러이 성벽을 타넘어 들려 왔다. 마침내 어둠 속에서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육중한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정기는 망설였다. 만약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숨겨놓은 복병이라도 만나면 그때는 만사가 끝난다. 그때 을지마사가 이정기 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먼저 들어가겠소." "아니오. 내가 먼저,,,, ." 그때 목도사가 끼여들었다. "저는 이정기 장군이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목도사는 말을 마치자 미처 제지할 사이도 없이 성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내 뒤를 따라랏," 을지마사가 외치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 왔다.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우르르 뒤따라 들어갔다. 막상 성안으로 짓쳐 들어가서 보니 성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고함을 질러 댔다. "고구려군이 쳐들어왔다!" "북문으로 도망쳐라!" "어디라고?" "살고 싶은 사람은 북문이다, 북문 " 한식경이 지나서야 겨우 성안이 조금 잠잠해졌다.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일지군을 이끌고 자사 관저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유이춘은 벌써 도망을 갔는지 자사 관저는 텅 비어있었다. 이정기가 어찌할까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자사 관내로 뛰어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몸집이 장대한 거한이었다. 이정기가 흠칫 놀라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자세 히 보니 그자는 다름아닌 장팔이었다. 장팔 뒤에는 웬 젊은이, 늙은이 . 아녀자 등 수십 명이 뒤따라 들어왔다. 장팔은 을지마사 앞으로 다가오더니 고꾸라지며 흐느꼈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 "죽어서도 조상님네들 뵐 면목이 없습니다."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확연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화살을 쏘고 성문을 연 장본인이 바로 장팔이었던 것이다. 장팔은 흐느끼면서 또 한번 사죄를 했다. "처음 을지 장군이 마상에서 떨어진 제 목숨을 살려 주었을 때까지도 저는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목을 눌러 죽이려고 했던 저를 뒤돌아본 후 휘적휘적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는 '아! 나도 고구려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을지마사가 장팔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장팔 대장, 누구에게나 한때의 잘못은 있는 법이오. 동족끼리 서로 용서를 하고 합심을 하면 더 좋은 나라를 세을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저의 목숨은 두 번씩이나 살려 주신 을지마사 장군의 것이니 앞으로 처분대로 따르겠습니다." "장팔 장군이 목숨을 내게 맡긴다니 이제부터는 아우로 생각하겠소. 즐거을 때나, 슬플 때나, 괴로을 때나 언제나 함께 합시다." 장팔은 감격했는지 다시 엎드려 머리를 땅바닥에다 찧어 가며 한참이나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이정기는 장팔이 진정하기를 기다려 궁금한 것을 물었다. "대관절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은 또 누구요?" "고구려 백성들로 성안에서 종살이를 하던 자들입니다. 저들이 성문을 열고, 북문을 통해 당군이 달아나도록 유도를 했지요." 청주성을 함락시키는 데 바로 일등 공로자들이었다. 이정기는 그들에게 다가가 하나하나 치하를 했다. 장팔은 허우대는 미련스럽게 보여도 힘도 세고 꾀가 있는 자였다. 고구려 사람들을 시켜 성내를 돌아다니며 북문으로 달아나라고 소리를 지르게 했던 것이다. 이어서 다음 작전이 신속하게 개시되었다. "한시가 급하오, 천시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 법. 지금 치주와 제주성은 군사들이 빠졌기 때문에 텅 비었을 것이오. 이곳은 우리가 성을 차지한 이상 걱정할 것이 없소." 을지마사가 자원하고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좋소. 5천 군을 이끌고 치주로 달려가시오. 단 100명은 청주병 복장을 입혀 앞장세울 것." 그때 장팔이 앞으로 나왔다. "제주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저에게 조국과 민족에게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좋소. 그대도 5천 병을 이끌고 제주로 달려가시오." 이정기는 을지마사와 장팔을 떠나보낸 다음 즉시 수성 준비를 했다. "고목은 동문, 귀실우오는 서문, 목도사는 남문, 고명영은 북문을 맡으시오. 거느리는 병사는 각각 2천 명씩이오. 나는 연개수근과 함께 2천 명을 별동대로 하여 위급한 지역을 돕겠소." 제장들이 즉시 책임 구역으로 떠났다. 한편, 을지마사는 오경쯤 해서 치주성에 도달했다. 동녁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성문 앞에 이르자 중국말을 할 줄 아는 100여 명의 청주군 복장의 군사들을 성 밑으로 보내 외치게 했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우리는 청주에서 급한 전갈을 가지고 온 병사들이다. " 성문 파수병들이 내려다보니 청주 병사들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냐?" "작전상 비밀이다. 자사에게 직접 보고해야 한다." 수문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왜 치주 병사들이 오지 않고, 청주병들이 왔지?" "치주 병사들은 고구려군에게 완전 포위를 당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수문장은 수긍이 갔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고 망설였다. 오히려 초조한 고구려 병사들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만약 시간을 지체하여 낭패라도 당하면 네놈의 책임이다." 그러나 수문장도 녹녹치 않은 인물이었다. "기다려 라. 자사님께 물어본 후 성문을 열겠다." 을지마사는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촌각을 지체할 수 없었다. 만약 고구려군이라는 정체가 탄로가 나면 성의 방비가 강화될 것이고 계획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을지마사는 즉시 결사대 200명을 조직했다. "내 뒤를 따라랏?" 성문에서 수문장과 다툼을 벌이고 있는 틈을 이용해 을지마사는 다짜고짜 성벽을 타오르기 시작했다. 을지마사가 성벽 위로 올랐을 때 그때까지 마음을 놓고 있던 파수병 몇 명이 기겁을 해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때는 을지마사가 성벽을 오른 뒤었고, 또 졸개 열댓 명은 을지마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을지마사는 달려드는 놈들을 칼로 치고 발로 차서 성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사이 200여 명의 결사대도 성을 타 넘었다. 이렇게 해서 동문이 순식간에 고구려군의 결사대에게 점령당하고 성문이 열렸다. 뒤이어 고구려군 2천 명이 물밀듯이 성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성을 수비하고 있던 치주군은 3천여 명, 그들은 불시에 당한 기습이라 애당초 상대가 안 되었다. 한식경이 지나자 치주성은 완전히 고구려군의 손에 떨어졌다. 자사 마송보도 오랏줄에 묶이는 몸이 되었다. 그는 비겁하게도 목숨을 구걸했다. "목숨만 살려 주면 고구려에 충성하겠소." 고구려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얕잡아 보던 인간이 이제 목숨이 위태로워지니까 충성을 하겠다고? 을지마사는 마송보의 비루한 행동이 역겨웠다. 그래서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창고에 처박아 두도록 했다. 한편 장팔도 제주성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제주는 치주보다 청주에서 더 먼 거리에 있었다. "아뿔싸! 날이 새버렸구나." 제주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는 아침 3시가 다 되어 있었다. 백주 대낮에 속임수를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팔은 겉모습은 불곰처럼 생겼지만, 의외로 꾀가 많았다. 그래서 당나라 제일가는 명장이라는 명성을 얻을 만도 했다. 장팔은 제주성 計 2킬로미터쯤을 남겨 두고 전군을 두 패로 나누었다. 청주군 군복을 입은 200여 명이 달아나면 나머지 고구려병이 500미터쯤 간격을 두고 함성을 지르며 뒤쫓는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제주성 북문 파수병들이 바라다보니 먼지가 자욱하게 일며 한떼의 군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이어서 대부대가 그들을 급히 추격하고 있었다. 쫓기는 군사들이 북문 앞에 이르자 맨 앞에서 장팔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얼른 성문을 열어라. 우리는 청주병들인데 고구려군에게 쫓기고 있다." 성문 위의 제주병들이 보기에도 2천여 명의 고구려군이 고래고래 함성을 지르며 쫓아오는 판국이었다. 청주병들로서는 시각을 다투는 일 그대로 두었다간 몰살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야 이놈아 당나라에서 나를 모르면 중국 사람이 아니다. 성문을 빨리 열지 않으면 네놈의 대갈통을 박살내 죽이겠다." "앗! 장팔 장군님 " 파수병들은 급히 성문을 열었다. 장팔 이하 200명의 병사들이 쏜살같이 성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뒤이어 성안에서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말머리를 돌린 장팔은 마악 성문을 닫으려는 50여명의 파수병들을 모조리 도살해 버리고 다시 성문을 열었다. 2천여 명의 고구려 병사들이 성문을 통해 무혈입성했다. 제주성 안에는 5천여 명의 수비 병력이 남아 있었지만 졸지에 당한 일이라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모두 다 포로가 되어 버렸다. 장팔이 일지군을 이끌고 서둘러 관내로 쳐들어갔다. 그때 어디선가 호통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제주자사 왕인겸이 계단 위에서 장팔을 향해 호통을 치고 있었다. 자사 왕인겸은 나이 60이 넘었지만 지조가 있는 인물이었다. "장팔아, 네가 배반을 했구나." "배반이라구?" "조정에서 너를 후하게 대접했건만 무엇이 부족해서 역적질을 하느냐?" "하하하, 배꼽이 웃는다. " "뭐라고?" "그래 고구려 사람이 고구려를 위해 싸우는 것도 역적질이냐?" "그럼 , 네가 고구려 사람?" "그렇다. 너는 당나라를 위해서 싸우니 네 말대로라면 네가 고구려의 역적이 아니냐?" 자사 왕인겸은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던지 그만 기세가 꺾였다. 사실 그 자신도 선대가 부여에서 붙잡혀온 고구려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날은 구름 한점 없이 유난히도 하늘이 푸르렀다. 아침 10시쯤 되자 밝은 햇살이 온 누리에 퍼졌다. 중국땅 하남부 청주, 치주, 제주의 성루에는 흑, 황, 청색의 고구려 깃발이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힘차게 나부끼고 있었다. 국조 단군 이후 최초로 중국의 한복판에다 한민족의 깃발을 꽃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성루에 나부끼고 있는 고구려군 깃발을 바라다보는 청주도독 유이춘은 기가 막혔다. 고대궁실 같은 청주성을 내주고 자신은 의지할 곳 없는 유랑민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정오가 지나자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겨를도 없이 되어 버렸다. 성문이 활짝 열리면서 고구려군이 노도같이 쏟아져 나왔다. 고리눈을 한 이정기가 선두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패전을 하여 겁을 먹고 있던 당군은 미처 싸워 보지도 않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군사들이 다투어 도망을 치자 대장들도 이게 아니다 싶어 뒤따라 달아났다. 이정기의 고구려군은 이들의 뒤를 쫓으며 한바탕 시살을 했다. 목베어 죽인 자가 2만, 당군의 절반이 죽었다. 고구려군의 추격을 겨우 벗어난 당군의 패잔병들은 가까운 치주로 향했다. 그러나 성 앞에 이른 그들은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청주성에서 보았던 고구려군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지 않는가. 그때 을지마사가 성 위에 나타나 호통을 쳤다. "네놈들을 기다린 지 벌써 오래 되었다. 모가지나 내놓고 가거라." 을지마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구려군이 쏟아져 나왔다. 당군이 혼비백산해서 달아나자 을지마사군은 급히 뒤를 추격해 한바탕 시살을 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살아 남은 1만여 명의 당군은 제주로 향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또 한번 절망에 찬 탄식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장팔군한테 쫓겼다. 죽을 등 살 등 도망쳐 황하에 이르렀을 때였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힘조차 남아 있지 않던 당군은 그 자리에 꿇어앉아 빌었다. "장팔 장군님 ,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목, 목숨만." "진정 시키는대로 하겠는가?"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거역하겠습니까?" 장팔은 이들을 거두어 성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당분간은 당군 한 명에 고구려군 한 명씩을 따라붙여 감시하도록 했다. 청주도독 유이춘은 쫓기는 와중에 죽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의 폭정에 원한이 있던 부하 장수에게 살해당했다고도 했다. 아무튼 을지마사와 장팔의 싸움이 150여 합을 넘도록 북을 치지 않았던 잔혹한 유이춘은 그 자신도 비명에 간 것이다. 그러나 기상천외한 사건은 그 이후에 발생했다. 청주, 치주, 제주는 산동 반도 초입에 위치해 있었고, 안쪽으로는 내주와 등주가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주는 청주를 점령한 고구려군으로 인해 장안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끊겨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도 고구려군으로서는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들을 방치해 두다가는 어느 날 몰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정기는 먼저 내주와 등주를 제압해서 후환을 없애고 싶었다. 이 일을 맡은 것은 을지마사였다. 청주, 치주, 제주를 손안에 넣은 지 15일이 지나서 을지마사는 귀실우오와 목도사를 부장으로 하여 1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출정을 했다. 청주성을 떠난 을지마사의 고구려군이 내주를 향해 중간쯤 갔을 때였다. 수레를 끌고 오는 한떼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3백 명도 넘어 보였다. 저들이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좀더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그들의 꼬락서니가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웠다. 몰골은 영락없는 촌 무지렁이 농군들인데 괭이, 쇠스랑, 낫 같은 농기구를 메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을지마사의 고구려군단과 맞닥뜨리고서도 도무지 길을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앞서 가던 을지마사가 명령을 내렸다. "길을 비켜라." 농군들이 당당하게 맞받아치고 나왔다. "너희들이 길을 비켜라!" 그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도리어 이쪽을 노려보았다. 을지마사는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고 다시 물었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농군들이 기고만장해서 제법 위압적으로 대답했다. "우리들은 고구려 군이다." "뭐 ! 너희들이 고구려군이라고?" "그렇다면 그런 줄이나 알지 웬 잔말이 그렇게도 많은가?" 을지마사는 기가 막혀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이런 자들을 상대로 말씨름을 할 수도 없고, 참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우리들은 진짜 고구려군이다. 너희들이 길을 비켜야 한다 " "뭣 ! 너희들이 고구려군이라고?" "허허 , 내가 고구려 군 총대장 을지마사다." "을지 뭔가 잘 모르겠는데 네가 정 이렇게 나오면 우리 대장 떡쇠가 가만두지 않을 거다. " "그래, 너희 대장이 어딨느냐?" 그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조그만 당나귀에 올라탄 떠꺼머리총각 하나가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웃기는 것은 어디서 보고 들었는지 당나귀 뒤에는 대장기도 있고, 대장기에는 서투른 글씨로 '고구려 대장군 떡쇠' 라고 씌어 있는 것이 아닌가. 병사들은 웃음을 참지 못해 배꼽을 쥐었다. 그렇다고 을지 마사마저 따라서 웃을 수는 없었다. "그래, 너희들은 어디로 가는 길이냐?" "우리는 고구려왕을 만나러 청주로 간다. 내주와 등주 자사를 생포해 묶어 가지고 가는 길이다." "뭐 ? 뭐 라고?" 그제서야 을지마사도 화들짝 놀랐다. "그게 정녕 사실이냐?" 농군들은 대답 대신 자기네들이 끌고 온 두 대의 수레를 가리켰다. 수레가 아니라 죄인을 호송할 때 사용하는 함거였다. 함거 속에는 머리를 풀어 헤친 남자가 한 명씩 갇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을지마사는 의심쩍어 귀실우오를 시켜 확인하도록 했다. 죄수에게 직접 확인하고 돌아온 귀실우오는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고 보고했다. 을지마사는 어리둥절해서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을까? 그들은 자생적인 농민 반란군인 셈이었다. 이웃 청주, 치주, 제주가 무너지고 고구려국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고구려 유민들은 흥분했다. 당나라 관리들의 폭정하에서 하층민 생활을 하면서 참아 왔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그들은 드디어 당나라의 내주성을 까부셔 그간에 당한 분풀이를 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또 그렇게 해야만 자유 해방의 날이 앞당겨지리라 믿었다. 내주성은 하루에 한 번씩 성문을 열었는데 이웃 농민들이 쌀, 채소, 고기 등을 성안으로 들여와 팔았다. 농민 반란군은 머리를 맞대고 거사일을 잡았다. 이윽고 그날이 되자 짐꾸러미 속에다 감추어 가지고 온 칼, 낫 등을 들고 곧바로 자사가 거처하는 관내로 우르르 몰려갔다. 앞장 섰던 떡쇠가 자사를 보자 냉큼 붙잡아 꽁꽁 묶고는 시퍼런 장두칼을 목에 가져다 댔다. 뒤이어 놀란 당군이 쫓아왔지만 자사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보고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떡쇠는 당군을 노려보며 만약 한발자국이라도 다가오면 자사의 목을 찔러 버리겠다고 겁을 주었다. 같은 시간에 다른 농민들도 많은 인질을 붙잡아 놓고 있었다. 평소에 안면이 있는 고급 군관의 처자식들이었다 당군들이 덤비려고 하면, 그때마다 인질 한 명이 비명을지르며 눈앞에서 죽어 갔다. 너 죽고 나 죽자는 무지막지한 농민들의 행동에는 당군도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당군은 무지렁이 농민들에게 굴복을한 것이다. 그들은 당군을 무장 해제시킨 다음 큰 창고 3채에 몰아넣고 가두었다. 신바람이 난 농민 반란군은 내주성을 점령하자 생포한 당군 가운데서 500여 명을 오랏줄에 묶어 가지고 등주로 갔다. 등주는 그때로부터 29년 전, 발해를 공격하다 역공을 당해 발해군이 바다를 건너와 등주를 점령하고 자사를 잡아 죽인 내력이 있는 고장이기도 했다. 스스호 대장이 된 떡쇠가 당나귀를 타고 거들먹거리며 등주를 향해 앞장을 섰다. 등주성에서는 무지렁이 농민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자 처음에는 기가 막힌 듯 가만히 두고 보았다. 그러나 오랏줄에 묶여 오고 있는 내주 병사들을 보고는 이미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성문 앞에 이른 대장 떡쇠가 고함을 질렀다. "살고 싶으면 항복을 해라." "너희들이 누구냐?" "나는 고구려군 대장 떡쇠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군인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주 병사들을 수백 명씩이나 오랏줄에 묶어 가지고 왔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떡쇠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이 항복을 하면, 내 고구려왕께 잘 말씀드려 은전을 베풀겠다." 어쨌거나 이런 촌무지렁이들에게 만만히 항복을 할 당군은 아니었다. 그러나 등주성에서는 청주, 치주, 제주가 함락되고, 바로 길목에 있는 내주까지도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병사들이 겁을 먹고 우왕좌왕했다. 너도나도 야밤에 성을 타 넘어 줄도망을 쳤고, 남아 있는 병사들이야 자사 도사렴을 비롯해서 병들었거나 오갈 데 없는 병사 기백 명뿐이었다. 자사는 독안에 든 쥐 신세인 등주성에 기어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문을 열고 떡쇠 대장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내주와 등주는 농민 반란군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농민군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을지마사는 결단을 내렸다. 귀실우오에게 3천 병을 주어 내주성을 인수해서 지키도록 하고, 목도사에게도 3천 병을 주어 등주로 떠나 보낸 다음 자신은 떡쇠 농민군과 함께 청주로 향했다. 청주성에 도착하자 이 소식을 보고받은 이정기는 대단히 기뻐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두 성을 고스란히 손에 넣은 것이다. 더욱이나 등주는 위치상 해상 무역을 장악할 수 있는 요지로 천금의 값어치가 있는 땅이었다. 그러나 이정기도 떡쇠가 이끄는 농민 반란군을 만나보고는 적이 놀랐다 어떻게 저런 촌무지렁이들이 성을 두 개씩이나 빼앗을 수가 있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더욱 가관인 것은 농민군의 대장 떡쇠가 청주성에 와서도 생떼를 썼다. "약속대로 고구려왕을 만나게 해주시오." 떡쇠의 말에 의하면 자기의 선대가 옛날 고구려왕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꼭 왕을 만나야겠다고 부득부득 고집을 부렸다. 이정기는 딱했다. "우리는 아직 왕이 없소." "그럼 당신은 누구요?" "나는 대장이오." "나도 대장인데,,,,,,." 왕도 없고 제일 높은 사람이 겨우 대장이라는 말을 듣고는 떡쇠는 적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는 자기와 이정기가 똑같은 대장이기 때문에 동등한 위치라고 생각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떡쇠는 자기 딴에는 그럴듯한 제안을 내놓았다. "보아하니 당신이 왕도 아니라면, 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것이 어떻겠소? 나는 이래봬도 옛날 왕의 친척이기도 하니까." 말을 마친 떡쇠는 느닷없이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불렀다. 이어서 17, 8살쯤으로 보이는 오동통한 시골색시 하나가 떡쇠 곁으로 왔다. 떡쇠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이미 왕비감도 마련해 놓았소. 우리 인근에서는 참하고 예쁘기로 소문난 꽃분이오." 이정기는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했다. 그렇다고 두 주를 빼앗아온 떡쇠 무리를 냉대할 수는 없었다. 그때 곁에 있던 을지마사가 보기에도 딱했던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떡쇠 대장, 당신이 왕의 친척이라는 표시도 없잖소? 그러지 말고 우리 무술 시합을 해서 순서를 정합시다." 을지마사의 말을 들은 떡쇠의 입이 함박만하게 벌어졌다. 태어나서 지금껏 누구와 싸워서 단 한 번도 져본 일이 없는 떡쇠였다. 힘쓰는 일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그럼, 내가 1등을 하면 왕이 되는 것이오?" "암 그렇고말고요." 그날 오후 청주관내 연병장에서는 기묘한 무술시합이 벌어졌다. 이정기, 을지마사가 차례로 떠꺼머리 총각과 한 판씩 붙었다. 그러나 촌에서 멱살을 쥐고 싸움질하는 것과 무술 훈련을 받은 병사들의 실력은 겨루어볼 만한 가치도 없었다. 떡쇠는 힘으로는 아무도 당해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천하장사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술이 없었다. 힘만 믿고 씩씩거리며 덤비던 떡쇠는 말단 비장들에게까지도 번번이 나가떨어졌다. 떡쇠의 얼굴에서 코피가 터져 나왔다 기진맥진한 떡쇠는 그만 연병장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그때 꽃분이가 달려왔다. 꽃분이는 치맛자락으로 떡쇠의 코피를 닦아 냈다. "떡쇠야, 왕이고 대장이고 난 싫다. 우리 마을로 돌아가서 농사나 지으며 아들 딸 낳아 행복하게 살자." 이정기와 을지마사가 떡쇠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우며 위로했다. "떡쇠 대장, 그대의 힘은 정말 놀랍소. 기술만 배운다면 장차 큰 대장감이오." 이정기는 그날로 떡쇠를 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 떡쇠가 이끌고 온 농민군 중에서 쓸 만한 젊은이 2천 명가량을 골라 떡쇠 밑에 붙여 주고는 주야로 훈련을 시켰다. 그들의 이름마저도 떡쇠부대라고 지어 불렀다. 말하자면 그 지역 사정에 밝은 별동대인 셈이었다. 이제 이정기의 고구려군도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부상했다. 관할 5개 주에 병력도 4만 명으로 불어났다. 호랑이가 드디어 날개를 단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와 일전을 겨루어볼 수 있는 규모가 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정기의 세가 강해졌다는 사실을 당나라에서도 모를 까닭이 없었다. 당나라 대신들은 연일 이정기를 토벌할 논의를 했지만, 이정기에게도 천운이 따랐다. 당나라는 안녹산의 난리로 피폐해져서 군사를 동원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이정기 토벌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한편 이정기도 마음이 급했다. 당나라가 어수선할 때 영토를 더 확장해 힘을 길러 두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정기는 다시 한번 내키지 않은 붓을 들어 왕사례에게 편지를 썼다. 왕사례에게 두 번씩이나 찾아갔다가 모욕을 당한 쓰라린 기억이 있었지만, 그래도 큰일을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고구려인 고선지는 동관 전투에서 누명을 쓰고 개죽음을 당한 반면 왕사례는 승승장구해서 재상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그때 그는 당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왕사례님 불초 이정기가 글을 올립니다. 저는 그간 있는 힘을 다해 청 5개 주를 점거하고, 휘하에 4만 병력을 확보했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이 중국을 지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왕사례님이 도와 주신다면, 대사를 이루는 것은 불을 보듯 확실합니다. 지나간 수백 년 동안 중국인들에게 온갖 괴로움을 당했듯이 우리도 한번 그들을 지배하여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안에다 고구려 기를 꽂는 날, 우리의 조상 영령들도 지하에서 일어나 만세를 부를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도와 주십시오. 이정기 이정기는 서찰을 봉한 다음 사자를 장안으로 보냈다. 다음 순서는 통치 지역의 민심과 경제를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아직 나라를 만들기에는 시기상조였으므로 우선 임시 통치기구를 조직했다. 하남총군사 이정기 하남부군사 을지마사 청주자 장팔 치주자 고명영 제주자 고목 내주자 귀실우오 등주자 목도사 종사관 연개수근 별동대장 떡쇠 다음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포고령을 내려 곳곳에 방을 써 붙였다. 포고령은 백성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간단 명료했다. 1. 하남 5개 주 안에 사는 백성들은 누구나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2.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는 지휘 여하를 막론하고 즉시 사형에 처한다. 3.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도와 준다. 4. 고구려의 말과 풍속을 권장한다. 이렇게 해서 천민 취급을 받던 고구려 유민들은 일단 평민으로 격상된 셈이다. 하남 지방에는 중국인과 고구려인의 수가 반반 정도 살고 있었다. 이민족이 지배한다고 해서 중국인들이 두려움을 갖지 않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관리 단속을 철저히 했다. 이정기의 생각으로는 앞으로 그들을 고구려인으로 교화시켜 나갈 계획이었다. 이정기의 밀서를 가지고 왕사례에게 갔던 사자가 넉 달 만에 돌아왔다. 행여나 했던 왕사례의 답서는 없었다. 대신 사자의 얼굴에는 먹물이 들어 푸르뎅뎅했다. 왕사례는 사자의 얼굴에 먹물을 떠 답장을 보낸 것이다.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잔인한 짓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글자를 읽어본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討李正己-黨 이정기 일당을 토벌하겠다. 모두들 경악한 나머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동족에게서 철저하게 모욕당한 것이다. 이정기와 을지마사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과 동시에 서글픈 생각이 솟구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정기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내 왕사례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기어코 나라를 세우고야 말겠다.' 63년 전, 대조영이 핍박받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서쪽 동모산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 황제의 위에 오를 때 그는 이렇게 세 번을 외쳤다고 했다. "원수를 갚자, 민족의 원수를 갚자, 중국놈을 죽여서 민족의 철천지원수를 갚자." 하남 5개 주를 점거한 이정기도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대조영과 같은 맹세의 말을 토해 냈을까. 민족 지도자의 가슴속은 이렇듯 한으로 응어리져 있었다. 그러나 왕사례는 그해(7월)에 죽었다. 한때나마 고구려를 일으켜 보려던 마음을 품었던 고선지는 죽은 후 복권이 되고 그의 아들과 손자는 출세를 해서 이름을 날렸지만, 왕사례의 후손들은 초야에 묻혀 성명을 보존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가 생시에 동족에게 냉혹했던 데 대한 업보였으리라. 그해 하남 5개 주의 농사는 대풍이었다. 거기다가 당나라 시절처럼 관리와 토호의 수탈이 없어지자 중국인들마저도 태평성대를 만났다고 기뻐했다. 농민들은 누가 다스리든 잘살고 배 부르면 행복했다. 중국인들은 자발적으로 고구려 말을 배우고 풍속을 따르는 등 매사에 협조적이 되어 갔다. 그래서 이정기도 그들의 자제 가운데서 쓸 만한 인재가 있으면 관리로 등용했다. 이정기의 생활은 아주 근검했다. 청주에 온 이후에도 끼니에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반찬 한 가지 이상을 놓지 못하도록 했다. 자연히 밑에 사람들도 이정기의 생활을 따르게 되었다. 하남 5개 주의 군량이 넉넉해지자 그사이 군사도 6만으로 불어났다. 가급적 백성들에게 세금은 적게 받고, 모자라는 국고는 등주를 통한 발해와 신라의 교역에서 얻은 이익으로 충당했다. 그즈음 이정기는 발해와 신라에 공문을 보내 자신이 5개 주를 차지한 사실을 전하고, 동족끼리의 왕래와 교역을 권장했던 것이다. 안심이 된 발해와 신라인들이 모여들어 장사를 했고 이들이 가져온 상품들은 중국 내륙 지방으로 비싸게 팔려 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돌아가지 않고 따로 마을을 이루고 살기도 했다. 또 산동 반도 일대는 소금의 주생산지여서 많은 물량의 소금이 중국 내륙으로 실려 나갔다. 이정기의 5개 주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이정기 이하 장졸들이 가족을 영주에서 청주로 불러들였다. 을지마사는 무메와 2년 만에 해후를 했고 그 동안 딸 여옥과 아들 을지물무도 몰라보게 자라있었다. 을지마사는 막내아들 을지문성과는 처음으로 부자 상면을 했다. 이정기에게도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었다. 큰아들 납은 벌써 열여섯, 아버지를 닮아 기골이 장대하고 영특한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하루는 청주성으로 위구르인들이 서역산 호말 2천 필을 몰고 왔다. 위구르인들은 말장수로 위장해 허텐에서 청주까지 2만 리 길을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다. 어떻게 이곳 소식을 알았는지 허텐의 자숙 대인이 보낸 것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전투마로 서역산 호말을 제일로 쳐서 천금의 값어치가 있었다. 무메는 말잔등을 쓰다듬으며 두고 온 고향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무메는 그 중에서 한 마리를 골라 집으로 데려가서 자신이 직접 기르기로 하고 말을 끌고 온 위구르 사람들은 잘 대접한 후에 선물을 많이 주어서 돌려보냈다. 선물 속에는 손주 세 명의 초상화를 그려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아프게도 한 가지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대리에 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데려올 수가 없는 것이었다. 5천명이 넘는 그들을 적지인 당나라를 경유해서 하남까지 이주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종종 연락이 오갈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대리의 유민들이 나데 , 가한서한, 아소수미 ,고인목, 아불화도마, 창조무, 명 림오묘 등의 지도 아래 평화롭게 산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았다. 이제 하남 5개 주가 안정이 되고, 이정기가 다시 영토를 넓힐 시점에 이르렀다. 이듬해 봄, 이정기의 고구려군 4만 명은 먼저 청주성의 동남쪽에 있는 밀주(로 진군했다. 이제 고구려군은 결코 옛날 초라했던 시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군사들은 대오가 정연하고 보무도 당당했다. 포차, 운제, 충차 등의 공성무기가 줄을 이어 뒤따랐다. 치청 고구려군단의 면모는 총대장 이정기, 선봉장 청주자사 장팔, 유격장 별동군장 떡쇠 , 후군 종사관 연개수근, 참군 내주자사 귀실우오, 종사관으로는 등주자사 목도사가 참전했다. 을지마사는 후방에 남아 2만 병을 지휘해서 하남 5개 주를 관리하기로 했다. 이정기의 고구려군이 침입해 온다는 소식이 밀주에 전해지자 자사 사마광의 낯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 동안 치청이 고구려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에 떨며 전전긍긍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밀주의 군사는 1만 5천 명, 그 배가 넘는 고구려군은 밀주에 이르자 지체없이 성을 겹겹이 포위해 버렸다. 고구려군은 군세를 늘리자 처음으로 정공법을 썼던 것이다. 선봉장 장팔이 앞으로 나가 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자사 사마광은 듣거라. 이제 하남은 더 이상 당나라의 땅이 아니다. 오랜 당나라의 압제를 벗어나 하남 스스로가 독립하자는 것이다.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하면 모두 목숨을 보장하겠다. 우리 고구려군은 항복한 자를 결코 해친 적이 없다." 사실이 그랬다. 청주도독 유이춘만이 난중에 죽었을 뿐이고, 치주, 제주, 내주 등주자사는 모두 풀어 주어 제각기 살길을 마련해 주었다. 밀주자사도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 보니 하는 수가 없었다. 그는 고구려군이 쳐들어온다는 급보를 받고 이웃 기주성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기주자사 서후는 기주성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도와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쇠약해져 제몸 추스리기도 어려운 당나라 조정에서 구원병을 보내줄 리도 만무했다. 밀주자사 사마광은 무모한 싸움으로 많은 죄없는 생명을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날 오후 3시경, 성루에 백기가 꽃혔다. 이어서 성문이 열리고 고구려군이 입성했다. 자사 사마광이 옥쟁반에 인끈을 올려 이정기에게 바치자, 이정기가 얼른 단하로 내려가 사마광을 단상으로 끌어올려 예우를 했다. "사마 자사, 내 이렇게 하자는 목적이 아니었소." 사마광이 의아한 얼굴로 이정기를 쳐다보았다. "그대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현자라고 들었소. 그대가 밀주를 맡아 계속 다스려 주시오." 사마광은 이정기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소인은 항군지장,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장군께 신세를 진 것이오. 농촌에 들어가 농사나 지으며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니오. 이 난국을 바로잡으려면 그대와 같은 현인이 필요하오. 그대가 정 싫다고 하면 나는 성을 되물리고 청주로 돌아가겠소." 그러나 사마광도 완강했다. "우리를 도륙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의 은혜를 베푸는 것은 소신으로서는 감당키 어렵습니다." "내가 거병한 것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자는 것이오. 그대가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부탁을 하는 것이니 더 이상 사양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생각되오." 마침내 사마광은 감격하여 이정기의 후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밀주는 사마광을 다시 자사로 임명했다. 그날 밤이 늦도록 축하연을 베풀어 인솔하고 온 고구려 병사들과 새로 얻은 밀주 병사들을 위로했다. 다음은 밀주의 서남쪽에 있는 기주를 공격할 차례였다. 밀주에서 이틀을 쉰 고구려군은 다시 기주를 향해 출발했다. 사마광이 성문 밖에까지 따라나와서 이정기에게 한마디를 했다. "해주-理)에는 제가 따로 연락을 해놓겠습니다." "해주에 연락을요?" "예,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한편 기주자사에게도 고구려군이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기주자사 서후는 젊어서 한림학사를 지냈던 인물로 계교도 있고 당찬 데가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정기의 고구려군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사전에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기주를 향해 1킬로미터쯤 행군했을 때 바람도 없는데 난데없이 군기가 부러져 두동강이 났다. 이정기가 괴이쩍게 여겨 술사를 불러와 점을 치게 했다. 술사는 한동안 고개를 좌우로 틀고는 대답이 없었다. 점괘가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술사는점통을몇 번 더 흔들고나더니 하는 말이 오늘은 일진이 불길하니 출병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정기는 미신은 믿을 것이 못 된다며 그 말을 내치고 행군을 계속해 나갔다. 밀주에서 기주로 가는 길에는 기주 조금 못 미처 마령이라고 하는 고개가 있었다. 고개는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계곡이 길고 수풀이 우거져 대낮에도 호랑이가 출몰한다고 해서이 고개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기다렸다가 열댓 명씩 떼를 지어 다녔다. 고구려군이 마령에 이르러 주변을 살펴보니 겉보기에는 대단치 않지만 안쪽의 산세가 만만치 않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살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장팔 장군, 아무래도 복병이 있는 듯하오." "그럼 , 어떡할까요?" "일단 척후대를 보내 봅시다." 떡쇠의 별동대가 척후대로 선발되었다. 만약 복병이 없으면 재 너머에서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기로 했다. 떡쇠의 별동대는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면서 재를 넘었다. 30리 길을 가면서 수상한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아 약속대로 연기를 피워올렸다. 그제서야 이정기가 이끄는 본군이 움직였다. 그러나 잠시 후의 일을 어찌 알았으랴 이정기의 고구려군이 죽음의 함정에 빠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본군이 마령 중간쯤을 지날 무렵이었다. 선두에서 느닷없이 병사들의 아우성이 들렸다. "불이야?" 이정기가 놀라서 앞을 바라다보니 마령 중간쯤에서 난데없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불길 사이로 좽과리와 징 소리가 요란하다. 이정기는 모골이 송연했다. "아차! 큰일났구나." 이정기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전군 후퇴하라!" 군사들이 아우성을 치며 되돌아서는데 어느 사이 퇴로에서도 징소리, 꽹과리 소리가 어지럽게 나며 불길이 치솟는 것이 아닌가. 불길은 마른 수풀을 태우며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불길 사이에 낀 고구려군은 진퇴양난 꼼짝없이 타 죽을 위기에 처해 버렸다. 죄가 많은 기주자사 서후가 땅굴을 파서 복병을 숨겨 놓은 후 그 위에다 나뭇가지와 가랑잎으로 위장을 해놓아 떡쇠 척후대가 발견하지 못하고 그만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불길로 인해 주변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병사들이 열기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훌훌 뛰자 마령은 일시에 아비규환으로 변해 버렸다. 그때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나 이정기다. 내 뒤를 따르면 모두 산다." 이정기가 불길을 뚫고 돌진해 나가자 군사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뒤이어 또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나 장팔이다. 나를 따르라." 장팔은 군사들을 이끌고 다른 방향으로 혈로를 뚫고 나갔다. 이정기가 뒤따르는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불길을 피해 2킬로미터쯤 갔을까. 또 앞에서 불길이 무섭게 치솟았다. 전면의 불길은 사나운 기세로 고구려군을 포위하며 좁혀 왔다. 이정기는 불길에 갇혀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아! 하늘은 이정기가 꿈을 펴보기도 전에 무참히 깨뜨리고 마는가?" 그러나 분초를 다투는 절박한 상황에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정기의 갈라진 목소리가 다시 마른 공기를 찢었다. "일렬로 서서 땅을 파라 " 고구려 병사들은 손가락에서 피가 나도록 땅을 후벼팠다. 뒤이어 또다시 이정기의 명령이 떨어졌다. "맞불을 질러라." 이번에는 고구려군 쪽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불길은 땅을 판 곳에서부터 앞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해서 다가오던 불길과 맞부딪쳤다. 두 불길은 한동안 어울려 허공중에서 춤을 추더니 이내 꺼져 버렸다 '이젠 살았구나!' 이정기의 입에서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그것도 잠깐, 뒤이어 다시 눈앞에 위급한 사태가 벌어졌다. 난데없이 한떼의 당군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던 것이다. "당 기주 유격장 무도다. 역적 이정기는 어딨느냐?" 기진맥진한 군사들은 겁에 질려 뿔뿔이 도망을 쳤다. 이정기는 하는 수 없이 앞만 보고 달아났다. 돌아보니 자기를 따르는 병사는 겨우 500여 명, 뒤에서 쫓아오는 기주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점차 가깝게 들려 왔다. "이정기가 저쪽으로 도망간다." "저자만 죽이면 싸움이 끝난다." 이정기가 그렇게 1킬로미터쯤 쫓기고 있을 때였다. 또 한떼의 당군이 불쑥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너를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기주자사 서후가 여기 있다." 서후는 큰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어 이정기를 내려쳤다. 이정기의 칼이 날쌔게 서후의 칼을 맞받았다. 그러나 앞에도 적병, 뒤에도 적병,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정기는 다시 몸을 획 돌려 북쪽을 향해 줄달음을 쳤다. 서후와 무도가 합세를 해서 이정기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여차하면 기주 군사들에게 잡힐 무렵에 조그만 언덕이 나타났고 언덕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다. 이정기는 숲 속으로 들어가 언덕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정기의 입에서 또다시 절망적인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눈앞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곳의 지형을 잘 아는 기주자사 서후가 이정기를 절벽이 있는 곳까지 유도해 갔던것이다. "아! 하느님 , 끝내 저를 버리십니까?" 그때까지 이정기를 따르는 병사는 겨우 200여 명, 겹겹으로 포위한 당군은 5천여 명이었다 드디어 이정기에게 최후가 온 것이다. 이정기는 칼을 움켜쥐고 부르짖었다. "고구려인답게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자." 병사들도 마지막을 의식했던지 결사적으로 칼과 창을 꼬나쥐었다. 다행히 절벽 입구는 폭이 좁았다. 이윽고 쏟아져 들어오는 당군과 고구려군의 접전이 시작되었다. 이정기와 고구려 병사들은 최후까지 싸웠다. 앞에서 싸우던 병사가 죽으면 다음 병사가 그 시체를 밟고 대적을 했지만 시시각각 죽음의 시간으로 치닫고 있었다. 노도같이 덤비는 당군이 단숨에 삼켜 버릴 것 같았는데, 의외로 싸움은 질질 끌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당군을 더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고구려 병사들의 생사를 초월한 의지가 절벽의 비좁은 목을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윽고 이정기와 고구려 병사들의 죽음의 순간이 왔다. 그때까지 살아 남은 병사들이라야 기껏 30여명. 이정기가 당군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자결을 하려고 칼끝을 목에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이정기 장군님-." 멀리서 희미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정기의 천명이 끝나기에는 아직 일렀던가. 장도를 거머쥔 이정기의 손끝이 멈칫했다. 그리고 주위를 살폈다. 줄기차게 밀어붙이던 당군의 배후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이정기 장군님 , 내가 왔어유. 떡쇠 왔어유," "떡쇠가?" 분명히 떡쇠의 목소리였다. 이정기와 남은 고구려 병사들은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았다. 달려드는 당병을 미친 듯이 칼로 베고 창으로 찔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주 병사들의 공격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정기는 이제 역공격을 하며 사지를 헤쳐 나왔다. 당군들은 떡쇠의 별동대를 당해 내지 못하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이정기는 틈을 주지 않고 떡쇠의 별동대와 함께 당군을 추격했다. 마악 산등성이를 넘어섰을 때였다. 앞을 바라다보니 또 2만여 명의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짓쳐 오고 있었다 이정기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그사이 몇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이제는 실낱같은 희망도 없었다. 이정기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제는 하늘의 뜻대로 목숨을 버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절망한 이정기는 부릅뜬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장탄식을 했다. "아 아! 단군님, 주몽님. 어찌하여 고구려 백성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버리십니까?" 이정기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뜻밖에도 사태가 급전되고 있었다. 언덕을 내려오고 있던 군사들과 쫓겨가던 당군이 무섭게 엉켰다. 2만여 명의 군사들은 당군이 아니라 홀연히 나타난 장팔의 군사였던 것이다. "와 아-" 떡쇠가 벌떡 일어나 냅다 소리를 지르며 내달렸다. 전세는 순식간에 골짜기 안에 든 당군을 양쪽 언덕의 고구려군이 겹겹이 포위한 형국으로 돌변했다. 고구려군은 포위망을 좁혀 당군을 살상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힘이 솟구친 듯 이정기가 외쳤다. "장팔 장군, 저 붉은 전포의 무도를 맡으시오. 나는 금색투구의 서후를 대적하겠소," 이정기는 난군을 헤치고 서후에게 달려들었다. 서후도 이정기를 알아보고는 맞대결을 해왔다. 두 개의 장도가 '쨍' 소리를 내며 허공 중에 불꽃이 튀었다. 이어서 이정기의 칼이 서후의 옆구리를 찌르자 서후의 칼이 맞받았다. 이정기가 칼을 다시 쳐드는 찰나 서후의 칼이 틈을 노리고 이정기의 앞가슴을 찔렀다. 이정기가 몸을 살짝 비키며 발로 서후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불시의 육탄공격을 받은 서후가 넘어질 듯 움찔하더니 다시 칼을 들어 이정기의 머리를 내리쳤다. 하마터면 이정기의 몸이 두쪽이 날 순간이었다. 서후의 무예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그러나 이정기가 한수 위였다. 이정기는 서후가 칼을 내려치는 순간을 이용해 날쌔게 서후의 몸을 파고들며 두 다리를 밀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선 이정기의 칼이 번쩍 하고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서후를 향해 마른 공기를 갈랐다. 그것이 서후의 마지막이었다. 이정기가 피 묻은 칼을 들고 두리번거리는데 장팔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장팔은 그사이에 무도의 목을 베어 창끝에 매달아 휘두르고 있었다. 싸움은 오래지 않아서 끝이 났다. 그날 1만여 명의 기주병들이 몰살당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시체들로 온 계곡을 뒤덮었다. 전쟁터의 참상을 한동안 멍한 시선으로 바라다보고 있던 이정기, 장팔, 떡쇠, 귀실우오, 목도사 등이 한곳에 모였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그날따라 노을빛이 한스럽게 붉었다. 마치 많은 영혼들이 승천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죽은 자와 산 자는 가는 길이 달랐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지만, 산 자에게는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려군을 정렬하여 따져 보니 죽고 실종된 자가 4천여 명, 그들의 대부분은 불에 타서 죽었거나 기주군의 창칼에 죽임을 당했을 터였다. 이정기가 중국을 무너뜨리겠다고 하남으로 진군한 이래 최대의 사상자를 낸 고전이었다. 군사들을 풀어 고구려군의 시체를 거둬 땅에 묻도록 했다. 수습을 끝낸 고구려군은 기주성을 향해 소리없이 밀려갔다. 이미 초저녁이 되어 밤길을 가야만 했다 이처럼 고구려군이 강행군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가도 없는 무인지경의 마령에서 둔병을 할 수 있는 천막도 군량도 모조리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허기진 병사들을 끌고 기주성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고구려군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단 두 가지, 그날 밤 안으로 기주성을 쳐 빼앗거나 아니면 제각기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도리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기주성을 향해 가면서 이정기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떡쇠 대장, 어떻게 그 시각에 나타날 수가 있었지?" 떡쇠는 어깨를 으쓱대며 자랑스럽게 무용담을 털어놓았다. "마령을 넘어서 연기를 피우자마자 뒤에서 불길이 솟았어요. '아뿔싸! 큰일났구나' 하고 번쩍 정신이 들었죠." 떡쇠는 그간 훈련을 통해 장수의 몫을 해낼 정도로 기량이 향상되어 있었다. "별동대를 이끌고 다시 마령으로 급히 달려와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갔지요. 싸우는 모양이 한눈에 죄다 내려다보이더군요. 참 재미나던데요." 그때 장팔이 이정기 모르게 순진한 떡쇠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장팔 장군, 왜 그래요?" 떡쇠가 말을 하다 말고 벌컥 역정을 냈다. "이야기나 마저 하라구." 장팔이 시치미를 떼면서 떡쇠를 윽박질렀다. "아이참, 지금 이야기를 하잖아유. 그런데 기주군에게 죽을 등 살 등 쫓기는 우리편 군사들이 있었는데 보기에도 참 아슬아슬하더라구요. 자세히 살펴보니 아 글쎄, 이정기 장군님이잖아요. 후닥닥 산을 내려와 기주군의 꽁무니를 들이쳤지요. 기주군놈들이 이 떡쇠 앞에서는 맥도 못 추더라구요." 천하장사인 떡쇠가 마구 휘둘러댄 도끼에 맞아 즉사한 기주병들이 아마도 수백 명은 될 듯싶었다. "마령을 넘으면서 당군의 땅굴도 못 봤단 말야?" 장팔이 다시 한 번 비아냥거렸다. "왜 항상 나만 가지고 그래유? 안 보였으니까 못 본 것 아니유." 사실 수풀 속에 교묘하게 위장을 해놓은 땅굴을 찾는다는 것은 산을 이 잡듯 뒤지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정기가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그만들 하고, 그런데 장팔 장군은. .. ." "저야 간단하죠. 불길이 타들어 왔을 때,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뚫고 나갔으니까요." "뭣이라구?" 이정기 장군이 화들짝 놀랐다. 장팔의 설명을 들은 이정기는 그제서야 무릎을 쳤다. 순간의 판단 착오로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장팔처럼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불길을 뚫었더라면, 불길을 한 번만 피하면 되었다. 그러나 자기는 경황 중에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탈출을 했기 때문에 계속 불길에 횝싸여결국 목숨까지 위태로워진 절대절명의 위기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이정기의 입 속에서 뉘우침의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음-그래서 ?" "불길을 뚫고 나오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기주군 2천 명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대장은 종사관 이도렴이란 자였지요. 거 있지 않습니까. 대장만 죽이면 뿔뿔이 달아나는 중국인들의 겁쟁이 기질 말입니다. 무작정 달려들어 이도렴을 창으로 거꾸러뜨렸지요. 그런데 이정기 장군님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기만 하고, 그래서 이곳 저곳으로 찾아다니다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돌아가 보니 그곳이 바로 계곡이었습니다." 그날의 싸움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먼데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때 선두에 섰던 향도가 돌아와 기주성에 이르렀다고 알려 왔다. 고구려군은 미리 준비한 게 있었다. 기주성 군복으로 위장한 50여 명의 고구려군이 통곡 소리를 내며 성문 밑으로 다가갔다. 뒤이어 성문 위에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예, 엉엉 자사님이....." "자사님이?" "예 , 난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성문 파수병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말을 듣자 놀라서 웅성거렸다. "뭣이 라고? 다시 천천히 말을 해보아라." "자사님이 돌아가셔서 시신을 수습해 이렇게 모시고 왔습니다." "기다려라." 성안이 금세 소란해졌다. 조금 후에 파수병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수성 책임을 맡고 있던 기주성 참군 왕룽을 데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이어서 왕룽이 명령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관솔불을 밝혀라 " 너울거리는 불빛 속에 들것에 실린 자사 서후의 푸르뎅뎅하게 변한 얼굴이 드러났다. 서후의 시신이 분명했다. 드디어 참군 왕룽의 명령이 떨어졌다. "어서 성문을 열고 모셔들여라." 이윽고 성문이 열리고, 시신을 떠멘 군사들이 재빨리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으로 들어간 군사들은 하나같이 행동이 날래고 싸움에 능한 자들이었다. 그 가운데는 장팔과 떡쇠도 끼어있었다. 성안에서 잠시 비명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뒤이어 고구려의 대병이 소리없이 성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기주성을 차지한 이정기는 제단을 만들었다. 이번 싸움에서 죽은 4천여 명의 고구려 군사를 위한 것이었다. 제단 앞에 꿇어앉은 이정기는 향을 사르고, 술을 올린 다음 가슴을 치며 한식경이나 통곡을 했다. 자기의 잘못으로 고인이 된 고구려 군사들을 이렇게나마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병사들도 너나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어서 기주성 관리들의 치죄에 들어갔다. 이정기가 단상에 앉자, 포박을 당한 기주성 관리들이 줄줄이 끌려 들어왔다. 자사 서후가 대항을 하고 고구려 병사들이 많이 죽었으니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라고 체념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정기가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들의 포박을 풀어 주어라." 뜻밖의 말이 떨어지자 기주성 관리들은 어리둥절한 채 고개를 들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내가 고구려를 위하여 싸웠듯이 , 저들은 기주성을 위해 충성을 다했을 뿐이다." 그때 수성대장 참군 왕룽이 머리를 조아렸다. "저희들의 목숨을 살려 주신 은혜 평생을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이후 저희들이 어디를 가든지 이정기 장군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왕룽 장군, 내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무엇이든지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자사 서후는 비록 나와 대적해 싸웠지만 훌륭한 장수였소. 내 그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장사라도 후하게 지내주고 싶소. 부족한 것이 있으면 내가 도와 주리다." 이정기의 의외로운 말을 듣자 단하에 꿇어앉아 있던 기주성 관리들은 모두들 감격해서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눈물을 흘렸다. 이정기는 군사들이 몹시 지쳐 있기 때문에 기주에서 3일을 쉰 다음 청주로 회군하기로 했다. 기주성은 당분간 고명영에게 5천기를 주어 맡겼다. 4일째 되는 날 아침, 마악 성을 출발하려는데 해주에서 사신이 왔다는 전갈이 왔다. 사신은 밀봉 서찰을 이정기에게 바쳤다. 해주자사 사마상이 항복을 한다는 문서였다. 이정기는 밀주를 떠날 때 자사 사마광이 하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해주자사 사마상은 사마광의 친아우였던 것이다. 이정기는 대단히 기뻤다. 해주는 멀기도 했지만 힘에 부칠 것 같아서 이번 작전 계획에서 빠져 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해주는 황하의 입구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충지. 해주만 틀어막고 있으면 강남 지방 일대의 숨통을 조이기에 충분했다. 이정기의 고구려군은 말머리를 남쪽으로 향했다. 해주성에 이르러 자사 사마상을 위로하고 청주로 귀환하기 위해 다시 기주를 거쳐 밀주로 돌아왔다. 밀주에 도착해 보니 뜻밖에도 제주에서 급보가 와 있었다. 급보의 내용을 읽어본 이정기는 예기치 않은 사태에 적잖이 당황했다. '어떻게 해서 을지마사가 체주와 덕주에 가게 되었단 말이냐?' 급보를 가지고 온 제주 군사는 자초지종을 알렸다. 이정기가 떠난 후 제주성이 당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당나라 조정에서 이정기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안되겠다 싶었는지 체주와 덕주 자사에게 공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체주와 덕주의 당군 2만의 공격을 받자 제주를 지키고 있던 귀실우오는 5천 병을 가지고 꿋꿋이 성을 지켰으나 당군이 더 불어날 것에 대비해서 청주성의 을지마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을지마사가 1만 명을 이끌고 제주성에 도착하여 보니 당군은 그때까지도 포위를 풀지 않고 있었다. 당군은 자기네들의 병력수가 많은 것만을 믿고 을지마사군에게 덤벼들었다. 을지마사가 당군을 맞아 한참 싸우고 있을 때 그때까지 성문을 닫고 있던 귀실우오가 갑자기 쏟아져 나와 협공을 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당군은 달아나고 을지마사는 뒤쫓기 시작했다. 당군은 황하를 건너 도망치기에 바빴다. 을지마사도 황하를 건너고 달아나는 당군을 쓰러뜨리며 뒤를 쫓아, 어느덧 덕주성에 이르러 성을 포위했다. 3일째가 되자 당군은 덕주성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지 성을 내주는 대신 퇴로를 열어 달라고 애걸을 해왔다. 그러지 않아도 을지마사는 하남 일대의 수비 책임자로 너무 멀리 출병을 했다는 불안감이 있었으므로 승낙을 했다. 그날 밤 덕주의 당군들은 군량미를 모두 불사르고 동문을 열고 줄도망을 쳤다. 제주에서 온 병사의 말에 의하면 여기까지는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을지마사가 다음날 회군을 하려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도망갔던 덕주의 당군이 이웃 위박의 구원병까지 합쳐 3만의 대병력을 이끌고 다시 나타났다. 그들이 성을 포위해서 공격하는 바람에 을지마사는 지금 덕주성 안에 갇혀 굶주리며 수성중이라고 했다. 공성군과 수성군의 위치가 일시에 뒤바뀐 것이다. 을지마사가 곤궁에 처해 있는데도 이웃 치주와 제주에서는 병력이 모자라 구원하러 갈 형편이 못 된다고 했다. 보고를 듣고 난 이정기는 웃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자고로 전쟁이란 의외의 변수가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전쟁은 승자를 탄생시키는 반면 패자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정기는 청주로 회군할 계획을 변경시켜 덕주로 달려갔다. 제주를 지나 황하에 이르자 배가 없었다. 즉시 특공대를 조직해서 뗏목을 만들어 군사들을 도강시켰다. 덕주는 황하에서 멀지 않았다. 이정기가 황하를 건넌 후 바라다보니 덕주성을 에워싼 당군은 족히 3만은 넘어 보였다. 이정기는 덕주성 가까이 가기는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고구려군은 여러 날의 원정으로 몹시 지쳐 있었다. 이런 병사들을 데리고 무리하게 싸우다가 혹시 잘못되면 패전할 위험성이 있었다. 황하를 뒤로 배수진을 치고 싸우는 꼴인데 배수진의 형세란 곧 퇴로가 없기 때문에 전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정기는 병사들을 시켜 동아줄을 만들도록 했다. 동아줄을 50자 정도로 잘라서 양쪽 끝을 허텐 자숙 대인이 보내준 호마 두 마리에 각각 묶었다. 장팔이 궁금한지 이정기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시렵니까?" "두고 보시오, 장인이 보낸 말이 사위를 구할 것이오," 이렇게 20여 채가 완성되자 날랜 군사들을 뽑아 횃불을 들게 했다. 그러고는 군사들로 하여금 횃불로 말들을 놀라게 했다. 아니나다를까 횃불에 놀란 말들이 앞발을 들고 하늘로 곧추 일어서더니 이어서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군사들은 뒤를 따르며 계속 말을 앞으로 몰아 댔다. 말들은 돌발 사태에 어쩔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당군 속을 종횡무진으로 달렸다. 당군은 말과 동아줄을 피하느라고 땅에 엎드리는가 하면 이리저리 내몰리는 바람에 전쟁터는 일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때를 놓칠세라 이정기의 고구려군이 짓쳐들었다. 아사지경에 빠진 을지마사군도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와 마지막 힘을 내어 도망가는 당군을 추격했다. 이정기는 추격을 을지마사에게 맡기고 곧바로 체주로 향했다. 이정기의 예측대로 체주는 전 병력을 덕주에 집중시키느라 빈 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겨우 500여 명이 수성을 하고 있어 성을 뺏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장팔과 연개수근이 군사들을 끌고 성을 타 넘어가 당군을 모조리 생포해 버렸다. 드디어 싸움이 끝났다. 체주와 덕주는 목도사와 연개수근에게 각각 1만 명씩을 주어 서로 도와 가며 지키도록 하고 고구려군은 회군길에 올랐다. @[중국의 심장부를 공격하라]@ "이정기 장군, 내가 실수를 해서 미안하오." 을지마사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이런 일을 당해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정기가 껄껄 웃었다. "을지 장군 덕택에 생각지도 않았던 성을 두 개나 얻지 않았소." 고구려군의 1차 원정은 꼬박 두 달이 걸렸다. 우여곡절을 겪고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해주, 체주, 덕주 3성을 얻은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이로써 10개 주를 확보한 이정기는 드디어 중국의 심장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정기가 장악한 넓이는 평로까지 합쳐 한반도 전체의 두 배에 이르고 인구는 130여만 호로 패망 당시 -만 호였던 고구려보다 훨씬 큰 나라가 되어 있었다. 춘추필법이라고 해서 자기네들의 수치스런 역사를 아예 빼버리거나 축소해서 기록하는 중국의 정사, 당서와 (자치통감)에도 이 사실만은 숨길 수가 없었던지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청주로 돌아온 이정기는 먼저 제단을 만들어 이번 원정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위령제를 지냈다. 다음, 사람을 보내 유가족들을 일일이 위로하고 못 사는 집에는 양식을, 생활이 넉넉한 집은 세금을 감면시켜 주었다. 이렇게 또 1년이 지나자 이정기가 지배하는 하남 일대는 중국에서 가장 잘사는 고장으로 변하고, 인심도 넉넉해져서 밤에 문을 닫고 자는 집이 없을 정도였다. 하남의 부에 힘입어 이정기가 양성한 군인만도 20만 명. 원정에 즉각 동원할 수 있는 강병만 추려도 1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 정도의 군세라면 중원을 넘보고 장안으로 쳐들어가서 당나라와 한판 승부를 걸어볼 만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중국 내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소식은 금방 요동의 평로로 건너갔다. 그리고 훗날 이정기에게 악의 씨앗이 되는 일단의 사람들이 부나비처럼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서 첫번째로 건너온 사람은 이정기가 쿠데타를 일으켜 평로절도사의 자리에 앉혀준 후희일이었다. 그는 성격이 사치한데다가 터무니없이 많은 불사를 일으켜서 국가의 재정을 탕진한 바람에 평로가 피폐해지자 이정기가 피땀 흘려 개척해 놓은 하남 일대가 욕심이 났던 것이다. 청주성에 당도한 후희일은 마치 자기가 하남의 제왕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즉 초기에 평로군 2만 명이 건너와서 장악한 땅이니 자신의 영지라는 논리를 앞세웠다. 이정기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을지 장군,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을지마사도 시원스럽게 대답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만약 그를 제거하면 세상 인심은 이정기가 집안의 윗사람도 몰라보는 부도덕한 인간으로 낙인 찍을 것이었다. "이 장군님, 그냥 두고 봅시다. 머지않아 스스로 제 무덤을 팔 것이오." 후희일은 이쪽에서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청주자사 관내를 독차지하고 들어앉아 제장들을 지휘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정기와 함께 온갖 고생을 하면서 대업을 이룬 장수들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 주인 행세를 하는 후희일의 행동에 속이 뒤틀렸다. 그래서 그들은 후희일이 명령을 하면 대답도 않고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았다. 후희일은 자기를 떠받들지 않는 이정기가 괘씸했다. 그래서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루는 후희일이 평로병마절도사의 직함으로 청주성의 병사들을 한곳에 집결시켰다. 청주성 동문 앞뜰에는 자그마치 2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영문도 모르고 모여들었다. 잠시 후 후희일과 평로에서 그를 수행하고 온 종자 몇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윽고 후희일은 병사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준비했던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정기라는 자를 치죄해야겠다 " 단도직입적으로 서두를 꺼낸 후희일은 이어서 이정기의 죄상을 낱낱이 엮어 냈다. "이정기는 애초에 오갈 데 없는 빈한한 놈인데 내가 평로절도부 비장을 시켜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등을 돌리니 은혜를 모르는 철면피한 인간이다." 후희일의 몸 안에는 중국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말 속에는 촌철살인을 할 수 있는 교활함이 담겨 있었다. "하남의 청을 얻은 것도 따지고 보면 나의 군사 2만 명 덕분이었다. 당연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데도 지금껏 자기의 것으로 행세를 해왔으니 인면수심 을 한 파렴치한 놈이다." 후희일의 말 어디에도 이정기가 죽음을 각오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아무 공로도 없는 자기를 절도사 자리에 앉혀 주어 고맙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대놓고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말을 들은 이정기는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그는 장도를 거머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 그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을지마사였다. "이정기 장군님,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저런 자와는 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사이에도 후희일의 열띤 장광설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간에 이룩한 업적을 높이 찬양하는 바입니다. 앞으로 불한당 이정기를 추방하고,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이 하남을 다스릴 것이오, 여러분들이 세운 공로를 참작해서 대우를 최고로 해줄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하는 바요." 후희일은 이쯤에서 박수갈채가 요란스럽게 터져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사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뭔가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은 후희일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하남의 일등 공로자 여러분! 나 병마절도사 후희일은 여러분들과 함께 이 하남을 다스려 나갈 것이오, 찬동하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 그러나 아무리 휘둘러보아도 손을 드는 병사가 없었다. 대신 낮고 장엄한 목소리가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후희일은 다급한 나머지 악을 써댔다. "여러분,, ,.,, 여러분,,,,,,." 그의 말은 병사들이 지르는 소리에 파묻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이어서 예기치 못한 돌발 사태가 벌어졌다. 병사들이 웅성거리며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희일 일당을 에워싸 버린 것이다. 노한 병사들은 고함을 지르며 후희일을 윽박질렀다. "너야말로 은혜를 모르는 놈이다?" "후희일아, 남의 것을 탐내는 이 파렴치한 놈? 병사들은 주먹을 쥐고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한발짝씩 다가섰다. 그대로 놔두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이정기와 을지마사가 흥분한 병사들을 말리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후희일은 성난 군사들에 의해 요절이 났을 것이었다. "여러분! 이성을 찾으시오. 후희일을 죽이는 것은 곧 나를 죽이는 것이오" 병사들은 한참 버티고 서서 후희일과 이정기를 바라보다가 흩어졌다. 그날 이정기와 을지마사가 간신히 병사들을 무마시킨 덕분에 후희일은 그나마 목숨을 건졌다. 후희일은 그날 밤으로 청주성을 탈출, 그 길로 배를 타고 평로로 도망쳤다. 그러나 평로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나서 또 한번 절망해야만 했다. 후희일이 하남에서 당한 봉변의 내막이 전해지자 드디어 평로의 군사들도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평로에서마저 후희일을 축출해 버렸다. 이 소식을 접한 당나라 조정에서는 이정기가 자기네들에게는 무서운 적이지만 회유의 차원에서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 청주자사, 요양군왕, 중서문하평장사와 같은 최고의 벼슬을 그에게 내렸다. 남의 나라에 벼슬을 내리는 당나라 조정의 일방적인 처사는 웃기는 일이었지만,,, 나타난 악의 씨앗은 후희일과는 색깔이 달랐다. 후희일이 생트집을 잡으며 남의 집 안방을 넘보다가 쫓겨간 것이라면 그들은 감언이설로 이정기를 두고두고 괴롭혔다. 바로 이정기의 사촌들인 이유, 이사진, 이장경이 그들이었다. 이정기에게는 숙부가 한 분 있었는데 형제간인데도 생각이 천지 차이였던지, 이정기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했던 반면 작은아버지는 당나라의 문물에 젖어들어 중국의 시가를 지어 읊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의 큰아들 이유는 어렸을 적부터 직접 아버지에게서 시를 배워 제법 당시의 흉내도 내고. 풍류도 아는 유생이었다. 이들이 사촌 이정기가 하남 일대를 차지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평로에서 건너와 빌붙기 시작했다. 이유는 나이로 이정기의 형이 되었지만 이사진과 이장경은 동생뻘이었다. 그들은 이정기를 만나자마자 문인답게 한껏 과장된 치하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말에는 중국식의 유식함이 철철 넘쳐 있었다. "정기 아우, 그대가 이룩한 공로는 삼황오제 이래 처음이네. 대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制約하고나 견줄 수 있을까." 이사진이 질세라 아첨을 하고 나섰다. "우리 이씨 집안의 큰 복이오, 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충성을 다하겠소." 막내 이장경도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형님 , 무슨 일이든지 시켜 주십시오.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이정기는 의리 있는 인물이었다. 사촌들의 언행이 지나치다 싶었지만 바다를 건너 하남까진 찾아온 그들을 냉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청주, 기주, 밀주의 종사관 자리를 마련해 주어 정착시켰다. 다행인 것은 그들이 어려서부터 중국인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 그랬던지 글도 잘하고, 친화력도 있어서 하남 내 중국인 백성을 통치하는 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정기도 그만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마음을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악의 씨앗은 자라고 있었다. 훗날 그들 형제가 절대절명의 순간에 어떻게 이정기를 배반하고 괴롭혔는가는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즈음 이정기는 관내를 순시하는 것으로 일과를 보냈다. 농민들이 농사짓는 것을 장려하고, 바다에서는 소금을 굽고, 해상무역을 독려하고 다녔다. 이정기는 논두렁에서 농민들과 마주앉아 농주도 나눠 마시고, 염전에서는 소금가마도 손수 져 나르는 소탈한 성격이었으므로 백성들은 이정기가 나타나면 언제나 친부모 대하듯 했다. 하남에서 남쪽으로는 무령이 있었고, 서북쪽은 위박() 그리고 북쪽에는 성덕 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쯤 이정기의 외아들 이납은 어느덧 스무 살로 훤칠한 대장부가 되어 성덕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덕주의 참군으로 종사하고 있었다. 을지마사의 큰아들 을지문무는 18살로 밀주자사 사마광 밑에 수련을 쌓고 있었고, 16살 난 둘째 문성은 어머니 무메의 요청도 있고 해서 청주에 머물러 부모 밑에서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를 닮아 콧날이 오뚝하고, 눈매가 서늘해 미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큰딸 여옥은 등주자사 목도사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서 벌써 아들 하나를 두었다. 무메도 어느덧 마흔 살이 가까웠다. 애들을 다 기르고 난 무메에게는 가끔씩 밤잠을 설치는 허전함이 찾아들었다. 아이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남편 을지마사도 하남의 2인자 지위에 걸맞게 밤낮으로 바빠 전처럼 다정하게 대해줄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무메를 슬프게 한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그 동안 부모를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기르던 서역산 호말이 죽은 것이다. 호말은 서쪽을 바라다보며 길길이 뛰면서 울부짖더니 그대로 고꾸라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무메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무메는 그날 밤 남편 을지마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오래 전부터 마음속으로만 간직해 왔던 말을 꺼냈다. "여보,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친정 부모님께 한번 다녀와야 할까 봅니다. 까딱하다가 생전에 부모님 얼굴도...... " 무메가 위구르를 떠나 온 지도 햇수로 20년이 흘렀다. 을지마사는 말없이 침묵에 잠겼다. 청주에서 위구르는 2만 리도 넘는 길 가도 가도 지평선과 모래언덕만 보이는 황토와 사막길을 석달은 가야 했다. 거기다가 안녹산 난리를 틈타서 티베트가 다시 위구르 지방을 넘보고 있었다. 아녀자 혼자서는 목숨을 걸지 않고서야 결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드디어 을지마사의 입에서 어려운 결정이 떨어졌다. "을지문무를 데리고 다녀오도록 하시오. 두 분이 아직도 건강하시거든 이번에 아주 모시고 오시오. 이곳에서 잘 모십시다." 무메가 날을 받아 허텐으로 출발한 것은 다음해 춘삼월. 큰아들 을지문무와 종자 10여 명이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고, 사막길을 따라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해서 허텐에 도착한 것은 찌는 듯이 더운 6월 어느 날이었다. 사람이고 말이고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써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허텐은 오아시스마다 신록이 한참 짙푸르렀다. 이곳저곳에 가꾼 포도밭에서는 파란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사막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자숙 대인 집은 옛날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만 후원에 있는 살구나무가 이젠 늙어서 고목이 되어 있었다. 무메 일행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자숙 부인이 맨발로 뛰쳐나와 딸 무메를 와락 끌어안고는 둘이서 맨 땅바닥을 뒹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너를 다시 만나보다니 ?" 60이 넘어 주름이 깊게 팬 자숙 부인은 어느덧 중년이 된 외동딸 무메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시 통곡을 했다. 자숙 대인은 두 모녀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며 눈 언저리만 찍어내고 있었다. 무메가 왔다는 소문이 금방 허텐 시내에 돌았다. 그날 오후부터 자숙 대인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허 참, 그 떠꺼머리 총각이 글쎄 중국에서 큰 대장이 되었대 ." "이슬람 연합군에 쫓겨 겨우 목숨만 살아간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기필코 출세를 했구먼. " 허텐 사람들은 흡사 자신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기뻐했다. 무메가 허텐에 도착하고 나서 3일 동안은 후덕한 자숙 대인의 집에서 허텐 시내가 떠들썩할 만큼 큰 잔치가 계속되었다. 무메는 손님을 맞을 때마다 고구려 색동옷을 곱게 차려입고 나가 일일이 인사를 드렸다. "저의 피는 위구르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구려로 시집을 가서 위구르 여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무메의 당당한 모습을 허텐 사람들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흘째 되던 날 무메는 자숙 부부와 함께 별장을 찾아갔다. 을지마사가 떠난 후 오식닉국 핫산 왕자로부터 청혼을 받고, 숨어서 몇 년의 세월을 보냈던 추억의 장소였다. 별장이 가까워지자 무메의 눈이 휘등그레졌다. 옛날 별장이 아니었다. 별장 바로 옆에 새 건물들이 들어서고, 건물 앞에는 큰 포도밭이 들어서 주변 환경이 몰라보도록 바뀌어 있었다. 때마침 많은 사람들이 포도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무메가 만나 보니 그들이 모두 고구려 젊은이들이어서 속으로 놀랐다. 그때 어머니 자숙 부인이 다가와서 설명을 해주었다. "네가 떠난 다음, 너의 아버지와 나도 고구려 사람을 돕기로 결심을 했단다 " "그래서요?" "그 이후로 고구려인 젊은이들을 모아다가 일도 배워 주고, 공부를 가르쳐 왔지 ." "공부를요?" "공부겠니, 저들이 고구려인으로 자랑스럽게 살기 위해서 선생님을 모셔다가 고구려 역사를 가르치고, 틈틈이 훈련을 시켰다." 무메는 문득 자모의 아내 나라가 떠올랐다. 남편 을지마사가 틈만 나면 들려주던 나라 할머니, 그 나라 할머니의 체취를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맡게 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메는 어머니 자숙 부인의 손을 꼭 쥐었다. "어머니 , 고마워요." "아니,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저 아이들이란다. 너를 대하듯 저 아이들을 보살피면서 살아 왔지 ." 고구려 소년 소녀들은 하나같이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영리했다. 이들은 훈련을 받고 20살이 넘으면. 각자 고향 마을로 돌아가서 지도자가 된다고 했다. 그때쯤 위구르에는 고구려인이 꽤 많이 살고 있었다. 고선지 장군과 함께 서역 정벌을 했던 고구려 병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곳에 정착해 버렸고, 신장 위구르의 초입인 농우와 난주에서 살길을 찾아 이주해 온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난주는 고구려의 포로들이 끌려와 정착했던 곳인데 당나라는 고구려와 강족을 묶어 단결병을 조직했다. 단결병은 농한기에 훈련을 시켜 두었다가 유사시에 국경을 지키는 군사일을 시켰는데 농번기에는 당나라의 탐관오리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겨울철에는 군대에 끌려가 혹사를 당해야 했기 때문에 고통을 참지 못한 많은 수의 고구려인들이 위구르에까지 도망을 와서 살고 있었다. 훗날 이야기지만 자숙 부부가 가르친 아이들이 자라서 지도자가 되고 그때까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난 G주의 고구려 백성들을 끌고 사천성을 지나 운남성으로 민족적인 대이동을 했다. 그들은 마침내 운남 고원의 대리로 가서 그곳에서 살고 있던 나데의 고구려 유민들과 합류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망하고 흩어졌던 백성들이 드디어 민족적 만남을 이루었으니 자숙 부부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자숙 부부는 하남으로 가서 딸 무메와 함께 살기로 결심을 굳혔다. 날씨가 차지면 먼 길을 갈 수가 없었다. 하남까지는 줄잡아 석 달 그들이 하남에 도착할 때쯤 그곳에는 눈발이 내리고 있을 터였다. 서둘러 날짜를 당겨 잡고 출발을 하려는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큰아들 을지문무가 한사코 자기는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이었다. "어머니, 소자는 겨울을 이곳에서 나고 내년 봄에 돌아가겠습니다." 큰아들 문무가 혼자서 남겠다고 버티자 무메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메가 여러 번 타일렀는데도 문무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네가 이곳에 혼자 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거냐?" "사람도 사귀고 풍물도 익히고 싶습니다. " 문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색한 듯 얼굴을 붉혔다. 무메는 육감적으로 문무의 행동에 어딘가 부자연스런 구석을 느꼈다. 그러나 무메는 그날 밤 어머니 자숙 부인의 귀뜸을 받고서야 그 내막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문무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나 보다. " "그래요?" 무메에게는 충격이었다. 아직도 문무가 자신의 품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벌써 그렇게 컸구나 생각하자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한, 미묘한 기분이었다. 을지문무의 나이 19살. 위구르의 풍광은 하남과 판이하게 달라서 보는 것마다 신기하기만 했다. 어머니 무메가 잔치다 손님접대다 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이, 을지문무는 화지라는 동갑내기 소녀와 둘이서 말을 타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모래산 기슭을 따라 일렬로 행군해 가는 낙타떼들, 소금으로 덮인 큰 호수, 옥돌산,,, . 처음에는 눈매가 서글서글차고 곱상하게 생긴 화지의 이야기를 듣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화지는 허텐 사람들에게 들었다고 하면서 문무의 부모인 을지마사와 무메 사이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도 감정을 섞어 가면서 들려주었다. 시간이 흐르자 이번에는 화지가 을지문무의 꿈 같은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하남에 가면 바다도 있단다." "바다? 그게 뭔데?" "응,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물이 이곳의 사막처럼 끝간 데 없이 이어져 있는 곳이야. 수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사라져 가는 돛단배도 보이지 ." "돛단배는 어디를 가지?" "그야 알 수가 없지 . 바다의 끝을 가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곳에는 너 말고 또 누가 살고 있니?" "물론 고구려 사람들이 살고 있지. 고구려의 큰 성이 10개나 되고 고구려 국기도 있어." "그럼 거기는 당나라 땅이 아니란 말야?" "아무렴 . 그곳은 고구려 땅이야." 화지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먼 고향 땅을 떠올리며 검은 눈망울을 굴렸다. 어느 날 문무와 화지 사이가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찾아왔다. 그날도 문무와 화지는 모래산에 핀 꽃구경을 갔다. 사막에 피는 꽃은 색깔이 핏빛으로 붉게 타서 들녘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문무는 물기도 없는 푸석한 사막에서 피어나는 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서 화지가 말렸는데도더 많은 꽃을 찾는다고 혼자서 조그만 모래산을 넘어 갔다. 금방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던 문무가 한식경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자 모래산 밑에서 불타는 저녁놀을 바라다보며 기다리고 있던 화지는 문득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문무, 문무-." 화지가 줄달음쳐 모래산으로 올랐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무의 자취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화지는 사막 속에서 태어나 자란 여인답게 날씨가 어두워지는데도 용감하게 주위를 샅샅이 뒤지며 돌아다녔다. 드디어 화지가 문무를 찾았을 때 문무는 모래 위로 겨우 머리만 내밀고 다 죽어 가고 있었다. 사막의 모래 함정에 빠져서 헤어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그리된 것이다. 사막에도 다른 육지의 땅처럼 수렁이 있었고, 이 모래 수렁에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모래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가서 끝내 목숨을 잃고 마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마." 화지가 급히 말을 매어 놓은 곳으로 달려가서 말을 끌고 돌아왔다. 그녀는 말고삐 줄을 풀어 가지고 조심스럽게 문무에게 접근해서 한끝을 문무가 몸에 동여매도록 한 다음 다른 쪽 끝을 말에다 고정시켰다. 화지가 소리를 질렀다. "몸을 움직여!" 화지가 잽싸게 말을 몰았다. 문무는 죽을 힘을 다해 모래를 헤쳤다. 과연 서역산 호마는 힘이 좋았다. 얼마 동안 실랑이를 한 연후에 문무는 모래 함정에서 몸을 빼냈다. 문무는 탈진했고, 그 사이 이미 밤이 내려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캄캄해졌다. 화지는 새로운 걱정이 앞섰다. '이 일을 어쩐다.' 위치를 가늠할 수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사막에서 한 번 길을 잃으면 며칠이고 헤매다가 갈증으로 지쳐 쓰러져 죽는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밤을 지샐 수도 없었다. 때는 벌써 10-월초, 밤으로는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져 견딜 수 없이 추웠다. 화지는 영리한 처녀였다. 말 안장 밑에 간 낙타털 담요를 벗겨와 한 장을 모래 위에다 깔고 나머지 한 장을 덮고는 나란히 누었다. 이윽고 그날도 예외없이 북풍이 휘몰아치며 뼈마디를 도려낼 듯한 냉기가 엄습해 왔다. 하늘의 별들도 떠는 듯이 눈이 시렸다. "문무." "응 ." "졸지 마. 졸면 죽는단 말이야." "알았어 ." 새벽녁이 되자 추위를 참고 있던 그들의 인내에도 한계가 왔다. 문무가 추위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곁에 누워 있는 화지를 와락 껴안았다. 화지는 어정쩡한 자세로 자기의 몸을 문무의 품속에서 빼내려고 했지만 그렇다고 결사적인 것은 아니었다. 문무가 다시 한 번 화지의 몸을 끌어당겨 껴안았다. 화지의 몸이 가늘게 떨었다. 그러나 꼭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윽고 두 사람 사이에 온기가 돌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에는 인간의 체온 이상의 또 다른 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것은 막연히 상상만 하고 있었던 젊은 남녀의 육체적인 접촉으로 뿜어져 나오는 예상하지 못했던 열기였다. 아무튼 사막 한가운데서 목숨을 건진 문무와 화지는 다음날 아침 돌아왔지만 아무에게도 내색할 수가 없었다. 오직 가슴속에 묻어둔 두 사람만의 비밀이었다.한편, 하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큰아들 문무의 변화가 심상찮다고 판단한 무메는 어머니 자숙 부인과 의논한 후 화지를 불렀다. 화지는 자숙 부인이 운영하고 있는 훈련소에 있는 고구려 소녀였다. 인물도 곱고 총명해서 눈여겨본 자숙 부인이 한해 전에 총무로 채용해서 별장의 고구려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맡기고 있었다. 곧 자숙 부인의 수양딸인 셈이었다. 자숙 부인은 마음속으로 자기네들이 딸 무메를 따라 하남으로 간 이후에도 별장의 고구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만은 계속하고 싶어서 화지에게 재산을 남겨 주고 훗날을 부탁할 참이었다. 그러나 화지란 처녀에 대해서 잘 모르는 무메는 궁금하기만 했다. "어머니 , 화지가 어떤 아이예요?" "어렸을 때 너를 닮은 아이다. 손주며느리가 화지라면 나는 좋겠다." 자숙 부인의 말이 끝날 즈음, 화지가 얌전한 걸음걸이로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별장에서 몇 번 보았지만 다시 찬찬히 뜯어보니 나무랄 데가 없는 처녀라서 무메는 마음속으로 한 걱정을 놓았다. "너는 내 아들 문무를 사랑하느냐?" 화지의 입에서 선뜻 대답이 나오지 못했다. "을지문무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냔 말이다." 화지가 얼굴을 귀 밑까지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화지 앞에 쨍그렁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메가 지난 20여 년 동안 한시도 몸에서 빼어 놓은 적이 없었던 놋쇠팔찌였다. "앞으로 1년 동안 별장 사업을 마무리지어라. 그때 가서 사람을 다시 보내겠다." 그해 8월 스무이튿날, 무메, 자숙 부부, 을지문무 일행은 대상 차림의 말몰이꾼들이 모는 3천 마리의 서역산 호말을 끌고 하남까지의 장도에 올랐다. 서역의 말장수로 위장하고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장정을 시작한 것이다. 일행 중에는 고구려 소년들 가운데서 똑똑하고 영리한 고을성과 황보우무가 끼어 있었다. 그날 자숙 대인 집의 늙은 뽕나무 밑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떠나 가는 무메 일행이 시야에서 가물가물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화지였다. 무메가 소녀 시절 을지마사를 기다리며 차고 있었던 바로 그 놋쇠팔찌가 대를 이어 화지의 손목에 끼어 있었다. 그로부터 석 달 후 무메 일행은 흰눈을 맞으며 청주에 들어섰다. 추수를 끝낸 논바닥에 살얼음이 얼고 하남 일대가 깊은 잠 속에 빠져 온 세상이 고즈넉했다. 오직 청주성 관내 이정기의 집무실에서만 한가닥 불빛이 새어나오고 을지마사의 얼굴이 불빛을 받아 상기되어 있었다. "이정기 장군님 ,. 여기 봉투 두 개를 준비했습니다 " 을지마사가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앞에 밀어 놓자 이정기가 내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즈음 이정기는 사촌 이유가 권해서 중국의 한시를 배우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그를 대하는 을지마사의 눈길이 곱지 않다는 것을 벌써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을지마사가 지나가는 말로 "우리 나라에도 단군조선 시절부터 내려오는 좋은 문학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중국의 것을 배우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을지마사가 던진 충고의 말 이면에는 자칫하면 중국의 시나 풍류에 중독되어 민족혼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정기는 사촌형 이유에 대한 체면도 있고 해서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던 것이다. 결심을 굳히고 찾아온 을지마사가 숨을 훅 들이마셨다. "한 개는 이 장군님 것이고, 다른 한 개는 제 것입니다. 장군께서 선택을 해주십시오." "저 노란색 봉투는?" "제 사직서 입니다. 직을 파하고 대리로 돌아가겠습니다."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는 을지마사의 얼굴을 보며 이정기는 안색이 변했다. "그럼 빨간색은?" "서쪽으로의 진군입니다." 이정기는 순간 납이라도 삼킨 듯 표정이 굳어지며 아연 긴장했다. 서쪽으로의 진군이라면,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쳐들어가자는 제안이었다. 사실 이정기나 을지마사도 나이가 40이 넘자 자꾸만 초조해졌다. 이정기도 그즈음 지난 15년을 뒤돌아보면서 하남을 점령한 이후 너무나 안주해서 내실만 기르고 있었다는 일말의 후회를 씹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제장들이 소집되었다. 이윽고 이정기의 입에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향해 서쪽으로 진군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또 수도를 청주에서 좀더 서쪽에 위치해 있는 치주로 옮긴다고 선포하자 조회에 참석한 제장들은 깜짝 놀랐다. 다음날부터 청주성은 관아들이 이사를 하느라고 북새통을 쳤다. 석 달이 걸려 치주로의 천도가 완료되자 이어서 다음 계획이 착착 진행되었다. 그간에 양성해 둔 10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키는 일이었다.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군량미 50만 석과 공성무기들도 전선에 날라다 놓았다. 하남은 드디어 긴 잠에서 깨어난 듯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이정기는 마지막으로 당나라로 쳐들어갈 군사 조직 명단을 발표했다. 고구려군 총사령 종사관 선봉대장 하남국 부군주 을지마사 주자사 사마광 청주자사 장팔 유격대장 덕주자사 귀실우오 제주자사 떡쇠 기주자사 고목 등주자사 연개수근 치주 종사관 이납 청주 종사관 이유 내주자사 고명영 모두 다 1당 1만을 할 수 있는 호랑이 같은 장수들이었다. 그러나 체주자사 목도사는 와병중이어서. 해주자사 사마상은 남쪽방비 때문에 참전하지 못했다. 대신 요동의 평로절도부에서 5천명의 병사들이 따로 도우러 오고, 을지마사의 두 아들 문무와 문성이 부장으로 참전했다. 드디어 망해 버린 고구려가 비장의 힘을 길러 당나라의 심장부를 향해 쳐들어가는 대서사시의 막이 올랐다. 이정기에게도 하늘이 내린 시운이 있었다. 때는 양귀비와 안녹산의 난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현종도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숙종도 52살로 죽었다. 대종(代宗)이 그의 뒤를 이어 들어섰다. 한데 당나라 조정은 들어서는 임금마다 나약하고 어리석어 여전히 혼란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어조은이대종의 총애를 업고 군대를 제멋대로 동원하면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더니, 원재가 들어서서 어조은을 죽였다. 대종꼭 총애가 다시 원재에게 기울어지자 원재는 권력을 휘두르고 모든 정사에 너무나 뇌물을 밝혀 나라 안은 홀란이 가중되고 딨었다. 한편 이정기의 하남과 당나라 중원 사이에는 반당 삼번이라고 부르는 성덕절도사 이보신을 비롯해 위박절도사 전승사, 상위절도사 설숭 등이 끼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인척 관계를 맺고 당나라에 대항하고 있었다. 이정기가 좀더 일찍 중원을 쳐들어가지 못한 데에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의 존재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들을 치고 진격하자니 그들과의 의리도 있었지만 그들이 망하게 되면 오히려 당나라의 반대 세력을 줄여 주는 역효과를 가져오는지라 망설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당나라 대력( 12년(777), 이들 가운데 설숭이 갑자기 죽어 버리자 그의 부하 이영요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설숭이 거느렸던 영지는 먼저 차지한 사람이 임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정기가 계획한 정서의 시기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정기는 이영요의 반란군을 진압하며 중원을 향해 한발짝씩 진군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해 녹음이 짙어 가는 7월, 이정기군이 드디어 발진을 했다. 고구려의 깃발을 드높게 쳐든 고취대가 성을 빠져 나갔다. 이어서 창검과 기치를 높이 든 원정군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 이정기의 고구려군은 장장 50리에 뻗어 있었다. 연도에는 백성들이 나와서 출정하는 아버지와 자식들을 환송하고, 원정군의 장도를 축하했다. 바야흐로 하남 일대가 들썩거렸다. 치주를 출발한 지 5일 후 고구려군은 지척에 운주를 바라보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운주성 일대가 먼지로 자욱했다. 선봉대장 장팔은 기다리고 있다가 후속대와 합류한 다음 운주성으로 접근해 갔다. 살펴보니 운주성에서는 죽은 설숭의 본군과 이영요의 반란군 사이에 공방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장팔이 을지마사를 뒤돌아보았다. "어차피 모조리 없애야 할 잡군들이다. 반란군부터 요절을 내버리자." 을지마사의 고구려군이 진용을 가다듬고 있는데 3만에 육박하는 반란군도 불시에 배후에서 나타난 하남의 고구려군을 보자 성의 포위를 풀고 대항해 왔다.먼저 반란군의 돌격대가 선제 공격을 해왔다. 돌격대의 선두는 탈명비도를 한다는 전횡이란 자였다. 그는 진홍색 전포에 황소뿔을 양쪽에 매단 괴상한 투구를 쓰고 있었다. 고구려군은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을지마사의 입에서 즉각 명령이 떨어졌다. "귀실우오, 네가 가서 막아라." 을지마사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귀실우오가 일지군을 몰고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양군은 금세 한데 엉켜 접전을 벌였다. 고구려군도 잘 싸웠지만 반란군도 초전에 예봉을 꺾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덤벼들었다. 귀실우오는 졸개들은 졸개들끼리 싸우도록 맡기고 황소뿔 전횡을 뒤쫓았다. 전횡은 귀실우오가 쫓아오는 것을 보자 못 이기는 척 도망을 치고, 귀실우오는 전횡의 속셈도 모르고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관전을 하고 있던 을지마사가 벌떡 일어섰다. "앗! 귀실우오가 위험하다. " 그러나 막상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아니나다를까 전횡은 쫓기면서 슬그머니 소매 속에서 비도 한 개를 꺼냈다. 그러고는 잽싸게 뒤돌아서 귀실우오의 면상을 향해 날렸다. 귀실우오는 마른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순간 마상에 납작 엎드렸다. 비도가 번개처럼 귀실우오의 머리털을 자르고 지나갔다. 전횡의 비도 던지는 솜씨는 귀신의 경지에 가까웠다. 비도 한 개가 연이어 날아왔다. 귀실우오는 몸을 비틀었다. 눈 깜짝할 새에 귀실우오의 전포 옆구리가 베어져 나풀거리고 살갗을 스쳤는지 피가 흘러 나왔다. 전횡은 속으로 '뒤따라오는 장수가 대단한 놈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금껏 자기의 비도가 실수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귀실우오의 벼락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전횡 이놈, 아직 귀실우오를 몰랐구나." 귀실우오가 서역산 호마를 박차고 한달음에 전횡에게 달라붙으며 전횡의 옆구리를 거칠게 낚아챘다. 황소뿔 투구가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귀실우오는 이어서 전횡을 말 옆구리에다 거꾸로 매달아 버렸다. 대장 전횡이 생포당하는 것을 보자 반란군은 일시에 등을 돌리고 줄행랑을 놓았다. 고구려군은 전세를 몰아 추격해 갔다. 그러나 추격을 한 고구려군은 막상 반란군의 진영 앞에 이르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언덕 위에서 을지마사가 바라다보니 싸움은 점차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난군중에서 울긋불긋한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큰 도끼를 휘두르며 싸움판을 휘젓고 다니는 거구의 적장이 보였다. 그 적장이 나타나는 곳마다 고구려군 병졸들은 적장의 큰 도끼를 당해 내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큰 도끼로 좌충우돌하고 있는 장수는 회걸인 목목부화사였다. 시간을 조금만 더 끌면 이쪽의 고구려군 병사들이 수세에 몰리고 싸움은 반란굴 편으로 기울어질 게 뻔했다. 을지마사는 마음이 초조했다. "떡쇠 , 네가 나가서 저 장수를 대적하라." 을지마사의 명령이 떨어지자 즉각 떡쇠가 큰 도끼를 쳐들고 춤을 추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회걸인 장수 목목부화사가 이 광경을 흘끗 쳐다보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떡쇠를 향해 도끼를 휘두르고, 순간 떡쇠가 야무지게 도끼로 마주쳐서 막았다. 공중에서 무거운 쇳덩어리끼리 맞부딪치자 둔탁한 소리와 함쩨 불꽃이 무섭게 튀었다. 천하장사 두 명이 도끼를 가지고 싸우는 모습은 진풍경이었다. 괴력을 가진 두 장수 모두 큰 도끼로 길게 호를 그으며 달려들었다가는 떨어지고, 이렇게 10여 차례가 반복되고 있었다. 싸우던 병사들도 얼이 빠져 구경을 하느라 정신을 놓고 있었다. 을지마사의 움켜쥔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도끼 싸움 한판이 이날의 승부를 결정짓는 전기가 될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을지마사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마악 장팔을 부르려 할 때였다. 곧이어 함성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와아 -." 괴력을 지닌 두 개의 도끼가 무섭게 맞부딪치면서 떡쇠의 힘이 조금 더 강했던지 목목부화사의 도끼목이 부러진 것이다. 부러진 도끼목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떡쇠의 도끼날이 목목부화사의 머리통을 그대로 박살내 버렸다. 넋을 놓고 관전하고 있던 고구려군 병사들도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던지 명령을 기다릴 것도 없이 반란군을 향해 일시에 짓쳐들었다. 그날의 싸움은 고구려군의 대승리였다. 고구려군이 반란군을 30리나 쫓아가 수많은 병사들을 주살하고 운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다시 되돌아오니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밖에는 몇 개의 천막이 쳐 있고, 백발이 다 된 자사 왕겸이 고구려군을 맞이했다. 운주자사 왕겸은 절조가 있는 인물이었다. 설숭이 죽고, 이영요가 반란을 일으켜 회유를 했지만 지조를 지켜 반란군에 합류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8일 동안이나 반란군에 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기 일보 직전에 뜻밖에도 고구려군이 나타났던 것이다. 자사 왕겸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고맙소, 을지마사 장군. 반란군에 성을 내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설숭 장군이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오." 을지마사는 왕겸의 안내로 운주성으로 들어가 성을 접수했다. 이로써 하남국은 총 11개 주로 불어났다. 을지마사는 자사 왕겸을 예우해서 치주의 이정기에게 보낸 다음 쉴 틈도 없이 12개 주 째인 운주 남쪽의 연주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고구려군의 웅직임을 급히 연주에 응거하고 있는 반란군 장수 진수에게 고했다. 진수는 운주 싸움에서 상위절도사 내에서 최고의 맹장들인 전횡이 생포되고, 목목부화사가 참살당했다는 보고를 받고는 사색이 되었다. 그는 서둘러 성에다 불을 지른 다음 처자식과 휘하에 2만 병사를 이끌고 반란군 대장 이영요가 웅거하고 있는 조주로 도망을 쳐버렸다. 을지마사군이 연주에 도착했을 때는 한참 성이 불타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불을 끄는 데 고구려군이 모 두 동원되었지만 하루가 지나서야 간신히 불길이 잡혔다. 다음 공격의 목표는 조주와 복주였다. 을지마사가 제장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어느 주를 먼저 공격하면 좋겠소?" 장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복주를 먼저 치고 이영요의 본거지인 조주를 치는 것이 순리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장수가 반열에서 일어났다. 후군 등주자사 연개수근이었다. "반란군의 본거지 조주를 먼저 무너뜨리면 복주는 저절로 굴러떨어질 것입니다." 장수들의 의견이 서로 반반씩 갈려서 다툼이 일어났다. "조용히들 하시오. 의견 통일이 안 되면 두 주를 함께 공격하겠소. 누가 복주를 맡겠소?" 을지마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떡쇠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 떡쇠가 단번에 짓밟아 버리겠소." 이에 질세라 또 한 장수가 나섰다. "떡쇠는 힘만 셌지 미련해서 적임자가 못 됩니다. 저를 보내주시면 3일 안에 승전고를 울리겠소." 모두들 쳐다보니 별군대장 기주자사 고목이었다. 그때 떡쇠가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고목 자사, 그대는 나와 무슨 원한이 있어 말끝마다 나를 깔아뭉개는 거요? 당초에 누가 내주와 등주를 칼에 피도 묻히지 않고 빼앗아 바쳤으며, 기주의 마령에서 화공을 당해 이정기 장군의 목숨이 위급했을 때 누가 구했단 말이오? 그래, 당신이 얼마나 똑똑한지는 몰라도 대답 좀 해보시오." 을지마사가 안 되겠다 싶어 얼른 두 장수를 가로막았다. 먼저 기세가 등등한 떡쇠를 달래 자리에 앉혔다. 을지마사는 이어서 떡쇠가 초전에 목목부화사를 베고 운주성을 얻은 공을 치하한 다음 복주 공격은 고목으로 대장을 삼았다. 그리고 장팔과 귀실우오를 따로 불러 고목을 돕도록 했다. 다음은 조주였다. 조주를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했던 연개수근이 조주는 당연히 자기 것이라는 듯이 나섰다. "조주는 제 몫으로 알고 있습니다. " 을지마사도 연개수근이라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지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젊은 장수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조주는 미천하나마 소장에게 맡겨 주십시오." 모두들 바라다보니 이정기의 외아들로 이번 싸움에 참전을 한치주 종사관 이납이었다. 당시 이납의 나이 27세, 그도 당당히 한몫을 할 나이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고개를 저었다. "조주는 반란군의 본거지이다. 더욱이나 조주에서 황하를 건너면 바로 변주로, 변주는 당군 20만이 지키고 있어 매우 조심스러운 지역이다. 변주가 바로 당나라 하남부의 최후 방어선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좀더 수련을 쌓은 후에 중책을 맡도록 하라." 그러나 한번 일어선 이납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감당하지 못하면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죽어서 돌아가겠습니다. " "아니다. 네가 죽으면 나도 너의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다. " "아닙니다. 고구려를 위해서 싸우다 죽었다면, 아버지도 기뻐하실 겁니다." 을지마사의 시선이 기주자사 고목에게로 옮겨 갔다. 고목이 일어섰다. "좋습니다. 이납을 보내 주십시요." 고목은 이납의 장인이었다. 이납은 몇 해 전에 발해 출신인 고목의 둘째 딸에게 장가를 들어 사고라는 외아들을 두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우연하게도 복주와 조주 공격은 장인과 사위가 나누어 맡게 되었다. 조주는 을지마사가 떡쇠와 연개수근을 부장으로 삼아 돕기로 했다. 고목군의 병참은 청주 종사관 이유가, 이납군의 병참은 밀주자사 사마광이 담당했다. 다음날 전군을 각각 5만 명씰으로 나누어 출발을 했다. 복주자사 서연봉은 고구려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껄껄 웃었다. "놈들이 스스로 제 무덤을 찾아오는구나." 서연봉은 부하장수 전출과 염소풍을 불러 몰래 지시를 내렸다. 그 시각에도 복주의 내막을 모르는 고목의 고구려군은 복주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고목이 3만 군을 이끌고 선두에서 가고, 장팔과 연개수근은 나머지 2만 병을 이끌고 후군이 되어 10여 리 뒤에서 따르고 있었다. 전군이 거진 복주성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고목이 문득 앞을 바라다보니 황토색의 거대한 물체가 넘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앗! 수공" 고목이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거대한 황톳물이 달려들어 고구려군을 덮쳤다. 복주자사 서연봉이 전출과 염소풍을 시켜 황하의 제방을 터뜨렸던 것이다. 고목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물에 빠진 군사들을 대피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수백 척의 쪽배들이 나타났다. 쪽배에는 갈고리를 든 복주 병사들이 10여 명씩 타고 있었다. 쪽배는 물바다가 된 일대를 유유히 떠다니며 물에 빠져 버둥거리는 고구려군 병사들을 갈고리로 건져 올리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뒤쫓아온 장팔과 귀실우오의 도움으로 많은 병사들이 대피할 수가 있었지만 아직도 수천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물에서 헤처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목이 겨우 숨을 돌리고 살펴보니 200여 보 떨어진 지점에 섬처럼 올라온 곳이 있고, 그곳에 수백 명의 고구려군이 대피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수십 척의 쪽배들이 모여들어 섬에 갇혀 있는 고구려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모조리 생포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고목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복주군으로부터 쪽배 하나를 빼앗아 타고 군사 20여 명을 태우고 섬으로 저어 갔다. 고목은 칼을 휘둘러 섬을 에워싸고 있는 복주병을 무찔렀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고목이 타고 있는 배 안에 물이 스며들어 오더니 배가 점점 가라앉는 것이 아닌가. 복주병 몇 놈이 물 밑으로 들어가서 고목의 배에 구멍을 뚫어 버린 것이다. 고목과 20여 명의 군사들이 일시에 물에 빠져 버렸다. 물 속에 빠진 사람들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과 싸움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고목의 옷이 갈고리에 걸렸다. "이놈은 대장인 듯하니 상금도 많겠지 ." 고구려군 대장 고목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뭍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장팔의 심정은 암담했다. 일시에 대장 고목과 3천여 명의 병사들이 붙들려 가고, 1천여 명이 물에 빠져 죽어 버린 것이다. 만약 자기가 급히 구원을 하지 않았더라면 전군 3만 명이 요절났을 터였다. 그렇다고 방금 물에서 건져낸 병사들을 데리고 복주성으로 쳐들어가서 싸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팔은 지모가 있는 장수였다. 장팔이 귀실우오를 불러 의논했다. "귀실 장군, 이렇게 하면 어떻소--" "과연 작전대로 되겠습니까?" "그렇다고 딴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소?" 귀실우오는 장팔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다음날 귀실우오는 1만 명의 병사들을 물에 빠진 생쥐꼴로 위장시킨 다음 복주성으로 쳐들어갔다. 성 밑에 이르자 병사들로 하여금 소리를 지르게 했다. "원수를 갚으러 왔다. 어서 나와 한판 붙자?" 복주자사 서연봉은 성루에 앉아 있다가 생쥐꼴을 한 하남군을 내려다보며 배를 움켜쥐고 박장대소했다. "아! 저 물에 빠진 생쥐떼들을 좀 봐라." 서연봉은 비록 어제의 전과가 흉족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장과 3천 명의 포로를 잡은 터라 의기양양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염소풍이 앞으로 나왔다." "내가 성문을 열고 나가서 저놈들을 마저 도륙내고 오겠소." 그러나 자사 서연봉은 손을 저었다. "그럴 것까지야 있느냐. 한 열흘쯤 지나면 저놈들이 제풀에 물러갈 것이다." "그래도 다 이긴 싸움을 중도에서 그만둔단 말입니까?" 염소풍의 말 속에는 자사 서연봉이 겁쟁이라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다. 자사 서연봉은 염소풍을 나무라듯이 타일렀다. "너는 일찍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병법의 최고라는 병서도 읽지 못했느냐?" 염소풍은 무안을 당해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런데 마침 또 다른 장수 전출이 폭발 일보 직전에 있었다. 운주 싸움에서 쫓겨온 병사들의 말에 의하면, 성 밑에 와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고구려군 장수 귀실우오가 황소똴 전횡을 생포해 간 자라는 것이었다. 전횡은 바로 전출의 동생이었다. 형의 원수인 귀실우오를 보자 전출의 팔자수염이 꼿꼿이 섰다. 분을 이기지 못한 전출이 벌떡 일어나 성 아래를 내려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실우오 네 이놈! 네 간을 꺼내 씹겠다" 자사 서연봉이 놀라 쫓아왔다. "전출 장군, 갑자기 웬일이오?". "붙들지 마시오. 나 혼자서라도 성문을 열고 나가서 저놈의 목을 따오겠소." 자초지종을 들은 자사 서연봉도 하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병 1만을 그에게 주었다. "싸움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고, 귀실 뭔가 하는 놈을 해치우거든 금방 회군하시오." 전출은 출전을 하면서 자사 서연봉을 돌아다보았다. 그의 눈초리에는 경멸의 빛을 담고 있었다. 전출이 1만 명을 끌고 성문을 나오자마자 곧 싸움이 붙었다.전출은 장창을 꼬나잡고 곧장 귀실우오에게 달려들었다. 두 장수 사이에 불꽃 튀기는 접전이 벌어졌다. 싸움이 30여 합에 이르렀을 때 귀실우오의 머리 속에 문득 장팔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체하고, 얼른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귀실우오가 도망을 치자 고구려군 병사들도 뒤를 따랐다. 복주성 10리 지점에 조그만 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귀실우오는 산을 향해 내달렸다. 뒤에서 분기가 탱천한 전출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귀실우오, 어디로 도망치느냐? 냉큼 모가지를 내놓아라." 그래도 귀실우오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을 친다. 어느덧 두 장수의 거리가 좁혀져서 전출이 단숨에 귀실우오를 손아귀에 쥘 찰나였다. 그때 복주성에서 북소리가 들려 왔다. 등등, 두등두등. 전출을 불러들이는 자사 서연봉의 신호였다. 회군을 한 전출은 울화통을 터뜨리며 자사 서연봉에게 대들었다. 반란군의 규율이란 게 그만큼 형편없었다. "자사 나리 , 다 이긴 싸움인데 왜 불렀소?" "저 산에 복병이 있는 듯해서 회군을 시켰다 " "내 그대를 따라 반란을 도모했지만, 더 이상 겁쟁이와 일을 함께 할 수는 없소." 자사 서연봉이 말문이 막혀 미처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전날의 창피에 앙갚음을 하듯 염소풍이 대들었다. "당신이 정 이렇게 나오면 우리는 따로 행동하겠소." 자사 서연봉은 덜컥 겁이 났다. 복주의 간판인 두 장수 전출과 염소풍이 등을 돌린다면 성내에서 무슨 대란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내일 싸움에서 봅시다." 자사 서연봉은 어정정하게 대답은 했지만 그날 밤 불안으로 잠을 설쳤다. 다음날 아침, 귀실우오는 다시 꼴이 말이 아닌 군사들을 데리고 복주성 밑으로 와서 싸움을 돋우었다. 자사 서연봉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문을 열고 짓쳐 나갔다. 전출과 염소풍도 뒤따라나갔다. 복주성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아니나다를까 귀실우오가 그들의 기세를 당해 내지 못하고 금세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서연봉, 전출, 염소풍은 기운이 솟구쳐 더욱 힘차게 귀실우오의 뒤를 쫓았다. 마침내 쫓기던 귀실우오가 산으로 기어올랐다. 귀실우오가 산꼭대기에 다다랐을 때는 병사들마저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따르는 병사들이라야 겨우 30여 기에 지나지 않았다. "검은색 전포를 입은 놈이 귀실우오다." "저놈만 잡으면 대승이다." 자사 서연봉, 전출, 염소풍이 귀실우오만을 노리고 달려들자 귀실우오는 다급했다. 말에서 내려 창, 투子, 갑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는 급기야 속옷바람이 되어 산봉우리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서연봉의 장쾌한 웃음소리가 산을 울렸다 "저기 가는 곰새끼 좀 봐라. 불알만 달고 도망을 가는구나." 이제 귀실우오를 붙잡는 것은 낭중취물이었다. 그러는 동안 귀실우오는 기를 쓰고 산꼭대기에 오르고, 자사 서연봉 등도 불과 30여 보 거리를 두고 따라붙었다. 그들은 이제야 귀실우오를 거의 잡았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꽝 하는 난데없는 포성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이어서 산 너머에 숨어 있던 수만 명의 고구려군이 갑자기 능선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뿔싸!" 서연봉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속옷바람으로 도망을 가던 귀실우오가 돌아서서 소리를 질렀다. "곰 새끼만도 못한 연봉아, 오늘이 바로 네 제삿날이구나!" 놀란 서연봉, 전출 염소풍이 급히 산을 내달아 도망을 쳤다. 그때 또 한 번의 포성소리가 귀청을 꽝 하고 찢을 듯이 울렸다. 양쪽 산등성이에 숨어 있던 고구려군이 개미떼들처럼 새까맣게 내려오고 있었다. 자사 서연봉과 2만의 복주병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고구려군은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네 이놈, 서연봉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7척 거구의 장수 하나가 서연봉을 낚아챘다. 장팔이었다. 뒤이어 귀실우오가 전출을, 그리고 부장으로 참전한 을지문무는 날렵하게 염소풍을 생포해 버렸다. 복주군을 섬멸한 고구려군은 그길로 복주성으로 쳐들어가서 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이윽고 장대 3개가 공중으로 치켜올려지고 꼭대기마다 한 사람씩 묶여 있었다. "너희들 대장 서연봉, 전출, 염소풍이 여기에 있다. 성문을 열고 항복하겠느냐? 아니면 끝까지 대항하겠느냐?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 주되 한 놈이라도 대항하면 맹세코 너희 처자식까지 몰살을 시키리라." 귀실우오가 엄포를 놓았다. 수성을 하고 있는 병사라야 겨우 5천여 명, 그렇다고 고구려군이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정작 싸움이 벌어지면 복주 병사들은 적개심이 발동해서 생포해 간 고목 이하 3천 명의 고구려군 포로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지도 모를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고구려군은 섣불리 공격도 못하고 마음만 초조했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천만다행으로 성루에서 백기가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았던지 수비병들은 순순히 성문을 열었던 것이다. 사로잡힌 고목과 고구려군 병사들도 구출해 냈다. 성안으로 들어간 장팔은 복주성을 함락시킨 이상 많은 병사들이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목에게 2만 병을 주어 지키게 하고, 자기는 귀실우오와 함께 3만 병을 이끌고 조주를 향해 달려갔다. 아니나다를까 조주를 공격하고 있는 고구.려군은 고전을 하고 있었다. 치주 종사관 이납을 선봉장으로 5만 명의 고구려군은 먼저 조주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이납이 생각하기로 조주가 반군의 거점인만큼 공격의 대의명분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흰 무명베에다가 성안 사람들도 볼 수 있을 만큼 글자를 큼직하게 써서 큰 장대 끝에다 매달았다. 이영요는 설숭의 은혜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남군은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서 이영요를 토벌한다. 고구려군은 조주성 안에서 반응이 없자 운제 10여 채를 끌어다가 성을 빙 둘러 배치했다. 운제마다 병사들 10여 명씩을 올려보내 성을 내려다보고 활을 쏘게 했다. 한편으로는 포차 수십 대를 동원해서 큰 돌멩이를 날려 성안으로 떨어지게 했다. 그러나 성안에 3만 명을 거느린 반란군 장수 이영요도 끈질기게 저항을 해왔다. 그도 반란을 일으킬 만큼 무용도 있고 대담성도 있는 장수였다. 성벽 위에서는 조주 병사들이 쏘는 화살이 비오듯이 고구려군을 향해 날아왔다. 어쨌든 이쪽 고구려군의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는 성을 깨뜨릴 수도, 성벽을 타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이납은 점차 마음이 조급해졌다. "충차로 공격 해라." 그러나 성루에서 비오듯이 쏟아지는 화살 때문에 좀처럼 성문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양군의 싸움이 별 진전 없이 소강 상태에 빠져들고 있던 어느 날, 황하를 건너다본 을지마사의 안색이 갑자기 하얗게 질렸다. 때마침 시작된 가을 장마로 황하가 범람해서 강 건너가 멀리 바라다보였다. 강 건너 변주 쪽에 개미떼들처럼 가물가물 보이는 것이 있었다. 고구려군이 조주성을 공격하는 것을 알고 집결한 수십 만의 당군들이었다. 변주는 당나라 동쪽 방비의 거점이었다. 변주가 무너지면 낙양이 짓밟히고, 이어서 장안이 위태롭게 되어 패망의 위기를 맞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주성 건너 변주에는 항시 20만 명 이상의 당군이 방비하고 있었다. 만약 변주의 당군이 강을 건너와 일시에 덮치면, 고구려군은 당군과 이영요의 반군 사이에 끼 어 전멸을 면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중국의 심장부로 쳐들어가서 당나라를 무너뜨리겠다는 당초의 목표가 일시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을지마사는 아무리 궁리를 짜보아도 뽀족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아 가슴이 탔다. 더군다나 이정기는 외아들 이납이 공성군 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일같이 전황을 물어 왔다. 을지마사는 우선 싸움을 불리하게 이끌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하에 변주의 당군이 마주 건너다 보고 있는 동문과 남문에 배치했던 군사들을 일단 서문과 북문으로 이동해서 배치했다.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치주에서 뜻밖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납의 부인 고씨가 둘째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납 장군은 돌아가서 장사를 치르도록 하시오." 을지마사가 권유를 했으나 이납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싸움에 이기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내 처의 혼백도 이젠 이곳에 와서 있을 것입니다" 을지마사는 이납의 굳은 결심을 알고는 더 이상 권유할 수가 없었다. 애도의 표시로 그날 하루는 싸움을 쉬었다 그날 오후, 장팔과 귀실우오의 3만 병이 달려와서 복주성을 빼앗았다는 승전보를 알렸다. 모두들 기뻐했다. 침체되어 가던 고구려군의 분위기가 일시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러고 나서도 또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싸움은 지구전의 양상을 띠며 매일같이 양군의 사상자만 불어났다. '어떡 한다?' 을지마사가 혼자서 걱정하고 있는데 이납이 찾아왔다. "을지 장군님, 옛사람들은 성이 난공불락일 때 어떻게 했습니까?" 을지마사도 문득 고사를 떠올려 보았다. "병력을 동원해서 일시에 성벽을 타 넘기도 하고 ,...." 이 방법은 수만 명의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인간을 파리 목숨보다 가벼이 여기는 중국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수양제와 당태종은 이 방법으로 고구려를 공격해서 수백만 명의 자기편 군사를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이외의 방법은 없습니까?" "있기는 있지. 토산을 성과 같은 높이로 쌓는 것인데, 이 방법은 안 된다." "왜요?" "적어도 수십만 명이 몇 달 동안 흙을 퍼날라다 올려야 겨우 토산이 완성된다." 이 방법 또한 당태종이 즐겨 쓰던 수법이었다. "또 다른 방법은요?" "글쎄 , 나도 더 이상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 토산을 쌓기로 하지요." "뭣 ! 토산을?" 을지마사는 이납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토산은 수십만 명이 몇 달에 걸쳐 쌓는 것이라고 말을 해주었는데도 이납이 부득부득 그렇게 하자고 우기고 나선 것이다. 전쟁이 그만큼 답답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탓이다. 조주를 공격하는 고구려군은 총 8만 명, 매일같이 흙을 날라온다고 해도 2--3년은 걸릴 터였다. 을지마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이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을지 장군님 , 진짜 토산을 쌓자는 것이 아니구요. 쌓는 척만 하는 것이지요." "땅굴을 파는 겁니다. 토산을 조금 쌓은 후 그 너머에서 땅굴을 파면, 토산에 가리워 발각될 염려도 없고, 땅굴에서 파낸 흙을 토산에다 얹으면 감쪽같고. . ....." "그러나,,,, 땅굴은 가장 위험한 작전이다. 만약 발각이 되어 성안에서 물을 부어 버리면 땅굴 안에 있는 병사들이 전멸해 버린다." "땅굴이 완성되면 제가 죽기를 각오하고 먼저 쳐들어가겠습니다." 이납도 이정기 못지않게 용감하고 당돌한 구석이 있었다. 을지마사도 그 방법밖에는 달리 수가 없다고 판단해 허락을 했다. 다음날부터 고구려군은 흙을 날라다 토산을 쌓기 시작했다. 성루에서 이 광경을 바라다본 이영요는 빙그레 웃었다. '한 3년은 편하게 잠을 자겠구나.' 그도 고구려군이 토산 너머에서 몰래 땅굴을 파는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자 토산은 어른키만큼이나 차올랐고 땅굴도 가진 성벽 밑에까지 이르렀다. 앞으로 석 달만 더 파고들어가면 성안 어디엔가를 뚫고 나올 판이었다. 그곳은 길 한복판일 수도 있고, 어느 집 후원일 수도 있다. 또 재수가 없으면 군사들이 우글거리는 병영 앞마당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을지마사가 가장 위험한 방법이라고 주저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하루는 흙을 져나르는 병사들이 쉬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성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황하 유역은 지반이 약했다. 땅 밑으로 파들어간 땅굴이 성벽 밑에 이르자 성벽을 지탱하고 있던 무거운 바윗돌이 자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서로 맞물린 바윗돌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바람에 서북쪽 성벽이 30여 보나 연달아 무너져 내렸다. 이영요는 관내에 있다가 급보를 받고는 깜짝 놀라서 서문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이미 그는 한발 늦었다. 장창을 꼬나쥔 청년 장수 하나가 무너진 성벽을 통해서 짓쳐 들어오며 수성병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뒤이어 함성소리가 났다 "와아-" 드디어 을지마사가 총공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고구려군 8만은 일제히 성안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을지마사, 장팔, 떡쇠, 연개수근, 귀실우오 등 1당 1만을 하는 맹장들의 눈에서 불이 번쩍 일었다. 양군이 뒤섞여 접전을 하는 난군중에서도 그들이 나타나는 곳마다 조주 병사들이 짚단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이영요는 안 되다 싶었던지 관내로 달아났다. 이납이 뒤따라 들어갔다. 이납은 어떻게든지 이영요만큼은 자신이 상대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영요, 이젠 항복하겠느냐?" 이납이 장창을 꼬나질고 한발짝씩 이영요 앞으로 다가갔다. 이영요는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그때 관내 앞마당이 떠들썩하며 군사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납의 우렁찬 목소리가 다시 관내를 울렸다. "이 영 요, 그대는 항복하겠는가?" 이납의 창끝이 이영요의 가슴을 바짝 겨누었다. 이영요가 쳐든 칼끝이 부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이영요의 얼굴에 차디찬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좋다. 항복하마. 그러나 너에게가 아니고 나 자신에게다." "너 자신에게?" "그렇다. 누구나 출발은 똑같은 반역자이다. 오직 승자는 정의의 편이 되고, 패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영요가 칼을 번쩍 쳐들었다. 이어서 자신의 목을 찔렀다. 물을 끼얹은 듯 관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납은 무엇엔가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피를 흘리며 고꾸라져 있는 이영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부릅뜬 두 눈을 감겨 주었다. 이로써 넉 달에 걸쳐 공방전을 벌이던 조주성도 마침내 함락되었다. 치주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정기에게 아들 이납의 승전 소식이 전해지자 자신이 직접 위안용 상품을 가득 싣고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는 이번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공을 세운 외아들 이납이 눈물겹도록 장해 보였다. 더욱이나 조주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쳐들어가는 길목에 있어, 당나라를 쳐 없애겠다는 이정기의 평생 소원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충지였다. 조주에서라면 낙양이 400리, 그곳에서 600여 리만 더 가면 당나라의 본거지 장안이었다. 장안이 불과 천리 길로 좁혀든 것이다. 이정기는 조주에 도착하자 장병들의 손을 일일이 잡고 노고를 치하했다. 다음날 제장들을 불러 모아 놓고 앞으로의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조주는 이납에게 3만 병을 주어 맡기겠소. 당장에 낙양을 들이치고 싶지만 뒤에 있는 서주가 걱정이오." "서주는 제가 맡겠습니다." 장팔이 일어서서 청을 넣었다. 그러나 이정기가 고개를 흔들었다. "서주는 회남에서 가장 큰 곳, 내가 직접 가겠소." 서주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하남, 산남, 회남, 회서의 4개 지역 물산이 모이는 그 일대의 중심지였다. 500여 년 전 삼국시대 유비도 관운장과 장비를 데리고 한때 목사를 지냈던 고장이기도 했다. 서주는 중국 대평원의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중국 천하를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였던만큼 자고로 무령군이라고 해서 보유하고 있는 병력도 자그만치 10만이 넘었다. 만약 고구려군이 낙양으로 진군을 했다가 서주군이 뒷북을 치는 날이면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서 이정기는 먼저 서주를 쳐서 후환을 없애고 싶었던 것이다. 이정기가 서주 공격의 총사령관이 되자 을지마사는 치주로 돌아가 평로와 하남 14주의 관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서주는 조주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었지만 거리는 꽤 멀었다. 고구려군이 처음으로 황하를 건너 서주 근처에 당도한 것은 조주를 출발한 지 꼭 12일 만이었다. 서주자사 최수는 급보를 받고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다. 그는 원래 문관 출신으로 군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당나라에서 서주자사만큼은 왕이나 적어도 재상의 연줄을 가진 배경 좋은 사람이 임명되었다. 당나라를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이기도 했지만, 온갖 재화가 풍부해서 진상도 하고, 사복을 채을 수도 있는 노다지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주자사 최수는 덕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중승 최관의 아우로 형의 배경을 믿고 오만 방자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자였다. 특히 고구려가 망하고 고구려 유민이 가장 많이 붙들려온 장소가 바로 이곳인데, 최수는 고구려 백성들을 야만족이라고 치부하고 혹독히 다뤘다. 그러나 이정기의 고구려군이 운주, 연주, 복주, 조주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서주로 공격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최수는 사색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승산이 없었던 것이다. 서생 출신인 그는 군사훈련도 소홀히 했지만 병사들의 반수 가량이 고구려 출신이라는 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고구려 백성들은 민족 차별 때문에 하다 못해 촌장도 시켜주지 않고 1년 내내 중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차라리 졸병으로라도 들어가는 것이 덜 고달팠다. 그래서 고구려의 젊은이들이 군의 하층부를 이루고 있었다. 당장에 이들을 쫓아내자니 병졸 없이 싸움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최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고민만 하고 있다가 때를 놓치고 말았다.그때쯤 서주의 무령군에 소속되어 있는 고구려 출신 병사들도 진짜 고구려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모르고 있진 않았다. 그들 가운데 곽리사명이라고 하는 젊은 병사가 있었다. 그는 남달리 무예가 출중하고 성품도 원만해서 병사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중국인으로 태어났으면 벌써 부장은 되었을 텐데도 휘하에 겨우 30여 명을 거느리는 반장의 지위에 있었다. 고구려군이 쳐들어온다는 풍문이 있고 나서부터 곽리사명 주위에는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서주성은 겉으로는 평온한 듯했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결연한 의지가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이정기의 5만 군이 성 밑에 이르러 성을 포위했다. 최수는 어찌됐든 자사의 자리에 있는지라 성을 포위한 고구려군을 보고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종사관 등요를 불렀다. "내 5만 군을 줄 테니 당장 성문을 열고 나가 이정기 도적놈을 물리 치시오." 그러나 종사관이란 자도 노략질이나 일삼는 탐관오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쌓아 놓은 재물과 목숨이 아까웠다. "저보다는 교장 진충사가 적임자입니다. 그라면 이 난국을 타개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교장이라고 하면 겨우 중급 군관. 썩어빠진 서주 관리 가운데도 가뭄에 콩나듯 진충사같이 청렴하고 용감한 장수가 있었다. 평소에 찬밥 신세였던 그가 서주성이 위급한 상황에 이르고 보니 갑자기 떠받들리는 처지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서주 성문이 열리면서 진충사를 대장으로 서주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정기도 칼을 뽑아 들고 마악 공격 명령을 내리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당군이 갑자기 미쳤나?' 서주성에서 쏟아져 나온 당군은 도무지 전투 자세가 아니었다. 많은 수의 병사들이 창과 칼을 거꾸로 잡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고구려 만세 !" "만만세 !" 이정기는 그제서야 그들이 고구려 백성들임을 알아보았다. 만약 이정기가 공격 명령을 내렸더라면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날 뻔했던 끔찍했던 순간이었다. 진충사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일이 틀어져 버린 것을 알고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이정기는 일부 서주 병사들이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고함을 지르며 돌격 명령을 내렸다. 목표는 성안이었다. 장팔, 떡쇠, 귀실우오, 연개수근, 을지문무가 하남군을 이끌고 급히 성안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서주성은 고구려군이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기네들끼리 패가 갈려 한창 어우러져 싸우고 있었다. 이 틈을 타서 곽리사명은 일부 고구려인 병사들을 이끌고 자사 최수 이하 장수들을 사로잡으려고 관내로 올라가 중국인 호위 병사들과 대적하고 있었다. "아뿔싸!" 장팔이 막상 성안으로는 들어왔지만 모두 다 당군 복장을 하고 있어 누가 우군인지 구별이 되지 않아 실로 난감했다. '이 일을 어쩐다....' 그때 장팔의 머리 속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고함을 내질렀다. "고구려 사람은 고구려를 외쳐라." "고구려를 외쳐라!" 드디어 이곳 저곳에서 고구려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를 외치는 소리가 점차 성안을 가득 채워 갔다. 고구려가 그날의 군호가 된 셈이었다. 중국인 병사들은 사방에서 요란하게 들려 오는 고구려 소리만 듣고도 기가 죽었다. 서주성내 당군은 더 이상 싸울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두들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중국 대륙 동부 제일의 요충지 서주성이 허망하게 함락되는 순간이었다. 서주자사 최수를 비롯해서 고급관리 300여 명은 고스란히 생포되었다. 이로써 이정기는 평로,하남 전부와 강소, 안휘 일부를 포함한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호구 수는 중국 본토의 84만 호에 평로 30만 호, 인구 수는 300여만 명, 우리 민족으로서는 국조 단군 이래로 최대의 영토와 인구를 거느리게 된 것이다. 그날 밤 이정기는 이번 출정에 공이 많은 장병들을 위로했다. 특히 서주성 병사 곽리사명을 불러 공을 치하하고 그를 부장으로 승진시켰다. 이처럼 이정기가 중국 본토에 쳐들어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때까지도 고구려 사람으로 살고 있었던 수많은 유민들의 협조가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악의 씨앗들]@ 이정기는 어느덧 마흔다섯이 되었다. 전쟁터를 누비기에는 이제 그도 젊은 나이가 아니었다. 그날따라 심신이 피곤해서 정무를 마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려는데 청주 종사관 이유가 찾아왔다. 이유는 말소리를 은근히 낮췄다. "이 장군, 앞으로 서주를 어찌하려는가?" "형님 생각으로는 어찌했으면 좋겠소?" "하남과 똑같이 할 수는 없네. 이곳 고구려 백성은 그간 야만적인 습성에 젖어 있어 교화가 될 때까지는 그냥 놓아 두는 것이 좋을 성싶네." 이정기는 마음속으로 불쾌했지만 사촌형 이유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이유가 말하는 야만적 습성이란 곧 고구려적인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유는 평소에도 자기가 중국식 교육을 받은 지식층이라고 은연중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터였다. "왜 그래야 하지요?" "앞으로 천하를 얻으려면, 절대다수인 중국인을 지배해야만 하는데 그들이 등을 돌리지 않도록 다독거릴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해서 하는 말이네." 이유의 언변은 사람을 녹이는 데가 있었다. 이정기도 처음에는 불쾌했지만 이유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 알겠습니다 " 그때 이유가 이정기 앞으로 한걸음 다가앉았다. "그런데 후사는 어찌할 텐가?" "후사라니요?" "자네가 천년 만년 살 수는 없는 일. 지금 장수들이 자네 앞에서는 복종하는 체하지만 뒷일을 누가 예측할 수 있는가?" 평로에서 후희일과 함께 건너온 악의 씨가 드디어 싹 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정기가 묵묵부답 침묵을 지키자, 이유는 혼잣말하듯 뇌까렸다. "나와 자네는 같은 핏줄, 하늘이 정해준 혈연 관계라 어떤 경우에도 변할 수가 없겠지만, 지금 평로와 하남은 모두 대리 식구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뿐 아닌가?" 이유의 말 속에는 대리에서 온 을지마사, 귀실우오, 연개수근, 목도사 그리고 을지마사의 의형제 장팔을 경계하라는 뜻을 다분히 비추고 있었다. 이정기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일그러진 입에서 노기에 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형님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은 고구려 백성들을 또다시 파멸시키자는 겁니까? 오늘 형님이 하신 말씀은 안 들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 이유가 멋쩍은 듯이 물러났다. 이정기는 서주에서 한 달을 더 머물면서 질서를 잡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그리고 장팔에게 따로 5만 병을 주어 서주를 지키도록 한 후 치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서주성 함락에 공이 많은 곽리사명을 데리고 왔다. 치주로 돌아온 이정기는 이제 당나라의 장안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수도를 다시 장안 쪽에 가까운 운주로 옮겼다. 그런데 일이 꼬이느라고 그랬던지 그즈음 이정기와 을지마사 사이에 조그만 오해가 생길 만한 일이 두 가지가 발생했다. 을지마사가 조주성을 함락시키고 치주로 돌아와서 보니 그사이 대리에서 온 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데가 죽었다는 것이다. 을지마사는 친부모를 잃은 듯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대리에서 온 아소수미는 나데의 유서를 꺼내 놓았다. 을지마사에게 고구려가 나라를 되찾는 것을 보지 못하고 먼저 가는 것이 한스럽다. '어느 땅, 어느 하늘 밑에라도 좋으니 고구려를 세워 먼저 간 조상들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마련해 다오. 나는 이제 천수를 누린 몸, 죽어서라도 너희들을 돕겠다. 이곳 대리 일은 가한서한에게 맡기고 가니 뒤를 부탁한다.' 을지마사는 나데의 유서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향을 사른 다음 절을 했다. 유서라도 모시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달포쯤지나 이정기가 새로 정한 수도 운주로 돌아왔다. 을지마사는 그간에 체결한 대소사를 보고한 다음, 넌지시 운을 떠보았다. "이정기 장군, 이제 영토도 대제국을 건설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넓어졌소."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은....." "이번 기회에 나라를 세웁시다. " 이정기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을지마사가 내친 김에 하던 말을 계속했다.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고구려 백성들의 구심점이 있어야 되겠소." 이정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 나보고 왕이 되라는 말이오?" 을지마사는 지난 25년 동안 이정기와 온갖 역경을 함께 헤쳐 나온 피붙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을지마사는 이정기에게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있었다. "왕이 되어야 합니다. 이 장군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아직도 산지 사방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유민들을 위해서입니다." 을지마사와 이정기의 생각에는 차이가 있었다. "을지마사!" 이정기가 전에 없이 굳어진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우리가 언제 왕이 되자고 평생을 고난 속에서 지내며 이 일을 해왔소? 오직 민족의 원수 당나라를 쳐부수고, 고구려를 되찾자는 일념이 아니었소? 나는 지금까지 그 이외의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소." 두 사람은 그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며 서로의 오해를 풀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을지마사는 괜히 섣부른 말을 했구나 하는 일말의 후회가 있었고, 이정기는 그 나름대로 을지마사가 자기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여섯 달쯤 지나서였다. 두 사람 사이에 또 조그마한 대립이 생겼다. 이정기의 통치 지역은 평로와 하남인데 두 지역 사이에는 성덕이 끼어 있었다. 성덕절도사 이보신은 겨우 6개의 주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그 또한 뼈대가 있는 무골이어서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저항을 해왔다. 이보신은 특히 호걸다운 이정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는 매사에 협조적이었다. 양쪽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서로 잊지 않고 사절을 보내 돕도록 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정기는 벌써 성덕을 토벌하고 평로와 하남을 같은 지역 으로 통합했을 터였다. 그러나 이보신의 처 동씨는 남편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성덕이 하필이면 이정기의 평로와 하남 사이에 끼어 있다는 걸 은근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특히 성덕과 하남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덕주와 체주와는 사이좋게 지내려고 애를 썼다. 그즈음 덕주자사는 이정기의 사촌동생 이사진이었다. 이사진이 적임자여서라기보다는 대다수의 장수들이 계속되는 출정으로 자리가 비다 보니 그리 되었던 것이다. 이사진은 이유의 동생답게 중국풍을 좋아했다. 이사진은 이웃한 성덕의 동씨가 대접을 후하게 하자 금방 친밀해졌다. 동씨에게는 천하절색의 딸이 있었다. 옥주라고 하는 동씨의 18살 난 딸을 한번 본 사람들은 안녹산의 난 때 죽은 양귀비가 환생했다고 떠들어 댔다. 옥주가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자태가 한떨기 매화꽃 같다가도, 금세 눈발 속에서 곧게 서 있는 대나무처럼 청초해 보였다. 어쩌다 옥주가 눈이라도 한번 흘길라치면 그 앞에 있는 남자들은 저절로 얼어붙고 말 정도였다. 게다가 동씨는 욕심을 내어 절묘한 방중술까지 터득시켜 놓았다. 여자를 남자의 성도구로 여기는 중국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방중술이 부끄럽다기보다는 오히려 당연하고 자랑스러운 기술이었다. 이 소문은 온 나라에 퍼져 당황제 대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대종도 천하에 없는 호색한이라 옥주를 후비로 삼겠다고 몇 차례 사신을 보내 청혼을 했지만 반당적인 이보신이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하고 있었다. 동씨는 마음속으로 점 찍어둔 신랑감이 있었다. 바로 이정기의 외아들 이납. 이납은 아내가 아기를 낳다가 죽은 후 홀아비로 있었다. 만약 이납을 사위로만 맞는 날이면 성덕의 안전은 물론, 남편 이보신도 좋아할 것이고 아직 나이가 어린 아들 이유악의 후견인이 되어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동씨와 한통속이 된 덕주자사 이사진은 조주로 가서 감언이설로 이납을 구슬렸다. 한참 혈기가 왕성한 이납도 여러 달 한 곳에 붙박혀 지내다 보니 답답하던 차였다. 숙부 이사진의 과장된 표현에 의하면 산해진미가 풍성하고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다는 성덕 이야기를 듣고는 슬며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다음해 동씨의 친정 아버지가 죽었다. 이정기가 조문 사절을 보내려는데 이납에게서 성덕과의 우호 관계를 생각해서 자기가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청이 들어왔다. 이정기도 이보신과의 오랜 우정을 생각해서 자기의 아들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을지마사가 이정기를 찾아왔다. 을지마사는 이사진의 행동에 대해 풍문으로 들은 바가 있어서 은근히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정기 장군, 조문사절은 다른 사람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정기가 의아스럽게 생각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확실치도 않은 풍문을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조주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인데 자사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지 않습니까?" "을지 장군, 나는 이보신과의 오랜 우정을 봐서라도 이납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소." 을지마사는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풍문을 빗대어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듣기에는 덕주자사 이사진과 이보신의 처 동씨 사이에는 정도 이상의 친분이 있다고 합니다. 혹시나 아직 홀몸으로 있는 이납이 잘못될까 봐 내 자식처럼 걱정이 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때 서주에서 다니러 와 있는 이유가 옆방에서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듣고 있었다. 이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장지문을 열고 나왔다. "을지 장군, 이젠 우리 집안일까지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 셈이오?" 이유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을지마사에게 대들었다. 이정기가 사촌형 이유를 나무랐다. "형님, 말씀이 너무 과하십니다. " 이유는 이정기의 말을 듣고도 불쾌한 낯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저자가 누군데 감히 이씨 집안을 모함한단 말이냐?" 을지마사는 더 이상 할말이 없어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밖은 눈이 부시도록 환했다. 그러나 왠일인지 전에 없이 외로움이 밀려왔다. 을지마사가 하늘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드는 모양이군.' 그런데 며칠 후 발표한 인사발령장을 보고 을지마사는 어리둥절했다. 평로하남군국공 귀실우오 복주자사 목도사 운주자사 떡쇠 제주자사 사마광 밀주자사 고명영 기주자사 사마상 해주자사 을지문무 내주자사 왕겸 등주자사 연개수근 연주자사 이사진 덕주자사 이장경 체주자사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한 인사였다. 더욱이 을지마사의 큰아들 을지문무를 내주자사로 발탁해 을지마사에게 그간의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속 내용을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못했다. 평로 하남국과 국경을 이루는 전방 요충지는 전부 이정기 일문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주의 이유, 조주의 이납, 덕주의 이사진, 체주의 이장경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정기도 역시 사람인지라 옆방에 와서 기거하다시피 하는 사촌들의 청을 물리칠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혈족들이 분발해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정성이라면 가상한 일이었지만, 훗날 그들의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악의 씨앗이 서서히 자라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성덕의 조문사절로 간 이납은 상갓집인데도 파격적인 대접을 받았다. 이납은 동씨의 첫눈에 들었다 체격이 우람하고 잘생긴 이납을 보고는 흡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납이 도착하던 날 밤 성덕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이납을 주빈으로 온 문무관원들이 모여 그날 밤을 흥겹게 놀았다. 동씨가 남편 이보신에게 슬쩍 속마음을 비쳤다. "저 정도면 사윗감으로 부족함이 없겠지요?" "누가 말이오?" 동씨는 남편을 보고 눈을 흘겼다. "누구긴 , 이납말이지요." 이보신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 흠칫 놀랐다. 그러나 이보신은 사리 판단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이보신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정기와 아무리 친하다고 하더라도 혼사만은 안 될 것이오." "대감, 무슨 말씀이온지요?" "중국인 며느리는 맞지 않을 것이외다." 동씨는 놀라기는커녕 혼자서 미소를 지었다. 동씨의 웃음 속에는 남편 이보신이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아무튼 이 일은 소첩에게 맡겨 주세요." 그날 밤 이납은 거나하게 취했다. 밤이 깊어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문득 갈증을 느껴 물을 마시려고 눈을 떴다. 이납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마악 다시 잠이 들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가늘게 떠는 여자의 흐느낌이 분명했다. 이납은 잠이 확 달아났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방 안을 살펴보니 윗목에 황촉불이 타고 있고, 그 옆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성장을 한 여인이 앉아서 고개를 묻고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납은 괴이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낭자." 여인은 대답을 않고 침묵했다. "낭자, 내 방에 들어와서 울고 있는 까닭이 무엇이오?" 그제서야 여인이 고개를 살포시 들었다.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납은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본 순간 문득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낭자, 사연이 있거든 말을 해보시오." 그러나 여인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이납은 공연히 몸이 달아 자신도 모르는 새 여인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도을 일이 있으면 도우리다." 그때 꽃처럼 붉은 낭자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의 아버님이 역적질을 해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 ?" "주위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장군님을 모시면 절도사께서 진노를 푸실 것이라고 말해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찾아들었습니다만 이 천한 계집을 장군님께서 받아 주실 까닭도 없고 해서 그만,,,,,, 흑 흑." 여인은 말을 맺지 못하고 다시 흐느꼈다. 이납은 가슴속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납도 이정기를 닮아 여자 관계가 엄격한 편이었다. 주위에선 성화를 댔지만, 사랑하는 처 고씨가 죽고 나서 3년이 가까워 오도록 홀아비로 지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취중에 만난 절세가인의 흐느낌 앞에서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다. "오냐. 내가 백방으로 힘을 써 네 아비를 살려 주마." 이납의 말을 듣자 여인은 이납의 품속으로 비스듬히 쓰러져왔다. "소녀는 지금 죽어도......." 이납은 황촉불을 껐다. 갑자기 어둠이 온 방안을 매웠다. 달빛이 휘영청 밝아 창호지 문에 이납이 여인을 끌어당기는 그림자가 어른거리다가 이윽고 사라졌다. 이납은 그날 밤 황홀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낭자는 천하에 둘도 없는 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방중술 또한 절묘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밤이면 어디선가 슬며시 여인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눈을 뜨면 여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일은 그날 이후 숙부 이사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납이 궁금해서 물어 보면 멀리 사냥을 나가서 4 5일 후에나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이사진은 사냥을 간 것이 아니고, 후원의 외진 방에 틀어박혀 시줄이나 외는 기생 몇을 끼고 밤낮으로 주색에 빠져 있었다. 나흘째 되던 날 여인이 이납에게 청을 넣었다. "아버님께서 풀려나셨습니다. 이 장군님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몰라 먼저 만나뵙고 인사를 드리겠다고 하십니다." 이납은 하는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옷을 차려입고 여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때 여인이 소곤거렸다. "남이 볼까 두려우니 이 여자를 따라가세요." 여인은 중년 여자를 가리키더니 이내 사라졌다. 이납이 어둑한 낭하를 지나니 갑자기 큰 방이 나오며 눈앞이 밝아졌다. 방 안에는 여러 개의 황촉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문지방을 넘어선 이납은 중년 여자가 눈짓을 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납 장군님 , 수고스럽게 오시라고 해서 결례를 했으니 용서해 주세요." 문득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납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쌍학 병풍 밑 비단보료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은 바로 동씨가 아닌가. 이납은 이어서 또 한번 놀라야만 했다. 동씨 곁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젊은 여인의 모습이 낯익어서였다. 바로 그 여인이 매일 밤 자기의 처소로 찾아온 낭자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납은 겁이 덜컥 났다.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다시 동씨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내 딸이 평소에 이납 장군을 사모해서 부모로서도 차마 모른 체할 수가 없었어요, 생각 끝에 이 장군님께 부담을 지워 드리지 않고 딸의 소원을 풀어 주려고 이 못난 어미가 그 동안 잘못을 저질렀으니 용서해 주세요," 동씨가 변명을 하고 있는 동안 딸 옥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납에게 의미 있는 웃음을 보냈다. 이납도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을 했다. "예, 알겠습니다. 부모님께 말씀드려 조만간 따님을 모셔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납의 대답을 듣자 동씨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딸 옥주를 돌아다보았다. "뭘 꾸물거리고 있느냐? 빨리 술상을 보아 낭군님께 올려라." 옥주가 배시시 일어나 술상을 들고 와서 이납에게 잔을 따라 올렸다. 이납은 성덕에서 열흘을 묵고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꿈을 꾼 것만 같고, 한편으로는 암담한 마음이 앞섰다. 아버지 이정기에게 이실직고를 했다가는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즈음 이정기는 평로와 하남 15개 주를 다스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제 서주, 조주, 복주를 얻었으니 당나라 장안으로 쳐들어갈 일만이 남았다. 당나라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려면 적어도 30만 병력은 있어야만 했다. 그 중에서 10만은 평로와 하남에 남겨 두어 수비를 해야 하고, 나머지 20만을 공격군으로 사용해야 했다. 이정기는 병참을 충분히 하기 위해서 물산을 장려하고, 장병들을 뽑아 주야로 훈련시켰다. 다행스럽게 하남에는 을지마사, 장팔, 떡쇠 , 귀실우오, 연개수근, 목도사, 고목에 이어 젊은 장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납과 을지문무가 벌써 자사가 되어 있었고, 을지마사의 둘째 을지문성 , 무메가 위구르에서 데리고 온 고을성과 황보우무, 서주성 함락시에 공을 세운 곽리사명 거기에다 평로 하남에서 두각을 나타낸 상평수수, 고봉상, 해오오묘 등이 20대의 혈기를 자랑했다. 그들의 무용은 이정기나 을지마사의 젊었던 시절에 비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들은 벌써 각주의 참군, 훈련대장 등의 보직을 맡아 중간 관리층으로 활약하고 있어 평로와 하남이 매일같이 욱일승천하고 있었다. 장팔은 슬하에 딸만 있었고, 떡쇠 의 아들들은 아직 어렸다. 위구르에서 딸 무메를 따라서 온 자숙 대인은 운주로 온 지 이태 만에 고령으로 죽었다. 그러나 자숙 부인은 그때까지도 정정해서 남편의 죽음을 잊고 보람 있는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자숙 부인은 을지문무가 허텐을 떠난 지 1년 후에 운주로 온 화지와 둘이서 고구려 아이들을 모아 놓고 고구려 역사와 경교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연개수근의 아내가 된 나나도 참가를 해서 하남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나나는 고구려 역사를, 자숙 부인과 화지는 경교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재미있어 했다. 이들이 하남국의 내일을 이끌고 나갈 새싹들이었다. "옛날 예수님이 태어날 때 동방박사 세 사람이 찾아와서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하고 선물을 드렸지. " "무슨 선물을요?"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드렸단다. " "와, 예수님은 좋았겠다. 그런데 하느님은 누구지요?" "응, 고구려 사람들이 믿는 환인은 하느님과 똑같은 하느님이시다.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해와 용을, 저 북방 사람들은 이리와 사슴을 숭배해 왔지만 오직 고구려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어 왔단다. 너희들도 동맹 날이 되면 어른들이 짐승을 잡아 제물로 해서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것을 보았지?" "예, 그럼 우리 민족은 하느님 자손들인가요?" "바로 그렇단다." "그럼 우리들은 중국 아이들보다 더 훌륭한 민족으로 태어났네요." 하남국에서 자라고 있는 고구려 아이들은 나나, 화지, 자숙 부인의 가르침을 통해 어려서부터 민족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성장했다. 운주성 이납의 사건이 터진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납은 동씨와 옥주의 성화에 견디다 못해 결심을 하고 아버지 이정기를 만나러 운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해는 주변이 소란해 일이 더 어렵게만 꼬여 갔다. 때는 덕종 2년(781)으로 이정기가 49세, 을지마사가 47세가 되던 해였다. 덕종은 재위에 오르자마자 변방을 제압하려고 했으나 결국 발등의 불도 끄지 못하고 절절 매고 있었다. 초기에는 충주자사 유안이 전운사(국가 경제책임자)가 되어 나라를 잘 다스렸다. 당나라도 점차 강성해지기 시작하자 주변국들이 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유안이 당시 조정에서 대권을 쥐고 있던 양염이라는 자에게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한 이후 다시 나라가 흔들렸다. 간신은 간신을 낳고 있었다. 또 한 명의 간신은 어사중승 노기로 이자는 용모가 추하고, 얼굴빛이 납색이었다. 그의 생김새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마음이 음험했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원로재상 곽자의는 손님을 접대할 때면 언제나 총애하는 시첩들을 곁에 두었는데, 노기가 병문안을 오자 곽자의가 모든 시첩들을 물러가게 하고 홀로 그를 맞았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으니 곽자의가 대답하기를 "노기의 얼굴은 추하고 그의 마음은 음흥하오. 시첩들이 그를 보면 반드시 웃을 텐데, 뒷날 그가 권세를 얻게 되면 그 일로 우리 일족을 모두 멸할 것이 아니겠소" 라고 했다. 노기는 말재주가 뛰어나 황제의 총애를 받고 경기관찰사가 되었다. 결국 간신 양염은 또 하나의 간신 노기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나라 조정 돌아가는 것이 노상 이런 꼴이었다. 그해 정월에 성덕 이보신이 죽었다. 당나라에서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성덕을 뺏으러 들었다. 위박절도사 전열은 아버지 전승사의 자리를 물려받을 때 이보신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빛을 갚을 셈으로 이번에는 전열이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이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도록 힘을 깼다. 그러나 전열의 혼자 힘으로는 당군의 압력을 당해 내기가 어려웠다. 다급해진 동씨는 딸 옥주를 보내 조주의 이납에게 위급한 사태를 알리고 매달렸다. 그래서 이납은 하는 수 없이 마음을 굳게 다지고 아버지 이정기를 찾아갔던 것이다. 이정기는 불시에 찾아와서 자기 앞에 엎드린 아들을 보고는 놀랐다. "너 임지는 어떻게 하고 이곳에 왔느냐?" "소자를 죽여 주십시오." "뭣이라고?" "아버지 허락도 없이 취처를 했습니다. " 이정기가 기겁을 하듯 놀랐다. "뭐 , 뭐라고? 그래 누구냐?" 이납은 문득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보신의 딸이옵니다." 이정기는 그만 화를 참지 못하고 책상 위에 벼루를 집어 이납에게 던졌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고함을 질렀다. "너는 이제부터 내 아들이 아니다. 냉큼 면전에서 사라져라!" 그날 이후 이정기는 열흘 동안을 방 안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일체 외부 사람들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다. 열흘이 지난 다음 이정기는 결심이 섰는지 을지마사, 장팔, 떡쇠를 불러들였다. 이정기는 그사이 몸이 몰라보게 초췌해져 있었다. 을지마사가 들어오자 이정기가 을지마사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을지 장군, 내 전날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 내 그대의 충언을 듣지 않은 것이 오늘의 화를 불러들였소." "고정하십시오. 대업을 목전에 두고 병이 나시면 큰일입니다." "내 아들 이납이 어느 민족의 여자를 얻든 상관할 바가 아니오. 그러나 중국인만은 절대로 안 되오. 중국인 여자를 얻으면 종당에는 이 평로와 하남의 고구려가 다시 중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 것이오." 을지마사와 장팔, 떡쇠는 달리 위로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정기의 말이 이어졌다. "부자지간은 천륜이라 몇 날을 고민해 보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차마 버릴 수가 없소. 그렇다고 동씨 딸을 내치면 이보신이 엊그제 죽었는데 이정기가 의리 없는 사람이라고 천하가 비웃을 것이오. 그래서 오늘 맹세를 하려 하오." 이정기가 말을 마치고는 이납을 불렀다. 이납이 장지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엎드렸다. "네 이놈 듣거라. 앞으로 이 아비에게 변고가 있을 때는 을지마사 장군이 네 아비 대신이다. 알겠느냐?" "앞으로 나의 가계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고(전처 고목의 딸 사이에 난 아들)로 잇는다. 이보신의 딸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사고에 대해서 친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알겠느냐?" 이어서 이정기가 장도 하나를 을지마사에게 건넸다. "을지 장군, 만약 내 아들 이납이 이를 어겼을 때에는 이 칼로 내 아들의 목을 치시오. 그리고 장팔과 떡쇠 장군?" 이정기는 이 대목에서 말을 끊었다. 장팔과 떡쇠가 긴장을 하며 이정기를 바라보았다. "그대들은 바로 증인들이오." "예 , 알겠습니 다." 이정기의 눈빛이 새롭게 빛났다. "서주자사 이유, 덕주자사 이사진, 체주자사 이장경을 즉각 파면하겠소. 내 같은 핏줄이라고 차마 멀리하지 못하고 인정을 베풀었건만 그자들은 이 평로 하남을 해치고 있을 뿐이오. 이대로 놔두면 필시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불러올 것이오." 그때 장팔이 이정기에게 간했다. "이제 장안과 성덕으로의 출병이 급하지 않습니까? 하남의 고구려군이 출병을 하면 천지가 어지러울 텐데 이 시점에서 자사를 교체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자들을 벌써 파면해야 마땅했으나 이미 시기를 놓쳤으니 조금 기다렸다가 전군이 기세를 잡는 것을 보고 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정기는 무슨 예감이 들었던지 다시 토를 달았다. "그자들을 그대로 놔두면 한시도 안심할 수가 없는데......." 을지마사가 입을 열었다. "장팔의 말이 옳습니다. 이제 온 전군이 출병을 해야 하는데 그들이 등을 돌리기라도 하면 사면초가가 될 뿐입니다." 이정기는 이제 와서 후회스러웠지만 을지마사와 장팔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를 위하여]@ 그해 3월 드디어 평로와 하남의 고구려군이 출병했다. 장팔이 거느린 5만 군이 성덕을 향해 짓쳐 들어간 것이다. 우선 성덕을 당나라의 침략으로부터 구해 주어야만 했다. 장팔은 귀실우오로 부장을 삼고, 그 밑에 고을성, 해오오묘 등의 젊은 장수들을 거느렸다. 이정기가 성문 앞까지 배웅을 하며 재차 당부했다. "우리의 승부처는 성덕이 아니오, 당군을 그쪽에다 묶어만 두시오." "알겠습니다." 다음은 이정기가 직접 이는 본부군인 15만 대군이 북쪽을 향해 떠난 장팔과는 달리 서남쪽을 향해 진군했다. 이정기가 영주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절도사 왕현지를 죽이고 자립한 지 23년 만에 드디어 중국의 심장부를 향해 쳐들어가는 거대한 행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오색 기치를 앞세우고 고취대를 선두로 보무 당당히 행군해 가는 군사들의 행렬이 100여 리까지 뻗었고, 연도에는 하남 백성들이 모두 나와서 법석을 떨며 승리를 외쳤다. 을지마사도 후방에 남지 않고 이정기와 함께 출병을 했다. 필요한 수비 병력만 남겨 두고 하남이 총출동한 셈이었다. 이정기 장군은 연주에 이르러 갑자기 방향을 바꿨다. 13만병은 을지마사가 이끌고 조주를 향해 가고, 2만은 경무장을 시켜 이정기가 직접 인솔했다. 변주의 당군을 공격하기에 앞서 영제거를 끊어 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영제거는 608년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때 강남에서 하북의 탁군으로 군량을 수송할 목적으로 몇 년간의 거창한 토목공사를 벌여 만들어 놓은 운하였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고도 이 운하는 진가를 발휘해서 당나라의 대동맥 구실을 하고 있었다. 강남의 곡창지대에서 양곡과 온갖 물산들이 이 운하를 타고 낙양과 장안으로 올라갔다. 이정기의 2만 경무장병들은 주야로 말을 달려 영제거의 중심지 용교와 와구로 나아갔다. 출병한 지 4일째 되는 날 시야에 거뭇하게 뭔가가 나타났다. 연개수근이 이정기 앞으로 다가가서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이 장군님, 저기에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정기가 눈을 들어 바라다보니 검은 선 한줄기가 가물가물거렸다. "옳지 , 저것이 바로 영제거로구나 " "어떻게 할까요?"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새벽 미명에 들이친다." 하남의 고구려군은 그날 밤 불빛도 내지 않고 조용히 야영을 했다. 다음날 예정대로 용교에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새벽 잠을 깨웠다. 용교를 지키고 있던 5천여 명의 진병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아우성을 쳤으나 이정기의 하남군은 벌써 용교로 들이닥친 후였다. 용교의 진병들은 애당초 하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진장 양수는 목숨만 건져 달아나고 진병들은 난군중에 죽거나 생포되었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과연 용교는 영제거의 요충지답게 규모가 컸다. 천여 척의 배들이 화물을 가득 싣고 정박해 있었다. 이정기는 급히 포고령을 내렸다. "어느 배든 움직이면 즉각 불을 지르고 선원들은 참살한다." 이정기군은 다시 와구를 같은 방법으로 공격해서 탈취했다. 이렇게 해서 영제거는 하루아침에 완전히 불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영제거가 그로부터 173년 후 고구려인 이정기의 손에 의해 불통이 되었으니 세상 일이란 참으로 새옹지마였다. 용교를 점령한 이정기는 그곳에 5천 병을 주둔시키고, 조주로 돌아왔다. 조주성은 전쟁 준비로 한창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나라의 마지막 거점 장안을 침공할 하남군 15만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15만의 대병이 황하를 도하할 일이 난제였다. 변주에서 가만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드디어 이정기는 결단을 내렸다. "성덕에 가 있는 장팔의 5만 군을 알아보시오. 만약 싸움에 진전이 없거든 복주를 우회 , 강을 건너 변주성을 공격하도록." 이정기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성덕에 가 있는 장팔군은 싸움이 소강 상태에 있었다. 당나라는 이보신이 죽자 성덕을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침략을 해왔으나, 뜻밖에 이정기의 하남군과 전열의 위병군이 파병을 해서 성덕을 돕자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지 싸우기도 전에 퇴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정기의 지시에 따라 장팔은 성덕에서 복주로 회군을 해서 황하를 건넜다. 그리고 목표 지점인 변주를 향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당나라의 변주자사는 유창이란 자였다. 유창은 당나라에서는 제법 똑똑했던 인물로 이영요의 반란이 일어나고 이희열이 변주를 공격해서 차지하자 이를 물리치고 공을 세워 변주자사 자리에 올라 있었다. 유창은 용교와 와구가 이정기군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절부절못했다. 일시에 군량 보급로가 막혀 버린 것이다. 그는 서둘러서 병력을 황하 연안으로 배치했다. 이정기의 용교와 와구 점령은 곧 변주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유창은 장팔의 5만 군이 황하 남쪽이 아닌 북쪽에서 불쑥 나타나자 당황했다. 그래서 황하 연안에 배치했던 군사들을 서둘러 북쪽으로 이동시켜서 장팔의 군대와 대적토록 했다. 그날 밤 장팔의 진영에서 횃불이 올랐다. 조주의 이정기에게 군사의 도착을 알리는 신호였다. 어둠이 깔린 황하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때는 벌써 5월, 건기라서 강물이 줄어들어 물살은 잔잔했다 오직 밤안개 속에서 물살을 가르는 소리만이 밤새도록 들려 왔다. 수천 척의 배가 이정기의 15만 군을 강 건너로 실어 나르는 소리였다. 다음날 아침, 해가 솟아오르자 물안개가 차츰 걷혔다. 성루에서 황하 쪽을 바라다보던 유창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황하 강변에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낸 이정기의 대군, 무수한 창검과 기치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렵겠는걸 ." 유창은 급히 선봉대장 고증혜를 불렀다. "우리는 수성 작전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저들은 하남의 오합지졸 고구려군입니다. 제가 나가서 단번에 짓밟아 버리겠습니다." 무장 출신의 고증혜는 범 무서운지 모르는 하룻강아지처럼 날뛰었다. 그러나 만고풍상을 겪은 당군 대장 유창은 신중했다. "아니다 지금 하남군은 중국에서 가장 막강해서 당해낼 사람이 없다." "그러나 우리 당군도 20만이나 되지 않습니까? 무엇을 겁내십니까?" 고증혜는 여전히 볼멘 소리를 했다. "싸움의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뿐만이 아니라 용병술에도 달려 있다. " 그러나 황하 유역과 같은 평야지대에서의 싸움은 그 양상이 달랐다. 산. 계곡, 숲 같은 지형지물이 없어서 대개는 정규전으로 결판이 났다. 유창은 한 달이 지나도록 꿋꿋이 수성만 했다. 장팔, 귀실우오, 연개수근 등이 매일같이 성 밑으로 가서 싸움을 돋우었지만, 성 위에서는 화살만 무수히 쏘아댈 뿐 일체 출병을 하지 않았다. 하루는 걱정이 된 을지마사가 이정기에게로 갔다. "이대로 가면 장마철에 싸워야 하는데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정기는 빙그레 웃었다. "염려 마시오. 앞으로 한 달 안에 저자들이 스스로 성문을 열고 싸움에 나설 것이오." "식량 때문인가요?" "그렇소. 용교와 와구를 우리가 점령한 이상, 저들은 앞으로 한 달을 버티지 못할 것이오." 이정기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로부터 20여 일 후 당군은 일제히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20만의 대군답게 위용도 대단했다. 당군은 고증혜 외에도 진가왕무, 사오명 등 1당 1만을 한다는 맹장들이 선봉에 서서 하남군을 향해 짓쳐들었다. 하남군에서도 을지마사, 장팔, 떡쇠, 연개수근 귀실우오, 이납, 을지문무, 곽리사명, 고을성, 상평수수, 해오오묘 등이 각각 일지군을 거느리고 나가 맞서 싸웠다. 일단 접전에 들어가자 싸움은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을 만큼 혼전의 양상을 띠었다. 이쪽 언덕에서 바라다보고 있는 이정기나 성루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유창이나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유창의 얼굴색이 변하며 주위 사람에게 물었다. "저 큰도끼를 휘두르며 무인지경을 달리듯 하는 장수는 누군가?" 옆에서 누군가 아는 체를 했다. "하남군 떡쇠 라는 장수요." "그럼 , 큰 칼을 춤추며 좌충우돌 우리의 군사를 살상하는 저 진홍색 전포의 장수는?" "장팔이라 하옵니다." "또 있다. 장창으로.이리저리 후려치며 난군중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는 저자는?" "저자가 바로 평로하남국 부군국공 을지마사라는 자입니다." "그럼 고선지의 서역 정벌 때 가가맹추를 사로잡았다는 그 장수냐?" "바로,,,,,,." 유창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진시에 시작된 싸움은 사시에 이르자 대세가 판가름나기 시작했다. 변주의 당군이 차츰 밀리고 있었다. 유창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고수를 불러 회군을 알리도록 했다. 등등 두등등 변주성에서 북소리가 들려 왔다. 이어서 성안에서 한테의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들은 하남군을 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퇴군하는 자기편 군사를 엄호하기 위한 군사들이었다. 그날 싸움은 성안으로 미처 들어가지 못한 군사들까지 당군은 3만여 명이 죽거나 생포되었고, 하남군도 5천 명의 병력 손실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당군은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일단 성문을 나온 당군은 성을 의지하고 진을 짰다. 초전 싸움을 장수 대결로 몰고 갈 모양이었다. 당군은 진이 완성되자 붉은 전포를 입은 일원대장이 백마를 타고 나타났다. 바로 고증혜였다. 그는 쌍칼을 양쪽 손에 꼬나쥐고 하남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고구려 동이놈들아, 나를 당할 자가 있으면 나와 보아라." 이정기가 급히 이납을 불렀다. "네가 나가 저놈을 대적하라?" 이정기는 첫 싸움인만큼 자기 아들 이납을 내보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아버지의 말이 떨어지자 이납은 장창을 꼬나쥐고 고증혜를 향해 달려나갔다. 두 필의 말이 엉겨 붙는 순간 두 장수는 첫 합을 내리쳤다. 고증혜가 쌍칼을 휘저으면, 이납이 창을 휘둘러 막고, 이납이 틈새를 보아 창으로 찌르면 고증혜가 칼로 막았다. 두 장수의 싸움은 어느덧 30합이 지나 50합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고증혜의 쌍칼이 차츰 둔해졌다. 하남 제일의 명장이라는 고증혜도 이납을 감당하기에는 벅찼던 것이다. 이납은 이정기를 닮아 무용이 출중했다. 고증혜가 견디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리자 이번에는 당군 진영에서 왕무가 언월도를 춤추며 달려나왔다. 을지마사도 큰아들 문무에게 출전을 명했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은 을지문무는 큰 칼을 빼어들고 왕무앞으로 달려나갔다.왕무는 을지문무를 보자 언월도를 좌우 양편으로 번개같이 휘둘렀다. 을지문무의 칼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을지문무도 만만치 않은 장수였다. 을지문무는 칼을 계속 내리치며 말을 달려 왕무의 주변을 돌았다 왕무도 을지문무를 따라서 돌며 언월도를 휘둘렀다. 두 장수의 싸움이 한식경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을지문무의 입에서 벽력 같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얍!" 을지문무의 칼이 어느사이 왕무의 허점을 파고들어 그의 가슴을 찔렀다. 왕무는 벌렁 고꾸라지더니 마상에서 피를 토하며 굴러떨어졌다. 다음에 출전한 당군 장수는 사오명 이정기가 마악 상대할 이 쪽 장수를 지명하려는데 누군가 뛰쳐나오며 고함을 내질렀다. "에잇, 팔이 근질거려 더 이상 못 참겠다." 떡쇠가 말릴 사이도 없이 큰 도끼를 들고 달려나가고 있었다. 장창을 꼬나쥔 사오명은 떡쇠의 기괴한 형상을 보자 움찔했다. 질풍처럼 달려간 떡쇠는 사오명에게 큰 도끼를 내리쳤다. 사오명이 급히 장창으로 맞받았으나 큰 도끼는 장창을 부러뜨리고 사오명의 머리통을 두 조각 내버렸다. 왕무와 사오명이 허망하게 죽자 당군은 겁에 질려 아우성을 치며 다투어 성안으로 기어들어갔다. 하남군이 그걸 보고만 있을 리 만무했다.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시살했다. 이날 당군은 5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대패였다. 이틀간의 싸움에서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8만 명을 잃은 유창은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변주성이 함락당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누구든 성문을 열고 나가서 싸우자고 하는 자는 즉시 죽인다." 유창은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는 엄포를 놓았다. 유창은 식량이 다할 때까지 버터 보다가 그래도 안 되면 항복을 하는 도리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후 열흘 동안은 소규모의 공방전만 계속되었다. 당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이상 이정기가 공격을 하면 변주를 함락시킬 수는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의 수도 낙양과 장안을 목전에 두고 공성 과정에서 적지 않은 군사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변주에만 묶여 있는 것도 옳지 않았다. "차라리 내일 낙양으로 진군을 합시다." 드디어 이정기의 입에서 결단이 떨어졌다. 변주성은 장팔에게 따로 5만 군을 주어 뒤를 쫓지 못하게 묶어 두고, 전군이 낙양성으로 진격하자는 작전이었다. 낙양성의 수비 병력은 기껏해야 3만여 명으로 2~3일이면 승산이 있었다. 낙양이 떨어지면, 이어서 장안이 떨어지고 마침내 당나라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남군이 승전의 열기로 들떠 있는 바로 그시각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은 또 하나의 대사건을 잉태하고 있었다. 장안으로의 진격을 결정한 바로 그날, 을지마사는 간밤의 꿈 때문에 온종일 심기가 불편했다. 꽃으로 치장을 한 큰 용 한 마리가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꿈이 너무 좋으면 왠지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날 오후 을지마사는 이정기를 찾아갔다. 이정기는 혼자서 열심히 작전 계획을 짜고 있었다. "이 장군님, 출전을 며칠 연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몸도 좀 쉬시고,,,,,,." 그즈음 이정기는 고질병인 등창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주야로 과로를 하고 있었다. 이정기가 하던 일을 멈추고 을지마사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오?" "어젯밤 꿈이 좋지 않아서 ,,,," "원, 을지 장군답지 않게 그게 무슨 소리오," 을지마사는 이정기의 군막을 나오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그날 밤은 그믐이라 칠흑같이 어두웠다. 병사들이 내일의 출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불덩이만큼 큰 별 하나가 문득 밤하늘을 가르며 하남군 쪽으로 떨어졌다. 이를 바라다본 병사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저게 무슨 징조일까?' 군사들은 불길한 생각에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같은 시각, 변주성 안에서는 유창이 혼자서 압일을 걱정하고 있는데 때마침 술사가 들어왔다. 술사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흥분에 떨고 있었다. "기쁜 일이 있습니다." "뭐 ! 기쁜 일" 한 달이 지나도록 고전만 해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유창은 술사의 말을 듣고는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예 , 방금 전에 큰 별이 하남군의 진중으로 떨어졌습니다." 유창의 표정에 놀람의 빛이 역력했다. "그래?" "아마도 오늘밤 안으로 하남군 진중에서 큰 변고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니나다를까 그때쯤 하남군 진중에서는 난리가 났다. 저녁을 먹고 난 이정기가 갑자기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것이다. 등창이 곯아 터져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그때 을지마사가 밖으로 뛰어나와 병사들에게 외쳤다. "빨리 연을 만들어 불을 달아 띄워라. 큰 별을 다시 하늘에 올려 보내야 한다." 이윽고 연이 밤하늘로 치솟았다. 초저녁에 떨어진 큰 별이 다시 밤하늘에 한동안 떠 있는 듯했다. 비로소 장수들과 병사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고요하던 밤하늘에 어디선가 일진광풍이 불어왔다. 그리고 이어서 '뚝 '소리가 나며 굵은 연줄이 중간에서 끊어져 나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장들의 입에서 다시 절망의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천명은 거역할 수가 없는 것인가?' 혼수 상태에 빠져 있던 이정기가 삼경이 되어서야 조금 정신이 드는지 눈을 뜨고는 주위에 모여 있는 제장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죽거든 일체 발상하지 마시오, 내 평생을 고구려를 위하여,,,,." 곁을 지키고 있던 을지마사가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정기 장군님, 죽어서는 안 돼요!" 그러나 이정기의 목소리는 점점 꺼져 들어가고 있었다. "내 평생을 고구려를 위하여, " 뒷말을 잇지 못하고 이정기는 마흔아홉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아직 한창 일을 할 나이에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26세 때 미천한 비장 시절 쿠데타를 성공시켜 평로를 차지하고, 하남으로 건너와 당나라로부터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탈취한 후 당나라의 마지막 거점 낙양과 장안을 눈앞에 남겨두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 이정기의 유언에 따라 진중에서 곡을 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입술을 깨물면서 슬픔을 삼켜야만 했다. 특히 을지마사는 천지가 무너지듯 아득했다. 그는 몇 번이고 '단군님, 한민족의 천운은 오직 이것뿐입니까?' 하고 부르짖으며 오열했다. 다음날 하남의 고구려군은 을지마사의 지휘하에 철수를 서둘렀다. 변주성 안의 유창은 어젯밤 술사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고증혜를 시켜 철수하는 하남군을 뒤쫓도록 했다. 그것을 본 하남군 장수들은 피가 끓어올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러 장수들이 고증혜를 목표로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이어서 고증혜의 목이 땅에 굴러떨어졌다. 누구의 칼을 맞았는지도 분간할 겨를이 없었다. 장수 고증혜가 단 1합도 견주어 보지 못하고 죽자 유창은 하는 수가 없었다. 유창은 속수무책으로 성루에 올라 철수하는 하남군을 멀거니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유창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예상했던 대로 이정기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유창은 이 소식을 즉시 장안에 알렸다. 당나라 덕종 이하 문무관원들은 변주에서 전해진 소식으로 기쁨에 겨워 3일 동안이나 잔치를 벌였다. 잔치가 파할 무렵, 덕종 앞에 꿇어앉은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 즐거워만 할 때가 아닙니다." 그자는 당나라의 시인으로 이태백, 두보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한림학사 백낙천이었다. "때를 놓치기 전에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백낙천은 미륵처럼 처진 볼을 연방 씰룩거리는 덕종에게 귓속말을 했다. 덕종의 낯빛이 대번에 환해졌다. "소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백낙천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덕종을 올려다보았다. 이렇듯 졸지에 이정기를 잃고 허탈해 있는 하남에 또다시 먹구름장이 서서히 뒤덮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20여 일 후 서주자사 이유를 찾아온 문객이 하나 있었다. 이유는 뜻밖에도 백낙천이 찾아온 것을 알자 버선발로 내려와 그를 맞아들였다. 이유는 서주자사에 오른 뒤 일신이 영화롭자, 그 잘난 시를 지어 가며 당나라 시인들과 문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낙천과는 초면이었지만 서로 서신 왕래가 몇 번 있었던 사이였다. "천하 고금에 없는 대시인께서 미천한 몸을 찾아 주시니, 이 몸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원 과찬의 말씀을 제가 이유 시성을 따라가자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서로를 터무니없이 추켜세우며 흥을 돋우었다. 한창 취기가 오를 즈음 백낙천이 문득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자사,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참이오?" 이유는 처음에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 백낙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자사는 비록 핏줄은 고구려지만, 당나라에서도 군계일학과 같은 존재가 아니오. 이대로 오랑캐 무리에 둘러싸여 평생을 허송세월 할 수는 없지 않소? 이제 이 자사의 문명이 중국 천하에 드날릴 그 때가 이르렀소," 이유는 백낙천의 추켜세우는 말을 듣고는 반쯤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저었다. "나도 진즉부터 내 처지를 답답하게 생각해 왔으나 이정기와는 인척간인지라, ,,,, " "이제 이정기도 죽었으니 껄끄러운 게 뭐 있겠소. 조카 이납한테까지 빚진 것은 없지 않소? 자,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밤새도록 취해 봅시다." 다음날 아침, 밀서가 서주에서 덕주의 이사진과 체주의 이장경에게 전해졌다.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운주에서는 이정기의 장례식으로 온 나라가 애통해 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친부모가 죽은 것처럼 슬퍼하며 연일 통곡을 했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이정기와 함께 묻어 달라고 아예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하남에서는 의논 끝에 이정기를 옛 고구려 땅 평로로 모셔 장사 지내기로 했다. 영혼이라도 선조의 땅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라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장삿날이 다 되도록 이유 3형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을지마사의 머리 속에 의심이 버럭 들었다. "왜 이유 3형제가 얼굴을 보이지 않지?" 을지마사의 말을 듣고 난 이납, 장팔, 떡쇠도 그제서야 의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자들이,,,,,,." 운주에서 사람을 급히 서주, 덕주, 체주로 보냈다. 그런데 그 설마가 현실로 나타났다. 성문에는 벌써 당나라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백낙천의 꾀임에 빠져 이유가 당나라에 투항해 버린 것이다. 사자가 서주성 밑으로 가서 고함을 질렀다. "운주에서 왔소. 이유 자사를 만나고 싶소," 한참 만에야 이유의 모습이 성루에 나타났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거만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하남에 가서 이렇게 전해라. 나는 더 이상 동이 오랑캐와 어울릴 수가 없다고." 말을 마치고 나더니 사자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성안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이정기와는 하늘이 정해준 혈연 관계라 목숨이 다할 때까지 변할 수 없다던 그였다. 오히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을지마사, 장팔 등이 딴마음을 먹을지 모른다고 모함하던 이유였다. 그러나 그는 이정기가 죽은 지 한 달도 안 되어 배반을 했다. 평로에서 건너온 악의 씨가 싹을 키우고 자라더니 드디어 그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평로하남국이 서주, 덕주, 체주를 한꺼번에 잃은 것은 크나큰 타격이었다. 덕주와 체주를 잃음으로써 북방 방위선이 무너졌고, 서주를 잃음으로 해서 중국 동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서주의 여파는 이정기가 낙양과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점령해 놓은 영제거의 용교와 와구를 한꺼번 에 상실하는 결과도 가져왔다. 을지마사는 어떻게든 이정기의 공백을 자신이 메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정기가 죽고 다음해(782)운주에서는 성대한 제위식이 있었다. 을지마사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이납으로 하여금 독립국을 상징하는 황제의 위에 오르게 한 것이다. 이납은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을지마사가 강권하다시피 해서 황제의 위치에 올랐다.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즈음 발해는 3대 문왕 대에 이르러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용천부 로 옮기고, 국력이 북쪽과 동쪽으로 뻗어나가 옛 고구려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평로하남국이 국호를 고구려라고 한다면 고구려의 후신을 자처하고 있는 동족국가 발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을지마사는 같은 민족끼리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호를 제로 삼았다. 나라 이름이야 어떻든 고구려 사람들이 세웠으면 실질적으로 고구려국인 셈이었다. 을지마사 등은 날을 받아 백마를 잡고 제단을 쌓았다. 만조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이납이 곤룡포를 입고 제단 위에 엎드렸다. 위로는 환인 하느님 민족을 낳으신 환웅 단군님 고구려를 세우신 주몽님, 오늘 자손들이 중국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습니다. 정녕 혼백이 계시거든 자손들을 긍흘히 여기시어 제국을 굽어 보소서. 배달 백성의 나라가 영원무궁토록 번창하게 하옵소서. 황제의 위에 오른 이납은 중도에서 꺾인 이정기의 대업을 계승해야만 했다. 그래서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당나라로 쳐들어 가기로 결심했다. 장팔에게 20만 병을 주어 조주로 나아가게 하는 한편 을지마사로 하여금 1만 병과 귀실우오, 을지문무를 데리고 몰래 황하를 건너게 했다. 을지마사는 황하를 건너자 이희열군과 합동으로 변주를 공격해서 일시에 통제거를 덮쳤다. 통제거는 영제거와 연결된 운하였다. 드디어 다시 한번 당나라의 생명줄 영제거가 불통되는 대사건이 벌어지고 온 중국 천하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영제거를 불통시킨 을지마사는 귀실우오에게 수비를 맡기고 조주로 돌아왔다. 조주에는 황제 이납과 장팔 등이 낙양과 장안으로 진격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운명은 다시 한 번 당나라의 명을 연장시켜 주고 있었다. 당시 조주자사는 고명영이었는데, 때아닌 가을 장마가 들어 황하를 도강하기 위해 만들어둔 배 3천여 척이 하룻밤 사이에 떠내려가 버렸던 것이다. 일시에 속수무책이 되어 버린 제국군(하남군)은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수의 배를 만들려면 다시 2-3년은 기다려야만 했다. 이납은 고명영에게 죄를 물어 즉시 좌천을 시키고 그 자리를 연개수근에게 대신토록 했다. 한편 제국군이 변주 부근의 통제거를 차단하고, 조주에 집결했다는 급보를 받은 당나라 조정은 간담이 서늘하도록 놀랐다. 급기야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이납의 제국을 토벌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당나라는 오히려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영제거의 불통으로 전국의 민심이 극도로 소란한 가운데 총동원령을 받고 출동하던 경원병 5천 명이 장안을 통과하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황제 덕종은 서문을 통해 겨우 몸만 빠져 나갔다. 장안성의 관리들이 모두 도망을 치자 경원병의 대장 주비는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국호를 한이라고 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인의 제국을 토벌하려다가 오히려 천하지대란이 일어난 것이다. 덕종은 봉천 양주로 피신했다. 몇 명의 수행원들만 달고 도망을 가는 덕종은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배가 고팠지만 황제의 위신에 차마 동냥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농사꾼 하나가 참외 한 개를 주었다. 덕종은 감격한 나머지 즉석에서 그 농사꾼에게 산시관이란 높은 벼슬을 내리기까지 했다. 봉천과 양주에 도착한 덕종은 거기서도 옥수수와 무말랭이로 연명을 했다. 그즈음 이납의 제국에도 조그만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 해 자숙 부인이 노령으로 죽었다. 70이 넘었으면 金수를 다한 셈이었다. 외동딸 무메가 고구려인 을지마사의 아내가 되고서부터 자숙 부부는 자기네들도 고구려인이 되어 뜻깊은 여생을 보냈던 것이다. 자숙 부인이 주관하던 고구려 학교는 여전히 을지문무 의 아내 화지와 연개수근의 아내 나나가 잘 이끌어 나가고 무메가 짬을 내 돕고 있었다. 그리고 이납은 동씨의 딸 옥주와 금실이 좋았던지 슬하에 많은 자녀를 두고 있었다.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위로부터 사도, 사현, 사지, 성무라고 했다. 그사이 이정기, 을지마사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조주에서 회군한 이후 시름시름 앓던 장팔이 하루는 을지마사를 청했다. 장팔의 집에는 온 가족이 모여 있었다. 을지마사가 들어서자 장팔은 가족들을 시켜 큰절을 하도록 했다. "형님, 앞으로 내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돌봐 주시오." 장팔의 손을 꼭 붙잡은 을지마사는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로부터 3일 후 비가 쏟아지고 느닷없는 돌풍이 불더니 관아 앞뜰에 있던 큰 미루나무가 뿌리째 뽑혔다. 이것을 보고 을지마사가 장탄식을 했다. "장팔이 먼저 갔구나!" 장팔의 나이 48세. 을지마사는 가슴 한쪽을 도려내는 것처럼 슬펐다. 그와 더불어 싸움터를 헤맨 지 20여 년 동안 장팔은 두 번씩이나 목숨을 살려준 을지마사를 평생 친형으로 모시고 온갖 정성을 다했다. 을지마사가 황제 이납에게 상주를 해서 장팔을 제왕으로 추서를 하고, 왕의 예우로 상을 치렀다. 장팔이 죽고 나더니 2년 사이에 고목, 귀실우오가 세상을 떠나 이정기와 함께 거사를 했던 옛 장수로는 을지마사. 떡쇠, 연개수근, 목도사가 남았다. 그즈음 을지마사는 공연히 마음이 초조했다. 그래서 하루는 옛 장수들을 불렀다. "이제 우리만 남았소. 우리도 이대로 죽는다면 누가 이정기 장군의 위업을 달성하겠소? 마지막 힘을 내 장안으로 쳐들어갑시다." 한창때와는 달리 기개가 많이 꺾인 을지마사는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어느덧 떡쇠 . 연개수근, 목도사의 눈시울이 붉어져 왔다. 때는 덕종 정원 3년 섬서성까지 도망을 갔던 덕종은 장수 이성의 분전으로 주비를 몰아내고 장안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제국의 서북부에 웅거하고 있던 위박의 전열은 친동생 전서에게 죽임을 당해 풍지박산이 되었다. 전서는 성격이 흉악해서 잘못을 많이 저질렀으나 전열이 차마 죽이지 못하고 매를 때린 뒤 구금했었다. 전서가 이를 원망하자 그의 조카가 말렸다. 그러자 화가 난 전서가 조카를 죽였다. 그는 화가 풀리자 이내 후회를 했으나 전열이 반드시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고는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잠이 든 전열과 가족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전열이 갑자기 죽자 변주의 북쪽에 있는 위박은 매일같이 시끄러웠다. 을지마사는 당나라가 뿌리째 흔들리고 위박마저도 위태로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조주에서도 그사이 황하를 도강할 수 있는 새 배들이 준비되어 군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 이납이 총동원령을 내리자 12개 주에서 군사들이 속속 운주로 향했다. 제국의 수도 운주에는 기일 안에 20만이 집결했다. 운주 성내가 온통 오색 깃발로 뒤덮이고 바야흐로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쳐들어가는 대서사시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앞일을 누가 예측할 수 있으랴. 출전 날짜까지 잡힌 마당에 을지마사가 덜컥 자리에 누워 버렸다. 을지마사는 용을 쓰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밤낮으로 열이 올라 온몸이 불덩어리 같다가 곧 식은땀을 흥건히 흘리기를 되풀이했다. 황제 이납이 걱정이 되어 용하다는 의원들을 모두 불렀지만 그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을지마사의 병세가 차츰 깊어 가더니 어느 날 드디어 혼수상태로 빠져들었다. 을지마사는 마치 긴 꿈을 꾸는 듯했다. 주강 남쪽 마을에서 나라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던 어린 시절. 아소미네와 둘이서 바깥 세상으로 나왔던 일, 농우로 가던 길에 모래 폭풍을 만났던 일들이 눈에 보이듯 환하게 떠올랐다. 모래 더미에 갇혀 죽은 아소미네가 혼자서 사막길을 터벅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놀라서 급히 아소미네를 부르며 뒤쫓아갔다. "아소미네님 ?" 대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 을지마사는 그만 눈을 번쩍 떴다. 무메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을지마사가 힘없이 다시 눈을 감으면 긴 꿈이 계속되었다. 낙양성에서 탈출하다가 유씨촌에서 죽은 여옥, 여옥이가 언덕에서 철쭉꽃을 따며 해산하게 웃는 얼굴로 손짓을 하며 을지마사를 불렀다. 을지마사가 급히 쫓아가려는데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을지마사는 안타까워 소리를 질렀다. "여 옥이 -." 여옥이 대신 무메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 정신 좀 차려요." 을지마사는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다시 혼란한 혼수상태로 빠져들었다. 금방 고선지가 나타났다. 그와 함께 설산을 넘고 넘어 서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동관에서의 그의 잔혹한 죽음. 이어서 한 소녀가 살구를 들고 나타났다. 소녀가 을지마사에게 살구를 건네면서 빙긋이 웃었다. 무메였다. 그러나 곧이어 무메가 살구를 모두 땅에 떨어뜨리고 뽕나무 밑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불현듯 무메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달려가서 덥석 껴안았다. "무메, 나 여기 있어." "예 , 알아요." 무메는 헛소리를 해대는 을지마사를 안타깝게 내려다보았다. 을지마사는 꼬박 열사흘 동안을 비몽사몽으로 지냈다. 그 뒤로도 평로에서 이정기를 만나 쿠데타를 일으키고, 하남으로 건너와 온갖 고생을 다 해가며 15개 주를 개척했던 지난 일들이 또렷이 떠올랐다가는 이내 사라졌다. 열나흘째 되던 날 아침, 을지마사는 오랜만에 제정신이 나는 듯했다. 그는 옆에 있는 무메의 손을 꼬옥 잡으며 가족들을 돌아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의외로 만족스럽고 평화로웠다. "내 생애에 많은 것을 이루었소." 긴 숨을 내쉬었다가 그의 말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당신 고생이 많았구려. 막내 문성을 대리 고구려 마을로 보내 그간 내가 진 빛을 갚도록 해주시오." 말을 마친 을지마사의 머리가 이윽고 베개 밑으로 떨어졌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을지마사가 죽었다는 비보가 전국에 전해지자 제국의 문무관원들과 백성들은 식음을 전폐하고 3일 밤낮을 통곡했다. 그리고 모두들 상복을 입고 조의를 표했다. 연개수근과 목도사는 자결을 했고, 떡쇠는 문설주에 머리를 찧어 가며 통곡을 하는 바람에 유혈이 낭자했다. 무메도 남편을 따라 자결을 하려고 했으나 경교의 교리가 허락치 않았다. 그즈음 제국에서는 묘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을지마사가 몸져누운 날부터 폭풍이 일어 황해 바닷물이 거세게 꿈틀댔었다. 을지마사가 죽자 사람들은 을지마사의 혼백이 황해 바다의 용이 되어 고구려로 돌아갔다고들 했다. 을지마사의 시신은 연개수근, 목도사와 함께 고구려 땅 평로로 모셔 이정기 곁에 묻었다. 요동성 밑 양지바른 언덕 위에 무덤 네 개가 들어섰다. 을지마사를 장사 지내던 날은 고구려의 옛땅 요동벌에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 갑자기 하늘이 어둑해졌다. 이윽고 새로 생긴 무덤들 위에 하얀 싸락눈이 덮이기 곡작했다. @[후기]@ 그 이후 고구려 백성들이 세운 제국은 어찌 되었을까? 주인공 을지마사가 세상을 떠났으니 후기라는 명목을 달아 궁금증을 풀고자 한다. 아버지 일세대들이 몇 년 사이에 갑자기 죽어 버리자 제국은 한동안 빈집 같았다. 을지문무, 곽리사명, 고을성, 황보우무, 상평수수, 고봉산, 해오오묘 등 젊은 장수들이 즐비했지만, 초창기의 온갖 역경을 헤쳐온 일세대 장수들하고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랐다. 이납은 아버지 이정기를 닮아 대담하고 지혜로웠다. 그는 제국 주변의 반당 세력들이 망해 가는 데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운하를 끊는 등 당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꿋꿋이 제국을 잘 지켜 나갔다. 그러나 그는 단명했다. 덕종 정원 8년(792)에 불과 41세의 나이로 죽어 버렸다. 그는 아버지와 생전에 한 약속을 지 켰다. 고목의 딸 사이에 난 사고를 태자로 삼았다가 왕위를 물려주었다. 사고는 제위에 오르자 부국강병책을 썼다. 그는 자기의 할아버지 이정기와 아버지 이납을 닮아 영특했다. 그래서 제국의 영토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나라와 백성들이 부유했다. 그러나 그 역시 명이 짧았다. 겨우 14년간 제위에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에게는 명안이라는 외아들이 있었다. 이사고가 죽을 당시 명안은 겨우 16살이었다. 제위는 자연히 이사고의 이복동생 이사도에게 넘어갔다. 이사도는 이납과 옥주 사이에서 난 큰아들이었다. 이정기 장군이 생전에 염려했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사도 또한 이정기나 이납 못지않게 당차고 용감한 면이 있었다. 시기만 잘 타고났더라면, 아마도 그는 이정기가 생전에 못 다 이룬 위업을 달성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운했다. 당나라에서는 미련하고 무능한 현종, 숙종, 대종, 덕종의 시대가 마감하고 당나라 중흥의 영주라고까지 일컬어지는 헌종이 들어섰다. 그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즉시 이사도의 제국을 침략할 준비를 시작했다. 헌종은 먼저 하남에 하음전운원이라는 150칸이나 되는 큰 창고를 지어 그 안에다 200만 섬의 군량미를 비축했다. 헌종 원화 9년이사도는 직접 2만 병을 인솔하고 불시에 처 들어가서 하음전운원을 불질러 버렸다. 전운원 안에 가득 쌓여 있던 군량미와 전쟁 물자가 꼬박 10일 동안을 탔다. 또 같은 해 고을성과 해오오묘 두 장수를 시켜 낙양성을 기습해서 궁궐을 불살라 버렸다. 젊은 이사도는 재치가 있었다. 하남 이곳 저곳에 산책을 만들어 당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게릴라전도 감행했다. 이로 말미암아 당나라의 민심이 흉흉해졌다. 만약 헌종과 같은 영특한 임금이 아니었더라면 당나라는 벌써 요절이 났을 터였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겁을 먹은 백관들이 이사도의 제국 침략을 중지하도록 들고 일어났다. 까딱 잘못하면 나라가 송두리째 망해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상 무원형과 배도가 헌종을 업고 강경론을 펼쳤다. 이 사실을 안 이사도는 장안으로 자객을 보내 두 사람을 암살하고자 했다. 자객은 마침 출근을 하는 두 사람을 덮쳤다. 자객이 도끼를 내려치자 무원형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배도는 마침 투구를 쓰고 있어서 목숨을 건졌다. 이 사건은 당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큰 상금과 관작을 걸고 범인 색출에 나섰다. 이사도의 제국이 융성해지자 사방에서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 하나가 신라에서 건너와 서주의 무령군 소장이라는 낮은 벼슬을 하고 있던 장보고였다. 장보고는 당군에 몸담고 있었지만 차마 동족 국가인 제국을 상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심을 하고 제국으로 이사도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사도는 그에게 해운을 관할하는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이정기가 을지마사의 도움을 받아 일으켰던 위업에도 끝이 있었다. 이사도의 제국은 내부로부터 불길한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사도의 처는 어머니인 옥주가 골라준 중국 여인 위씨였는데 그녀는 시비들을 모아 제국의 대소사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유오 등 친척이 되는 중국인들을 끌어다가 요직에 앉혔다. 이사도의 말년에는 처 위씨가 정무와 군무까지 독단하다시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선대 이유 3형제가 뿌린 악의 씨앗이 죽지 않고 명맥을 이어오다가 다시 싹을 키워, 이로 인해 제국에 황혼이 깃든 것이다. 818년 7월 당황제 헌종은 선무, 위박, 의성, 무령 등의 여러 절도사에게 제국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한편 당나라는 자기네들의 힘만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어 바다 건너 신라에게까지 원군을 요청했다. 제국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선대 이정기 장군의 이루어 놓은 토대가 워낙 튼튼해서 그때까지도 당나라와 맞대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막강했던 것이다. 마침내 당나라의 명을 받은 신라는 이정기의 고구려 왕국을 토벌하기 위해 3만 명이라는 대군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또 한번의 가슴아픈 동족상잔이 벌어진 것이다. 중국과 신라군 수십만의 협공으로 한 점 섬처럼 고립된 고구려인의 제국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제국의 도지병마사-兵馬使) 유오는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819년 이사도를 죽이고 당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실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끝이었다. 이로써 제국은 761년 이정기 장군이 자립한 이래 이납, 이사고, 이사도 4대를 계승하면서 58년간이나 독립을 지켜오다가 드디어 그 막을 내렸다. 669년 패망한 고구려를 되살려 보려고 안승, 검모잠 등이 독립군을 만들어 발버둥쳤으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지 100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러나 망각의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 같던 고구려의 불씨가 다시 이정기 장군을 통해서 되살아나 당나라와 대적한 지 58년, 그 마지막 불꽃이 영원 속으로 사라져 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이정기의 맥은 뜻밖에도 끊어지지 않고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도도히 이어가고 있었다. 바로 해상의 왕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통해서였다. 장보고는 제국이 망하고 중국의 각처를 헤매었으나 이정기의 제국에 협력했다 해서 갖은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828년, 그는 드디어 결심을 하고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무대로 동부 아시아의 해상권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중국 천하를 지배하려다가 중도에서 뜻이 꺾인 이정기의 원대한 구상을 장보고가 바다에서 이루어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838년, 일본의 승려 원인이 구법을 위해 장보고 휘하의 배를 타고 중국의 산동 지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고구려 백성들이 그때까지도 중국인으로 동화하지 않고 마을을 이루고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그러면 그 많던 제국의 고구려 백성들은 그 후 어찌 되었을까. 뜻밖에도 당나라로 붙들려간 고구려 유민의 맥은 멀고 먼 운남성 대리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제국이 망하기 직전, 대리에는 처음 보는 고구려 백성들 한떼가 나타났다. 그들은 중국의 서북변 서장, 사천, 농우, 난주 등지에서 흩어져 살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 자숙 부인이 세운 고구려 학교의 영향으로 그때까지도 고구려 사람으로 살고 있었던 백성들이었다. 당시 중국의 서북쪽은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티베트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헌종이 즉위해서 농우와 난주를 압박하자 견디다 못한 고구려 유민들이 사천성의 험지를 통과, 일찍이 나라와 나데가 이끌었던 고구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리로 이주해 간 것이다. 그들은 고구려가 망하고 붙들려 와서 뿔뿔이 흩어졌다가 150여 년 만에 드디어 역사적인 만남을 이루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대리의 고구려 유민들은 그곳에서 당군과 한차례 격전을 벌인 후 메콩강 줄기를 타고 더 남쪽으로 이동해갔다. 지도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그가 바로 을지마사의 유언에 따라 대리로 내려간 둘째 아들 을지문성이었다. 끝 @[이정기의 왕국을 찾아서]@ 현장 답사 기행 -이정기 왕국을 찾아서 언젠가 당신네들이 찾아올 줄 알았다. 북경에서 산동성의 성도 제남까지는 370킬로미터 비행기로는 45분 가량 걸린다. 비행기는 초만원이었다. 중국은 인구가 폭발 직전이어서 자동차, 기차, 비행기는 항상 만원사례다. 미리 예약을 하거나 관계 기관을 통하지 않으면 제때 표를 구할 수조차 없다. 비행기 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산동성은 끝간 데 없이 펼쳐진 그야말로 허허벌판. 단조로운 풍광에 시들해져 눈을 감은 필자의 머리 속에 슬그머니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과연 이 답사 여행에서 성과가 있을 것인가." 이정기는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에 살았던 인물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네들의 심장부 일각을 탈취하고 고구려인 왕국을 세운 흔적을 소중히 간수했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어쨌든 열심히 현장을 뒤지다 보면 혹시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역 사를 찾고 간수하는 데 등한히 해온 일말의 반성이기도 했다. 제남 공항에서 시내까지 들어오는데 택시운전사는 필자가 외국 사람이라고 해서 2배가 넘는 바가지 요금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재수가 없었다. 15년 가까이 해외를 돌아다니며 만고풍상을 겪은 필자가 아닌가. "좋소. 공안청 (경찰서)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주라는 대로 지불하겠소." 뚝심으로 바가지를 면했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제남의 옛 이름은 제주로 이정기 장군이 다스렸던 15개 주 가운데 한 주. 조상의 자취를 찾아온 초행길에 택시비 봉변을 당할 뻔했으니 말이다.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부터 탐색에 들어갔다. 그러나 불안했던 예상이 현실로 나타났다. 산동성 박물관 한쪽 구석에 자리한 이정기 장군 시대의 유물은 겨우 도자기 몇 점과 엽전 몇 닢. 낭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필자를 지켜본 박물관 정옌 조리연구원도 계면쩍었던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당나라는 서쪽 장안을 도읍으로 삼아 동쪽의 산동반도 지역은 상대적으로 낙후했지요." 중국인 연구원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그도 중국인인지라 그 이상의 역사적 사실을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으리라. 이정기 장군이 산동반도 일대를 지배하고 멸망한 후에도 이곳에서 한동안 고구려의 문화와 풍속이 남아 있었다. 당나라는 이 일대를 수복한 후 고구려의 것을 말살시키는 데 상당 기간이 걸렸을 터이다. 따라서 당나라의 유물이 남아 있을 시대적 공간이 있을 수 없다. 당나라의 전대인 수와 후대인 송, 명때의 유물은 풍부한데도 유독 당나라 때의 유물만이 빈약한 것으로 미뤄 보면, 역으로 이정기 장군의 고구려 문화가 이 지역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케 한다. 또 이 사실은 이정기 장군의 왕국이 멸망한 뒤 당나라의 화령이라는 장수가 "이정기의 통치 지역은 야만의 풍속이 뿌리박혀 있어서 교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개탄한 말과도 일치한다. 그 야만의 풍속이란 바로 고구려의 풍속이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정기 장군과의 첫 대면 하루를 더 헤맨 끝에 겨우 인터뷰를 하게 된 사람은 산동대학 역사학과 류펑쥔 교수. 그는 산동성의 수.당시대 고고 미술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또 젊어서는 중공군 전사로 복무한 바 있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서 얻은 정보도 정 연구원의 말과 다를 게 없었다. 당나라 시대의 유물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수.당대의 남은 유적 몇 곳을 소개했다. 제남성터, 천불산 흥국선사,그리고 신통사등 등 필자의 다소 설레는 듯한 모습이 신경에 거슬렸던지 류 교수는 "고구려인 이정기는 방탕한 자였지요." 서만주 일대를 차지하고, 중국 대륙 동부의 광활한 지역을 통치한 이정기 장군이 방탕한 자였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필자는 못 들은 척 밖으로 나왔다. 비로소 역사의 현장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났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유적을 찾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이정기 장군 시절의 제주 관할 인구는 36만여 명. 그러나 오늘날 제남시 인구는 600만 명이다. 성은 이정기 왕국 시절에 건설된 청주성文 해자 너머로 보이는 성문이 그 시절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시화에 밀려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한쪽에 명나라 때 개축했다는 건물 한 채만 덜렁 남아 있었다. 1200년 전의 유적을 찾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때 필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도시 중심부에 정방형으로 뚫린 수로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적군을 막기 위해 성밖을 둘러 파놓은 해자였다. 해자는 당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날 제주 사람들은 까마득한 옛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양버들이 늘어진 해자가에서 빨래하고, 조그만 배를 띄워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성터 다음으로 찾아간 장소는 수나라 때 창건되었다는 천불산 흥국선사 제남시 남산 중턱에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이정기 시대에 건축된 산사다. 홍국사는 가파른 산비탈에 세운 절이라 경내가 무척 좁았지만 절벽에 조각을 해놓은 부처상들이 우리 나라의 마애석불과 많이 닮았다. 경주의 석굴암과 같이 바위에 큰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부처상도 안치해 놓았다. 필자는 부처상 앞에서 경건하게 눈을 감았다. 아스라이 시공을 뛰어넘어 옛날 그 시절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정기 장군도 이 절에 올랐을 것이다. 이정기 장군은 석굴암에 붙박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부처상 앞에서 무엇을 빌었을까. 돌아오는 길엔 케이블카를 이용했다. 옛 이정기 장군의 영토에 세워진 제남시 이곳 저곳에는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거대한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제남시 동남방 40킬로미터 남짓한 지점에는 신통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역시 수대에 창건된 절이라고 한다. 자동차에서 내려 왼쪽 골짜기로 접어들자 문득 적막감이 든다. 인적이 없는 제남시 신통사의 용호탑. 곡 끝엔 굴참나무들이 성기게 들어선 절벽이 막아 버려 주위가 깊은 물 속에 잠긴 것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천지 개벽 이래 신들이 살았음직한 그런 유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직 산비탈 여기저기에 세워진 옛날 탑들이 필자를 옛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이곳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신통사 왼쪽 계곡에 세워져 있는 용호탑은 당나라 중기(숙종-대종-덕종 연간 756-805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이정기 장군이 이 지역을 지배하던 시기 (781년)와 같다.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경내에 들어선 필자는 문득 긴장했다. 오래 전에 인적이 끊겨 버린 폐사와 청태가 낀 석탑들이 불쑥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앞의 작은 탑들을 제압하듯 가장 끝머리에 우뚝 솟아 있는 용호탑의 높이는 7미터쯤, 밑부분은 석단으로 이루어지고 중간 부분에는 부처상이 조각되어 있지만 선이 선명치 않다. 이 탑은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비바람에 견디면서, 머리 위로 흘러가는 흰구름을 벗하며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탑을 바라다보고 있노라니 천 년 전의 일들이 바로 엊그제였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정신을 가다듬고 산을 내려오니 주위엔 벌써 어둠이 깔렸다. 생각 같아서는 인근 마을에 들러 촌로라도 붙들고 옛 전설이라도 듣고 싶었지만, 무뚝뚝한 중국인 운전사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다음날 필자는 청주로 향했다. 청주는 제남에서 동쪽으로 1008킬로미터. 기록에 의하면 이정기 장군은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발해만에 떠 있는 묘도열도라고 부르는 조그만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산동반도 서북쪽 등주(현재 산업시)에 상륙했다. 그리고 당시 산동성의 성도였던 청주부를 점령해 거점으로 삼았다. 이어서 동서남북으로 세력을 확장, 마침내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청주는 이정기 왕국에 대한 취재 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소다. -청주성과 그 시절의 자취들 필자는 먼저 청주시 역사서 <<청주시지>>를 뒤졌다. 이정기 장군의 이름 석자가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청주 시민들은 오늘날까지도 이정기 장군을 자기들 고장의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대접하고 있었다. 이정기 일가의 치적을 담고 있는 지금의 -동평현지-와 -청주시지-. "이정기 , 고구려인으로 본명은 이희옥이다. ,,,바다를 건너 청주로 왔다 ...강한 병사가 10만 명. 동쪽을 차지하고 있어서 주위의 번진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당나라를 받들었지만(인정했지만) 당의 법령을 사용하지 않았다. 관작, 군대, 세금, 형벌 등을 독자적으로 집행했다. 당 조정에서는 제어가 불가능했으므로 계속해서 벼슬만 높여 주었다"는 내용이다. <<청주시지>>의 기록대로 모든 통치를 독자적으로 시행했다면, 그가 바로 독립왕국을 세운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벼슬을 줬다는 기록은 예로부터 중국이 주변국가에 제멋대로 행했던 이른바 중화주의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중국은 우리 민족의 어엿한 독립국가였던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해서도 으레 그런 수법을 써 왔다. 청주 박물관 샤밍차이 부관장을 만났다. 그는 토가족 출신이지만, 베이징대 고고학과를 나온 명문 엘리트였다. 필자가 이정기 장군을 찾아 청주까지 왔노라고 방문 목적을 설명하자 초면인데도 반갑게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는 한국에서 그분을 찾으러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샤밍차이 부관장의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놀랐다. 그리고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홧홧 지경이었다. 샤 부관장은 필자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네들이 미안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이정기는 청주시의 큰 인물이었습니다. 진작 그분의 사적비와 기념관이라도 세웠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오늘의 중국은 청주시 서남쪽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정기 왕국 시대의 토성 위로는 명대의 석성이 증축되어 있지요. 현대화에 밀려 유적들이 보존되지 못했지요." 말하자면 근래 옛 유적들이 많이 훼손됐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날 오후 필자는 예상치 못했던 감격의 순간을 맞았다. 이정기 시대의 토성 일부가 아직도 청주시 서남쪽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동행한 샤 부관장이 설명했다. "저기 보이는 석성은 명나라 때 이정기 장군 시대의 토성을 기반으로 다시 돌로 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석성 밑에 바로 토성이 있는 셈이다. 이정기 장군의 토성이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어 더없이 반가웠다. 세월이 흘러 해자는 과수원이 되고, 성벽은 잡풀로 뒤덮였지만 1200년 전의 모습을 떠올리면 당시로는 훌륭한 성이었을 것이다. 성의 둘레는 대략 7.5킬로미터. 동서남북 4개 성문이 있었고 북문은 능상, 동문은 해대, 서문은 태산, 남문은 운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북문 곁으로 옹성이 있었고 옹성 안쪽에 바로 이정기 장군이 집무하던 청주부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했다. 그때의 광경이 엊그제 일처럼 눈앞에 어른거려서 잠시 숙연해 있는데 어디선가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려 왔다. 놀라 고개를 돌린 필자는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불도저가 마지막 남은 토성 부분을 무너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청주시 인구는 100만 명에 이른다 날로 시가지가 확장되고 토성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정기 장군의 옛일을 간직하고 있는 토성은 머지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청주시의 성소 타산(토성에서 서남쪽 5킬로미터쯤에 타산이 있다). 낙타 형상을 하고 있는 타산은 해발 408미터의 돌산이었다. 필자는 1500개가 넘는 돌계단을 밟으며 가파른 정상을 향해 오르고 또 올랐다. 정상 바로 못 미처 동천문이 나오고,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면 부처의 세상에 이르게 된다. 절벽 이곳 저곳에 석굴이 있고 그 안에 무수히 많은 부처가 있는데 크고 작은 마애불이 무려 638개나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불상은 높이 7미터, 작은 것은 10센티 남짓한 것도 있다. 이 가운데 이름이 회자된 불상은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다. 불상들이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을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대세지보살은 자태가 빼어나 중국 사람들이 '동양의 비너스' 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러한 불상들이 산정에서 청주시를 내려다보며 영겁 청주시 성소 타산의 (대세지보살)의 세월을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불상들은 마치 이정기 장군의 흔적을 찾아 그들 앞에 서 있는 필자에게 부질없는 일에 왜 그리 집착하느냐고 나무라는 듯 했다. 제남의 흥국사와 타산의 마애불은 대부분이 당나라 때 만들어진 것인데 이정기의 고종사촌 후희일이 불사를 많이 일으켰던 점으로 미루어 대부분이 이정기 장군 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타산 정상 동편에는 호천궁. 칠보각 옥황전 등의 도교 사원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뜻밖에도 천천이라는 샘이 솟는다 불타의 초능력이 수백 척의 바위를 뚫고 샘을 만든 것만 같은 기이한 느낌 이 드는 곳이다. 타산의 불교 유적에 압도된 필자는 정신을 가다듬고, 또 다른 특이한 유적을 찾아나섰다. 이정기 장군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200여 년 동안 살아 숨쉬는 나무가 있었다. 청주성 북쪽 해자 곁에 범공사라는 조그만 사당이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추수라는 이름의 노수 세 그루가 보이는데 바로 이정기 장군이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노수의 직경은 약 2미터쯤으로 지금도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이정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범공사의 추수이 나무들이 이정기 장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유일한 산증인인 셈이다. 인간은 죽고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겠지만 이 나무들은 앞으로도 얼마를 더 살아 이정기 장군의 혼백을 지키고 있을 것인가. 필자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조그만 정성을 보태 국조 단군 이래 처음으로 중국의 심장부에 진출해 독립 왕국을 세운 민족의 큰 영웅 이정기 장군의 사적비라도 세워 그를 추모하고, 후손들로 하여금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청주를 떠났다. 자동차는 청주 서쪽 운주를 향해 달리건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필자는 연방 뒤를 돌아보았다. 운주는 이정기 장군이 당나라의 중심지를 공격하기 위해 좀더 서쪽으로 옮겨간 곳이다. 제4대 이사도에 이르러 멸망할 때까지 이를테면 이정기 왕국의 수도였다. <<청주시지>>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뒤에 이정기는 운주(지금의 동평현 북방)에서 거처했다. 친히 일선에 나아가 지휘를 했다." 즉 이정기 장군은 당나라와 싸움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근거지를 전선 가까이로 옮겼던 것이다. 자동차가 제남을 지나 시골길을 달리는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한적한 산촌의 음식점 간판이 큼직한 한글로 '조선족 식당' 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은 산동성에서도 오지여서 조선족도 한국 사람도 거의 없는 곳인데 식당 주인은 왜 한글 간판을 걸어 놓은 것일까. 주인은 영업에 관계없이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자부심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일까. 청주에서 운성까지는 거의 400킬로미터 거리. 자동차가 8시간을 달려 운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대에 부풀었던 만큼 실망도 컸다. 오늘날의 운성은 옛날의 운주가 아니었다. 필자가 잘못 찾아간 것이었다. 그렇다면 옛날의 운주는 어디란 말인가. 문물보관소(박물관 지장)에서 근무하는 황보 씨의 설명은 뜬구름을 잡는 식이어서 허망하게만 들렸다. 고대로부터 황하가 여러 번 수로를 바꾸는 바람에 그때마다 옛 운주는 물을 피해 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날 운주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기가 막혀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황보 씨는 하던 말을 이어 간다. "당나라 초기에 운주는 지금의 운성현 장영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당나라 중기 때 황하가 갑자기 수로를 바꿔 덮치는 바람에 동평현 방면으로 이동했을 것이 라고 추측하고 있지요." 마치 화산 폭발로 지하에 묻혀 버린 이탈리아의 폼페이 시가지와 같은 이야기였다. 이제 이정기 장군을 찾아 어디로 가야할까. -이정기 왕국의 전략기지 운주 예정된 다음 취재 코스는 연주, 강소성 서주, 안휘성 숙주. 그러나 황하의 범람으로 옮겨간 옛 운주가 동평현 부근이었을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이상 그곳을 빠뜨릴 수가 없다. 필자는 청주에서 고생을 하며 내려온 길을 되짚어 북상했다. 동평현으로 가는 길은 야트막한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 문자 그대로 대평원이었다. 황하의 퇴적물이 쌓이고 쌓여 모두 비옥한 옥토들이다. 그런데도 옛날부터 이곳은 중국에서 이름나게 가난한 고장이라고 했다. 황하가 한번 범람해서 휩쓸고 지나가면 집이고 가축이고 농작물이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수 이정기가 중국의 내륙경략을 위해 청주에서 치소를 옮겨왔던 운주성. 당시의 성곽은 불과 40여 년 전 분해되어 버려 온 마을에 돌이 널려 있다. 백만 명의 이재민들은 떼지어 유랑하고, 기아에 허덕인 백성들은 서로 잡아먹기까지 했다고 한다. 운성에서 동평현까지 60킬로미터를 자동차로 2시간 넘게 달려 찾아간 문물보관소장은 다시 한 번 필자를 실망시켰다. "아직도 이곳에는 이사도를 기억하는 사람이 더러 있지요. 그러나 그 시절의 유물은 저 동평호속에 잠겨 버렸습니다." 모두 황하의 범람 때문에 발생한 사고였다고 했다. 필자가 낙담해서 입을 열지 못하자 문물보관소장은 자기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으로 여겼던지 설명을 덧붙인다. "이곳은 양산박이라는 호수의 고장입니다.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을 아시죠?" 다음날 필자는 이정기 장군 취재 여행 중 가장 큰 난관에 봉착했다. 아침 출근시간에 맞춰 고서를 취급하는 '당안판'을 찾았으나 중앙 정부의 소개장이 없다는 이유로 문전박대였다. 오기가 났다. 중국 관리들의 냉대에 기가 죽을 필자라면 애당초 이곳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즉시 택시 한 대를 전세내 이정기 장군의 흔적을 발견할 때까지 동평현을 샅샅이 뒤지기로 했다. 길가에서 만난 촌로들에게 수소문을 하면서 시골길을 무한정 달렸다. 해가 서쪽 지평선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주성에서 만난 촌로들의 말에 필자는 그만 다리가 얼어붙는 듯했다. "옛날 동평현을 찾는다구요. 바로 여기요." "정말입니까? 그럼 언제부터 동평현이었지요?" "옛날 어느 땐가 이곳에 큰 왕국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동평현이라고 했었다고 들었소." "그럼 지금은 왜 주성이라고 부릅니까?" "30여 년 전 새로 시가지를 조성하고 현청이 옮겨간 다음 이 곳의 이름을 주성이라고 바꾸어 버렸지요." 촌로들의 이야기는 -동평현지-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했다. "788년 숙성현을 동평현이라고 바꾸었다. 동평현이라는 이름의 시작이었다." 788년의 일이라면 이정기 장군의 다음 대인 이납의 시대였다. 이납은 바로 이곳에서 제의 왕위에 오른 주인공이었으니 촌로들이 말한 그대로였다. 1200년 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이정기 왕국의 도읍터가 비로소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이정기 왕국의 잔해 앞에 선 필자의 입에서는 저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해자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성터는 훼손되어 이제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1200년 동안이나 버텨 오던 성터가 중국이 공산화하면서 소실된 것이다. 토성은 윗부분을 깎아 내고 그 위에 집을 짓거나 뽕나무밭을 만들어 버렸다. 옛말에 상전벽해라고 했는데, 오히려 고성상전이 된 꼴이다. 이 마을에 산다는 마허우더 ( 62세) 노인이 옛날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가 어렸을 때 성 위에서 놀기도 했지요." 인민공화국이 되고 지금은 뽕나무 밭 등으로 변해 버린 이정기 왕국의 수도 동평현(주성)의 토성을 촌로이 마혀우더 씨가 가리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토성을 허물어 밭을 일구고, 바위들은 집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필자가 살펴보니 집집마다 성에서 떼어간 걸로 보이는 바위들이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필자가 40년만 일찍 왔더라도 이정기 왕국의 모습을 생생하게 취재할 수 있었으련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동평현지-에 왕국의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이정기 왕국을 찾았다 이정기 왕국의 면모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청주현지>>의 기록을 찾아보자. "사료에 언급하기를, 이정기 부자 통치 시절에는 법령이 올바르게 시행되고, 백성들의 세금이 공평하고 가벼웠으며, 새로이 많은 농토를 개간하고, 창고에는 물산이 가득 쌓여 멀고 가까운 곳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동서고금을 통해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든 이민족 정권을 이렇게 평가한 것은 참으로 유례가 드물다. 이정기 장군은 높은 인격, 올바른 정치, 훌륭한 전략가의 자질을 모두 갖춘 위대한 군주였던 것이다. 필자는 너무나도 훌륭했던 민족의 영웅 한 분을 찾아 소개하는 데 일조를 했다는 자랑스러움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이정기 왕국의 존재가 당나라에 얼마나 압박을 주었는가는 다음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이정기의 독립 왕국은 소멸됐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대단히 기뻐했고, 백거이와 유종원은 글을 지어 올려 축하를 했다." 이번 취재 여행에서 거둬들인 또 하나의 큰 수확은 이정기 장군의 통치 지역이 일개 번진의 형태가 아니고 완전한 독립 왕국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자치통감-(청주현지)>>의 기록은 자칭 왕국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국가는 하늘로부터 임명을 받은 것이 아니고 모두 그들 스스로가 세운 자칭 왕국이었다. 단지 중국 조정에서 승인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네의 통치 지역 밖의 나라를 이렇게 비하시켜 기록하는 것을 그들의 독선일 뿐이다. -동평현지-를 보면 이와 같은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평로절도사 이정기가 죽었다. 그의 아들 이납이 계승자로 뒤를 이어 운주에서 항거하였는데 자칭 제왕이라고 하고 백관을 거느렸다." 이렇듯 이정기 왕국은 문무백관까지 거느린 당당한 독립국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중국에 매번 당해만 왔던 우리 민족도 일찍이 중국으로 쳐들어가 그들을 다스린 역사가 있었으니 민족적으로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이정기 왕국의 잔해를 뒤지다 귀로에 오르니 벌써 어둠이 내린다. 시간은 촉박했지만, 욕심을 부려 재묘촌 북쪽의 사리산에 올랐다. 정상에 이정기 왕국 시절에 세운 불상이 있어서였다. 산에 오르자 어디산가 일잔광풍이 불어온다. 몸을 숙이고 정상에 다다르니 집채만한 큰 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바위의 앞면에 마애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이정기 장군은 가고 없지만 천불애의 부처는 홀로 남아 이정기 장군의 옛 왕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필자는 다시 연주로 향했다. 연주는 이정기 장군의 통치지역 15개 주의 하나로 동평에서 서남쪽으로 40킬로미터를 가야 했다. 지금은 거대한 시가지로 탈바꿈해 있었다. 연주 시가지 북쪽 옛 해자 근처에 수나라 때 세웠다는 큰 불탑이 보이고, 불탑과 한 울타리에 박물관이 초라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보 다는 먼저 뜰에 내팽개쳐 놓은 옛 비석들에 눈길이 갔지만, 비문이 마모되어 내용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비석 가운데 혹시 이정기 장군의 사적을 기린 것은 없었을까. 그제서야 확대경을 가져오지 않은 자신을 나무라며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연주의 토성 일부도 돌보지 않아 잡초만 무성하고, 그나마 현대화에 밀려 잔해마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진열실 안에 이정기 왕국 시대로 추정되는 당나라 중기 때 만들어진 도자기 몇 점이 있어 감시원 몰래 카메라를 들이댔다. 플래시가 터지는 섬광에 필자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나다를까 감시원들이 나오고 필자는 "뚜이부치 (미안합니다)"를 연발하며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필자가 정작 분노한 것은 박물관을 나온 뒤였다. 연주시 북쪽에 이정기 장군 시대에 쌓은 토성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최근 중국 정부에서는 이 토성을 현대식 성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다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옛것을 복원시키고 있는데 이와 반대로 중국 정부에서는 옛것을 말살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혹시 그들은 현대화라는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필자는 부랴부랴 자투리만큼 남은 토성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아마도 이것이 이정기 왕국 시대에 쌓은 토성의 마지막 모습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이번 취재 여행의 마지막 지점을 향해 갔다. 13일간의 빠듯한 일정 때문에 등주, 내주, 체주, 덕주, 밀주, 기주, 복주, 해주를 탐사해 보지 못한 미련이 남았지만 짧은 일정 때문에 서둘러 끝을 내야 했던 것이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간 곳은 강소성의 서주였다. 서주와 함께 이정기 장군의 주요한 사적지는 안휘성 숙주시의 용교와 회원현의 와 이곳의 운하는 이정기 장군이 군대를 몰고 가서 탈취하고 당나라의 생명선인 보급로를 끊어 버린 현장이다. 서주를 향해 가면서 필자는 자문자답했다. 이정기 장군의 행적처럼 고증이 확실한 민족의 자랑스런 역사가 왜 청소년을 위한 교과서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것일까. 이웃일본은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해서 가르치고,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를 자기네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광분하고 있지 않은가. 훗날 중국과 일본이 자기네들의 옛 영토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역사인식은 어떤가. 일제 때 친일을 했던 스승의 뒤를 이어 중국인의 한사군과 만리장성이 한반도 내에 들어와 있었고, 고조선을 한낱 신화시대로 격하시켜 버린 일부의 민족학계.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의 불확실한 가설이 당당하게도 오늘날 자라나는 청소년을 가르치고 있다. 필자와 친교가 있 는 어느 분의 말이 새삼 가슴을 쳤다. "우리 나라의 국사 교육은 여러 갈래의 학설 중 최악의 것만 골라서 가르치고 있다." 황하는 흘러 한반도로 찾아든다. 연주를 떠난 지 4시간만에 필자는 강소성 최북단에 자리잡은 서주 땅을 밟았다. 서주는 소설 '삼국지'에도 나오는 유서깊은 고장이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데리고 떠돌아다닐 때 이곳에 머물러 잠시 자사로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정기 장군에게는 불운했던 고장이었다. 이정기 장군이 죽고 서주자사로 있던 그의 사촌형제 이유가 성을 당나라에 바쳤으니 말이다. 이 일로 이정기 왕국의 전선이 일시에 무너지고 하북성과 강회남 일대를 상실하게 되는 위기에 처했다 당황한 후계자 이납은 불시에 빼앗겨 버린 국토를 회복하려고 서주와 복주에서 싸웠다. 그러나 싸움에 패하여 통치 지역 15개 주가 12개 주로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필자는 서주에서 서쪽으로 80킬로미터를 더 가서 숙주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옛날의 용교가 보이지 않았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낯선 거리를 배회하는데 눈에 번쩍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이곳 저곳에 걸어놓은 '용교' 라고 쓴 간판들. 그러니까 옛날 다리 용교는 지금의 숙주시 한복판에 자리잡 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숙주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나와서 이렇게 설명을 해준다. "작년에 아파트 부지 공사를 하던 중 우연하게 지하에 묻혀있는 옛날 다리를 발견했죠. 그곳에 용교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면 옛날 운하의 흔적은 모두 없어져 버렸습니까?" 필자가 실망스럽게 묻자, 굵은 테 안경을 쓴 50대 부위원장의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왜요? 동쪽으로 4킬로미터만 가면 옛날 운하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지요. 다른 운하들은 근세에 만든 것이고 옛날 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용기백배한 필자는 운전사를 재촉해 현장을 찾아갔다. 부위원장이 말한 그대로 운하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운하의 폭은 40미터쯤. 먼 빛으로 보이는 양쪽 언덕에는 사서가 기록한 대로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이 운하를 이용해 용선이라는 큰 배로 강남의 물자와 군사들을 실어 날라 나라를 운영해 왔었다. 이에 이정기 장군은 당나라를 쳐부술 계획으로 군사들을 질풍같이 몰아 용교를 빼앗고 운하를 차단해버렸던 것이다. 운하를 뒤로 하고 숙주 시내로 다시 돌아오는데 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숙주 시내를 흐르는 해자였다. 그러니까 이정기 장군은 운하뿐만 아니라 당시 운하를 수비하기 위해 세운 큰 성까지도 점령했던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끝내려던 당초의 취재 일정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말년의 이정기 장군이 당나라군과 맞서기 위해 군사를 길렀던 현장을 찾아본 뒤 작별을 하는 것이 그분에 대한 도리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곳은 바로 조주의 제음 이정기 대에 잇따라 점령했던 용교가 있었던 안휘성 숙주시. 숙주의 한복판에 자리했던 용교는 황하의 범람으로 지하에 묻히고 지명만 남아 있다. 사진은 수, 당 때부터 장안으로 강남의 물산을 실어 나르던 용조 운하이다. 역사 취재에 있어 종종 애를 먹이는 것은 옛 지명이었다. 제음도 고유한 지명이 아님은 물론이다. 황하는 옛날에 제수로 불렀는데, 남쪽을 제음이라고 하고 북쪽은 제양이라고 불렀었다. 필자는 다시 북상하여 조주와 하택을 거쳐 드디어 현장에 이른다. 남쪽 언덕에서 바라본 황하는 과연 아시아의 큰 강답게 광활한 하북평원을 양쪽으로 가르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이정기 장군의 대부대가 강건너 변주에 진을 친 당나라의 군사들과 대결했던 지점은 어디쯤이었을까.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필자는 혼자서 인적이 없는 강가를 한동안 오르내렸다. 그 당당하고 번성했던 옛날을 오늘에 되살릴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서였다. 그때 문득 필자의 머리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저 황하는 흘러 서해를 이루고, 서해는 우리의 조국 한반도를 감싸안고 있는 큰 바다가 아닌가.' 이정기 장군의 숨결이 늘 우리 곁에 머물고 있으리라는 감회에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필자는 그제서야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